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 그 열광의 도가니
“노새의 족보는?”
“엄마는 말, 아빠는 당나귀.”
“맞았어. 말의 힘과 당나귀의 지구력을 겸비한 셈이지. 그럼, 엄마가 당나귀, 아빠가 말인 건?”
“그런 놈도 있나? 글쎄다~.”
“버새!”
“그럼 힘도 없고 지구력도 딸리겠네? 그걸 워디에 써?”
“아니지, 그러니까 되려 상팔자지. 우리도 그렇잖아. 푸하하.”
L과 N, 그리고 그의 연인 Z의 ‘개콘’식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고북구를 나와 열하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노새와 당나귀들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 어드벤처를 겪었건만, 지금 그 강들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연암이 경탄해 마지않았던,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던 말들은 그 화려한 속도를 거세당한 채 노새로 전락해 있었다. 근대문명이 제공하는 편의는 이렇듯 산문적 무료함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장엄하게 뻗은 산들의 행렬이 끝나자 문득, 넓고 툭 트인 평원이 펼쳐진다. 아, 마침내 열하에 도착한 것이다. 열하(熱河), 장성 밖 요해의 땅, 베이징에서 동북방 700리, 지금의 명칭은 승덕(承德)이다. 연암 일행이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이 낯선 곳에 이르렀던 연유는 무엇인가? 건륭제가 만수절(70세 생일) 행사를 위해 이곳에 행차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 네번째 황제다. 할아버지가 ‘왕중왕’으로 꼽히는 강희제고, 아버지 옹정제(雍正帝) 역시 저 머나먼 변방 관리들까지 손금 읽듯 체크했다는 성군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 이 트리오의 치세는 청왕조의 절정기이자 중국이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웅비(雄飛)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면, 건륭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동북부 변방까지 행차를 했던가? 표면적인 이유는 피서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잡은 무열하(武列河)와 사방에 절묘하게 솟아 있는 산들의 형세는 피서지로서 과연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연암은 말한다. 피서란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상은 북쪽 오랑캐들, 특히 몽고의 준동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고. 거대한 스펙터클을 과시함으로써 이민족들의 사기를 꺾을 심산이었던 것.
과연 그러했다. 황제가 여름 한철을 보내기 위해 세운 피서산장(避暑山莊)은 베이징의 이화원보다도 더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배를 타고 도는 데만도 한 시간 이상 걸린다는 호수 곳곳에 전각들이 빼어나다. 재미있는 건, 호수 한쪽 귀퉁이에 진짜(?) 열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밑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올라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데, 세계에서 가장 짧은 강이란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지니 수레ㆍ말ㆍ낙타 등이 밤낮으로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연암에게 있어 열하는 이렇듯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몽고, 위구르, 이슬람, 서양 등 청을 둘러싼 낯설고 이질적인 문명들이 용광로처럼 뒤섞이는 열광의 도가니! 이 우발적인 역동성으로 가득찬 ‘매트릭스’ 안을 연암은 종횡무진 질주한다. 때론 ‘심연을 항해하고 돌아온 고래의 충혈된 눈’으로, 때론 ‘찰리 채플린의 경쾌한 스텝’으로, ‘무용지물’이어서 자유로운 ‘버새’같은 처지였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 와중에 조선조 역사상 가장 특이한 사건, 티베트 불교와의 마주침이 일어난다. 연암,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대체 무슨 일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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