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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그대 길을 아는가?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그대 길을 아는가?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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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길을 아는가?

 

 

연암의 손자는 대원군 집정시 우의정까지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박규수. 그가 평양감사를 지내던 시절, 친지 중에 한 사람이 박규수에게 이제는 연암집을 공간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제안을 했다. 뜻밖에도 공연히 스캔들 일으키지 말자는 게 박규수의 답변이었다 한다. 연암 사후 무려 수십 년이 지난 19세기 후반까지도 연암의 글은 금기의 장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선 후기 담론사의 외부자였다.

 

그러던 그가 20세기 초 지식의 재배치 속에서 화려하게 복권되었다. ‘태서신법(泰西新法)’의 선각자로서, 그 이후 내재적 발전론과 더불어 실학이 한국학의 주요담론으로 부상하면서 연암의 텍스트는 탈중세, 민족주의 민중성의 맹아, 근대주의 등등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이를테면 근대성에 의한 재영토화가 추진되었던 셈.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을 소설사의 계보에 등재한 것 역시 전형적인 근대적 절단이요, 문학의 장르라는 수목적 질서로의 포획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 이 작품들은 열하일기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의 산물이다. 한 가게의 액자에 쓰여진 글을 베꼈다는 호질(虎叱)이나 비장들과 밤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떠오른 거부(巨富) 변씨(卞氏)와 허생의 이야기열하일기의 문체적 흐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텍스트들이 얼마나 소설적 문법에 맞는지 혹은 시대적 모순을 얼마나 리얼하게반영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정말로 노쇠하고 피로한 사유의 전형이다.

 

앞에서도 이미 감지했듯, 중세라는 초험적 장을 전복하는 저도저한 에너지는 결코 근대성이라는 일방향에 갇히지 않는다. 강을 건너며 그는 말한다.

 

 

자네, []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도강록(渡江錄)

君知道乎洪拱曰 惡是何言也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물과 언덕 사이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은 이 사이는 중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극단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제3의 길, 그것이 바로 사이의 특이성이다. 장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장차 재()와 부재(不才),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장자』 「산목(山木)

周將處乎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若夫乘道德而浮游則不然, 無譽無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而無肯專爲. 一上一下, 以和爲量, 浮游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여기서 사이에 처한다는 것은 때론 용이 되고, 때론 뱀이 되는 변이의 능력, 만물과 더불어 조화하는 힘,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는 자유 등을 의미한다.

 

연암이 말하는 사이의 사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벗어나 인연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가 아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무수한 차이들이 생성되는,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그런 것이다.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는 호리(毫釐, 저울 눈의 호와 리로 매우 적은 분량을 뜻함)에서 나누어진다고 할 때의 그 호리의 차이! 물론 그 호리의 차이는 천리의 어긋남을 빚는다[毫釐之差 千里之繆]’는 점에서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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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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