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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천하의 형세 분석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천하의 형세 분석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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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형세 분석

 

 

물론 그렇다고 연암의 의도가 청문명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념적 명분이 아니라 지상에서 펼쳐지는 힘의 배치다. 연암의 정치적 촉수는 이 배치의 미세한 결을 더듬는다. 가령 조선의 선비들은 변발을 비웃는다. 변발은 청이 한족에게 강요한 야만적 습속 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그럼 어째서 조선에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정말 의아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무력으로서는 조선을 무릎 꿇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터인데.

 

연암이 보기에 청나라 쪽의 입장은 이렇다.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뒤엎을 터이니, 예의로써 얽어매어 두느니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만일 도리어 우리 풍속을 배운다면 말타고 활쏘기가 편할 터인데, 이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며 드디어 중지시켰다. 말하자면, 조선의 예를 존중해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문약(文弱)함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었다.

 

이런 권력의 구도를 읽지 못한 채 변발한 중국을 손가락질하는 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한족의 경우에도 이런 넌센스는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족이 그 좋은 예. 청이 지배하면서 여성의 전족을 금지하는 규칙을 여러 번 시행했다. 그런데 한족들이 그것을 종족적 정체성으로 간주하고서 끝까지 고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족이 남성들의 경우는 변발을 하되 여성들은 전족을 고수하게 했으니, 여기에는 성차별과 한족 중심주의가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암은 길거리에서 전족을 한 채 뒤뚱거리는 한녀(漢女)들을 목격할 때마다, 그 우스꽝스러움에 혀를 찬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적 명분, 문화적 습속의 표면만 읽어내고 흥분하거나 좌절하는 건 한마디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식으로 연암은 청과 조선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를 짚어낸다. 때론 거시적으로, 때론 미시적으로, 다음이 그 종합적 완결판에 해당된다. 열하를 보고서 연암은 천하의 형세를 다섯 가지로 변증한다.

 

첫째, “열하는 장성 밖 황벽한 땅이다. 천자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변방의 구석까지 와서 거처하는 것일까.” 명분은 피서라 하지만 실상은 천자가 몸소 나가서 변방을 방비하는 꼴이니, 이로써 몽고의 강성함을 가히 알 수 있다.

 

둘째, “황제는 서번의 승왕(僧王)을 맞아다가 스승으로 삼아 황금으로 전각을 지어 그를 살게 하고 있으니, 천자는 또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떳떳지 못한 예절을 쓰는 것일까.” 명목은 스승으로 대접하지만 그 실상인즉 전각 속에 가두어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할 것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니, 이로써 서번이 몽고보다도 더 강성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보더라도 황제의 마음이 늘 괴롭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셋째, “사람들의 문자를 보면 비록 그것이 심상한 두어 줄 편지라 하더라도 반드시 역대 황제들의 공덕을 늘어놓고, 당세의 은택에 감격한다고 읊조리는 것은 모두 한인들의 글이다.” 이런 과잉충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대개 스스로 중국의 유민(遺民)으로서 항상 걱정을 품고 스스로 혐의하고 경계하느라 입만 열면 칭송을 하고 붓만 들면 아첨을 해댄다. 한인들의 마음도 괴롭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과 필담을 할 때는 비록 평범한 수작을 한 것이라도 말을 마친 뒤에는 곧 불살라버리고 쪽지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한인만이 그런 게 아니라 만인들은 더욱 심하다.” 그럼 대체 만주족 선비들은 왜 그러는가? “만인들은 그 직위가 모두 황제와 지극히 가까운 데 있는 까닭에 법령의 엄하고 가혹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단 한인들의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천하를 법으로 금하고 있는 자의 마음도 괴로운 것이다.

 

이게 연암이 파악하는 천하의 형세다. 황제와 몽고, 서번, 그리고 한족과 만주족,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집약되는 한편, 그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국의 배치가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가, 편협한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심층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 그의 북학이념이 단지 근대적 민족주의로 포섭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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