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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6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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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믿음은 드물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6-1.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으나 많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須菩堤白佛言: “世尊! 頗有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백불언: “세존! 파유중생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불?”

 

 

정신(正信)’바른 믿음이다. 문중(文中)실신(實信)’과 상통한다.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는 ()’이란 글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믿음(faith)’이라는 용례에로 쓰인 적이 없다. 그것은 실증한다라는 ‘verification’의 의미에 가까운 내포를 지녔을 뿐이다. 이미 라집(羅什)의 시대에는 신()이라는 글자가 종교적 믿음의 함의를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중국의 언어가 서구화되는 일면을 나타낸다. ‘희유(希有)’드물게 있다라는 뜻이다.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언제고 바른 믿음은 희유(希有)한 것이다. 우리의 시대를 살펴보면 잘 이해가 갈 것이다.

 

이 분()은 전체적으로 말세론적 색채를 깔고 있다. 불법(佛法)이 날이 갈수록, 즉 인간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쇠퇴하리라는 것은 초기불교승가의 믿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불교의 말세론은 거대한 순환 속에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단절과는 근원적으로 문제의식이 다르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모든 순간이 종말론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이러한 말세론적 시대에 처하여 말세적 감각을 이용하여 인간을 현혹시키고 천당(天堂)에 가는 티켓구입료를 높이려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말세적 분위기에 근원적 희망을 주려는 사상이다.

 

오늘의 시대를 우리는 위기의 시대(the Age of Crisis)’라고 말한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대한 각성이 없을 수 없다. 지식만이 증대하고 지혜가 멸시되며, 감각만 이 팽대(膨大)하고 깊은 사유가 차단되며, 육욕에 노예가 되어 젊은이들은 방황하고 늙은이조차 가치관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역사의 진행은 정당한 역사가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하는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서 우리 삶의 질을 근원적으로 저하시키고 생명의 장()들을 모두 파괴해나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종말의 기로에 서있는 것일까?

 

여기 이 절에서 수보리는 인류가 과연 이러한 말세론적 분위기 속에서 금강경의 지혜와 같은 심오한 사유를 삶의 가치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6-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 하지말라. 여래가 멸한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며 복을 닦는 사람이 있어, 이 글귀에 잘 믿는 마음을 낼 것이며, 이를 진실한 것으로 삼으리라.”

佛告須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 章句能生信心, 以此爲實.”

 

 

수보리의 비관론에 대하여 불타의 낙관론이 설파되고 있다. 여기의 핵심되는 구절은 후오백세(後五百歲)’인데, 사실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범문(梵文) 원본에도 한역본에도 완벽하게 명료하지는 않다. 범문에는 ()의 오백년대(五百年代)라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삼시(三時)사상 중에서 가운데 시대인 상법(像法)’ 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시(三時)란 불타의 멸적 후의 시대를 정법(正法)ㆍ상법(像法)ㆍ말법(末法)의 삼기(三期)로 나누는 시대구분을 말하는데, 이 정()ㆍ상()ㆍ말()의 시대의 길이를 잡는 방식은 문헌에 따라 다양하다. 그런데 보통 500년씩 잡아 1,500년으로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하지만, 이런 계산이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는 제멋대로 늘리기 마련이다.

 

정법(正法)이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500년간, 가장 불타의 가르침이 잘 실천된 시기로서 교(, 가르침)와 행(, 수행)과 증(, 깨달음), 삼자(三者)가 구비된 시기다.

다음의 상법(像法)이란 제2500년간으로서, ()와 행()만 있고 증()이 없는 시기다. ‘()’이란 비슷한데 진짜가 아닌의 뜻이다.

그 이후가 말법(末法)500년으로서, ()만 있고 행()과 증()이 다 결여된 법멸(法滅)의 시기다.

 

그런데 이러한 삼법(三法)의 명료한 규정은 당나라때 규기(窺基, 632~682)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6(第六)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여기 이 문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대강 불멸후(佛滅後) 500년이 되기 때문에 곧 정법(正法)이 멸하고 상법(像法)이 시작되는 혼란의 시기를 지칭한 것이라 하지만, ‘후오백년(後五百年)’을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나는 의문이다.

 

나는 후오백년(後五百年)’이란 말이 어떤 정확한 삼시(三時)의 시점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불법(佛法)이 쇠퇴한 먼 훗날의 시대로 생각함이 옳을 듯하다. 대승운동이 흥()한 시기를 상법(像法)의 시대로 꼭 끼워맞출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흥기를 불타 열반(涅槃, nirvāṇa) 500년 정도로 보는 관점은 역사적 정황에 대체로 들어맞는다.

 

불타는 수보리에게 이른다: “그렇게 비관적인 소리 하지 말아라! 아무리 말세가 와도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자는 반드시 있을 것이며, 금강경의 설법에 독실한 믿음을 내고,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 말세가 될수록 진실한 사람은 더 많게 마련이다. 비관하지 말자!

 

 

 

 

6-3.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서너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자리에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는 즉시 오직 일념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라는 것을,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聞是章句乃至一念生淨信者.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종제선근, 문시장구내지일념생정신자.

 

 

산스크리트 원본과 비교해 보면 라집역은 매우 간결하게 축약되어 있다. 여기 부처깨달음을 상징하며 역사적인 싯달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표현은 이미 오랜 윤회(saṃsāra)의 시간 속에서 훌륭한 행동(good conduct)과 덕성(virtuous qualities)과 지혜(wisdom)로 선업을 쌓아온 그런 보살들을 형용하는 말이다.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많은 깨달은 자들 밑에서 공을 쌓았다는 뜻도 되고, ‘많은 깨달은 자들을 존경하면서 살았다는 뜻도 된다.

 

여기 내지(乃至)’를 모두 관용구적인 내지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일괄적으로 해석하면 뜻이 안 통한다. 여기서는, ()와 지()를 떼어서 해석해야 한다. ‘하는데 이르다라는 뜻이다. 나카무라(中村), 이기영은 그 정확한 뜻을 취하지 못했다.

 

 

 

 

6-4.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뭇 중생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須菩堤!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득여시무량복덕.

 

 

여래는 각자(覺者)이다. 각자는 전체를 보는 사람이다. 여기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 함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막연한 전지전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는 근본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비극적 상황에도 훌륭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동학에서 만사지(萬事知)’라 한 것과도 상통한다.

 

 

 

 

6-5.

어째서 그러한가? 이 뭇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이 없을 것이며, 법의 상이 없을 뿐 아니라, 법의 상이 없다는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无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복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역무비법상.

 

 

이 글귀의 핵심은 무법상역무비법상(無法相亦無非法相)’에 있다. 박테리아를 쳐부시는데 항생제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항생제를 좋아해서 항생제를 계속 먹으면 그것이 더 큰 병을 불러 일으킨다. () 사상은 존재(存在)를 실체의 존속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유병(有病)을 치료하는 데는 더 없는 좋은 약이다. 그러나 공 그 자체에 집착하면 더 큰 병이 생겨난다. 악취공(惡取空, dur-gṛhītā śūnyatā: 공의 이치에 대한 오해에서 일어나는 집착)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불교도들이나 스님들 중에 해탈(mokṣa)한 체거드름 피우는 자들이 많다. 이 모두 공병(空病)에 걸린 자들이다. 그런데 공병은 치료가 더 어렵다. 상식의 파괴가 아닌, 상식의 파괴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법상(無法相)은 실체의 부정이다. 무비법상(無非法相)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무아(無我)’, 그것이 실체화되어 또 하나의 아()를 형성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서양에는 비교적 이러한 사상이 빈곤하다. 기독교가 천박한 전도주의에 머물고 있는 역사적 현실도 이런 깊은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6.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무릇 중생들이 만약 그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해도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則著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약심취상(若心取相)’그 마음에 존재의 상을 갖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곧 마음의 상을 바로 밖에 있는 대상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후대 유식(唯識)에서 많이 다루게 되는 문제에 속한다.

 

약취법상(若取法相)’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가 마치 약법취상(若法取相)’인 것처럼, ‘약심취상(若心取相)’과 대비하여 번역했는데(이기영도 나카무라를 따름), ‘약취법상(若取法相)’()에 상()을 취()한다가 아니고 ()의 상()을 취()한다이다. 이것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아공법유론(我空法有論)’과 같은 것이다. 즉 법()의 실체성(개관적 존재성)을 직접 인정하는 것이다. 첫째번 문장은 마음의 법에 관한 것이요, 두째번 문장은 대상의 법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 모두가 결국 아ㆍ인ㆍ중생ㆍ수자상의 오류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앞의 주절에서는 즉위착(則爲著) 이라 했고, 뒤의 주절에서는 즉착(則著) 이라 했다. 양자에 미묘한 뉴앙스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의 무비 스님 강의본 텍스트가 어그러져 있다. 그것은 현암신서(玄岩新書, 1980) 김운학(金雲學) 역주본(譯註本)에 실린 현토본을 참고한데서 생긴 오류인 것 같은데 현암신서(玄岩新書)에 실린 현토본 판본은 열악한 판본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세조본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다. 그 판본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하이고(何以故)? 시제중생(是諸衆生), 약심취상(若心取相),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何以故)? 약취법상(若取法相),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시고(是故), 불응취법(不應取法),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6-7.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아니라고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법이 아님도 취하지 말 것이다.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불응취법, 불응취비법.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이 표방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언어체계는 실재(實在)의 정확한 그림이 될 수가 없다. 실재세계(實在世界)를 긍정적으로 표현해도 부정적으로 표현해도 다 부족한 데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리의 구사는 논리 그 자체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논리의 법칙은 실재세계의 모습과는 무관한 또 다른 께임일 뿐이다. 이 양자의 정합성에서 세계를 규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궁극적으로 헛된 것이다. 모든 언어철학의 궁극은 허무다. 트락타투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든가?: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지어다).”

 

 

 

 

6-8.

이러한 뜻의 까닭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였다: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님에 있어서랴!’”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여기 비교적 길었던 제6(第六分)의 총결론이 제출되고 있다. 앞서 이 책의 모두에서 내가 말했듯이 종교는 교설(敎說)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 그 자체가 종교가 아니요, 그 설법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귀한 휴지라도 밑을 담으면 버려야지, 그것이 귀하다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면 쿠린내만 계속 날 것이다. 기독교 목사님들의 설교가 이런 쿠린내 나는 휴지쪽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뗏목()의 비유는 참으로 기발한 것이다. 강이 많은 지역에서 생활한 인도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지혜의 비유인 것이다.

 

이승
속세
윤회(saṃsāra)
→ ⊡ →
뗏목
저승
열반(nirvāṇa)
해탈(mokṣa)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다 할 때에 우리는 뗏목과 같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자! 어렵게 뗏목을 구했고, 뗏목은 아주 훌륭한 나무로 곱게 다듬어져서 잘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뗏목을 얼마나 어렵게 구했던가? 그래서 뗏목이 저쪽 언덕에 도착을 했는데도, 뗏목이 좋고 뗏목이 아름답고 뗏목이 귀하여 그냥 뗏목 속에 주저앉아 있다면 도대체 어느 날에 피안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무리 어렵게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진정한 신앙인은 예수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 하더래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요, 그래야만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方便)’의 사상은 결코 간단한 사상이 아니다. 인류최고의 지혜를 결집한 두 마디인 것이다: 황 삐엔!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이 파미르고원이라는 지형상의 조건 때문에 격절되고 차단되어 완벽하게 교섭이 없던 시절, 붓다가 살아있던 그 시절 그 즈음에, 중국에는 노자(老子)장자(莊子)니 하는 성인이 살고 있었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다. 荃者所以在魚
전자소이재어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야 한다. 得魚而忘荃
득어이망전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蹄者所以在免
제자소이재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를 버려야 한다. 得免而忘蹄
득토이망제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言者所以在意
언자소이재의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 得意而忘言
득의이망언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
나는 언제 그런 사람과
吾安得夫忘言之人
오안득부망언지인
더불어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而與之言哉
이여지언재

 

 

장자(莊子)의 제일 마지막 말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말을 버릴 줄 아는 사람과 더불어 말을 한다.” 여기에 바로 방편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장자가 죽은 약 45세기 후에 장자를 만나러 중국에 왔다. 이 두 위대한 영혼은 그리운 만남의 회포를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전기(轉機)의 출발이었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출발이요, 이것이 격의불교의 시작이요,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대규모의 문명교류의 시발이었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 두 거인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중국인의 프라이드요, 한 사람은 인도인의 프라이드다. 주앙쯔(莊子)는 승가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는 결코 싯달타에 뒤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중국인의 불교이해는 모두 이 노장(老莊)사상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불교가 그 궁극에 있어 ()’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은 불교이해의 노장적(老莊的) 격의(格義)를 노출시킨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라오쯔ㆍ주앙쯔가 있다. 인도인의 지혜의 프라이드로서는 싯달타가 있다. 우리 조선문명도 끊임없이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하여 왔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지구상의 모든 근대성(Modernity)을 표방한 사상체계를 앞질러 간 동학사상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동학혁명으로 구체화되었다. 31독립만세의거, 제주43민중항쟁, 여순민중항쟁, 419혁명, 518민중항쟁, 876월 항쟁,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역사의 저류에는 우리 생각, 우리 사상, 우리 느낌이 배어있다. 이제 우리 고조선의 후예들은 주앙쯔, 싯달타, 예수를 뛰어넘고, 룻소, 칸트, 헤겔을 뛰어넘는 우리들 자신의 논리와 이념을 형성해야 한다. 시호(時乎, 때로다)! 시호(時乎)!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개벽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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