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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이단과의 강도 높은 접속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이단과의 강도 높은 접속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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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의 강도 높은 접속

 

 

정황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을 유람하다가 마음껏 주희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범상치 않은 선비로 여기고 이단이라면서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대화를 이끌어 그 속내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으리라. 심세편(審勢編)

駁朱者 知其爲非常之士而毋徒斥以異端 善其辭令 徵質有漸 庶幾因此而得覘夫天下之大勢也哉

 

 

이 유연한 도움닫기! 여기에서도 역시 영토화하는 선분과 탈영토화하는 선분이 뒤섞여 있다. 그의 위치는? 두 선분의 사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암은 주자주의와 청왕조, 지식인과 주자학, 주자주의와 반주자주의 등의 선분들이 교차하는 사이를 매끄럽게 왕래한다. 그렇다면 양명학을 포함하여 주자학의 외부, 불학과 도학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연암은 이에 대해서는 간접화법을 즐겨 구사한다. 즉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논지를 펼치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기를 좋아한다. 대표적인 것이 옹정제(雍正帝)의 조서이다. 불교도교를 배척하라는 상소에 대해 옹정제(雍正帝)는 이렇게 통유한다.

 

 

부처와 노자의 가르침은 인간 본원의 심성으로 돌아가고, 선악이 서로 감응하며, 이기(理氣)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유교의 인간 윤리를 근본으로 삼아 정치적 공적을 드러내려고 하니, 노자와 부처는 예악형정의 영역에 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유교의 밝은 가르침에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니, 밝고 현명한 임금들은 그 두 가르침을 소원하게 대한 적도 있었다. (중략)

佛老之敎 心性本源 善惡感應 理氣根窟 自昔理天下者 本之倫常 效之事功 則二氏之敎 無與乎禮樂刑政之區 恐其有妨於明敎 則哲王賢辟 踈而遠之則有之 (中略)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들 불교와 노자를 욕하면서 자신들은 이치에 맞는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이런 습속이 도대체 어떤 경전에서 처음 나왔는지 모르겠다. 대저 성리학이란 학문은 몸소 행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법이거늘, 만약 부질없이 그들을 비방한다면 곧 성리학도 역시 야비하고 천한 학문일 것이다. 국가가 성리학을 존중하고 승상하는 뜻이 본래 이와 같은 데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요망한 말로 대중들을 현혹하고,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하는 것이 모두 중들의 무리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궁행실천이 없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기강을 범하고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 어찌 그들 본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어서이겠는가? 동란섭필(銅蘭涉筆)

理學之人 先罵二氏 自以爲理學者 此習不知刱自何典 夫理學 貴於躬行實踐 若虛詆二氏 卽爲理學則卑淺矣 國家尊尙理學之意 本不如此 若云夭言惑衆 作姦犯科 皆出於僧徒 此等果於本敎 亦無躳行實踐 其干紀冒法 豈誠本敎之罪哉

 

 

옹정제(雍正帝)는 건륭제의 아버지면서 강희제를 잇는 황제로 평생 성실과 검약을 실천한 성군이다. 그의 이 조서만큼 주자주의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도 드물다. 석가와 노자를 비판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이단을 배척함으로써만이 존립할 수 있는 이념이란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도그마다. 도그마란 원초적으로 배제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구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긍정적 생성을 통해 가치를 계속 증식해나갈 수 있다면 굳이 이단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이단이라는 개념 자체도 불필요할 것이다.

 

연암의 사유도 이 어름에 머무르고 있다.

 

 

세간의 불경이라는 책은 모두가 남화경(南華經)(장자)의 주석서에 불과하고, 남화경은 곧 노자 도덕경의 설명서에 불과하다. 그들 이단을 창시한 사람들은 모두 천품의 자질이 아주 뛰어나고 생각이나 도량이 탁월하였을 터인데, 어째서 인의예지가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법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들은 불행하게도 말세에 태어나서,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꾸미는 세상의 현실에 대해 눈살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분강개해서 도리어 문자가 없던 상고 시대의 정치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성인을 없애고 지혜를 버리며, 도량형 제도를 파괴해야 한다고 한 그들의 말은 모두 세태와 풍속을 분개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중략)

世間所有佛書 都是南華經箋註 南華經乃道德經之傳疏彼皆天資超絶 情量卓異 豈不知仁義禮樂俱爲治天下之大經哉 不幸生値衰季 蒿目傷心於質滅文勝 則慨然反有慕于結繩之治 其如絶聖棄智剖斗折衡之類 皆憤世嫉俗之言也

 

그런 책들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천하의 치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나라 한창려(韓昌黎, 한유)는 이단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대항하여 배척했던 맹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하고는, 이에 노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자기의 독자적 노선으로 삼았다. 맹자의 본령은 단지 양주와 북적을 배척하는 것만으로 곧바로 아성(亞聖)이 된 것은 아닐 터인데도 한유는 단지 노자와 불교의 서적을 불살라버리는 것만으로 맹자의 뒤를 이으려고 하였다. 그들의 책을 불사르는 것만으로 과연 이단을 배척하는 본령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구외이문(口外異聞)

其書雖存 竟亦無關於天下之治亂 韓昌黎依俙見孟子之距楊墨 乃以闢老佛爲家計 孟子本領非直距楊墨 爲亞聖 乃韓昌黎直欲火其書 以繼鄒聖 未知果有火其書本領否也

 

 

한유가 불교를 배척하는 데 앞장을 선 데 대한 논평이다. 마치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도교와 불교에 대한 입장을 툭, 던지고 있다. 이렇듯 그는 언제나 지배적인 이념들의 내부에서 그 심층 깊숙이 외부를 각인한다. 주자학의 대척점에 있었던 불교도교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력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무엇보다 티베트 불교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두터운 금기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에도 그는 판첸라마의 이목구비에서부터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교리, 신이한 이적 등을 여러 편에 걸쳐 면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에 서서 이단들과의 강도 높은 접속을 시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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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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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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