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금강경 강해 - 제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4분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5
728x90
반응형

.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4-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復次須菩堤!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복차수보리! 보살어법응무소주, 행어포시.

 

 

묘행(妙行)’이란 아름다운 행동이라 번역했지만, 실제로 여기서의 ()’보시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의 ()’라는 글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할 때의 묘와 항상 의미적으로 상통해 있는 글자며, 그것은 통속적 인식을 벗어난, 즉 지혜의 인식을 거친 후에 획득되는 상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무주(無住)’라는 말은 부주열반(不住涅槃)’ 혹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는 대승의 개념에서 도출되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 nirvāṇa)이고, 번뇌가 곧 보리(菩提)라고 한다면, 대승보살에게 있어서의 열반은 생사윤회 속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 윤회 속에서 사는 방식이 반드시 무주(無住)’ 즉 일정한 데 머물거나 안주하거나 집착하거나 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4분의 주제는 보시(布施)바라밀이다. ()와 타가 존재하는 보시가 아니라, ()와 타()가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보시인 것이다. 자선을 표방하는 자()들에게 크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복차(復次)’또 다음으로의 뜻인데, 문맥을 살려 이제로 바꾸었다. 불문(佛門)에서는 부차로 읽기도 하나 고운(古韻)을 따르면 복차로 읽는 것이 옳다.

 

어법(於法)’()’은 소승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존재(存在)이다. 존재의 실체성에 집착하는 그러한 인식구조에서는,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행위는 불필요한 업()의 증대만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4-2.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堤!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소위불주색보시, 불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불주어상.

 

 

종교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구제’, ‘보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가 실제적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측면이 심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에서 끊임없이 그 조직이 유지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보시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보시는 ‘dāna’의 번역인데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보시는 크게 삼시(三施)’로 나뉜다.

그 첫째가 재시(財施)’인데, 의식(衣食)과 같은 물자를 주는 것을 말한다.

그 둘째가 법시(法施)’인데, 이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 셋째가 무외시(無畏施)’인데, 이는 두려움을 제거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재시(財施) 의식(衣食)과 같은 물자를 주는 것
법시(法施) 가르침을 베푸는 것
무외시(無畏施) 두려움을 제거시켜주는 것

 

 

그런데 우리가 대승의 인식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주는 자도 공()이요, 받는 자도 공()이요, 주고 받는 것도 공()이다. 따라서 보시의 가장 본질적 여건은 내가 보시를 행한다고 하는 나의 상()의 해소다. 한마디로 티나지 않게 보시를 해야하는 것이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6:3~4).

 

여기 색()을 먼저 말하고 그 뒤로 성()ㆍ향()ㆍ미()ㆍ촉()ㆍ법()을 말하는 것은 불교경전이 논리를 전개시키는 전형적 방법 중의 하나다. ()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은 육경(六境)이며 이것은 육근(六根)과 함께, 제법(諸法) 중에서 색법(色法)에 속하는 것이다. 색법이라함은 물체적 형태를 갖는 것을 말한다. 즉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보시는 이러한 물리적 색법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여서 행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일 끝에 나오는 불주어상(不住於相)’에서 ()’은 곧 표시를 의미하는 것이다이 부정사로서 독립적 기능이 강할 때 로 읽지 않고 로 읽는 것이 정당하다. 티를 내지 않는다.’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아주 쉽게 이해될 것이다.

 

 

 

 

4-3.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하이고? 약보살불주상포시, 기복덕불가사량.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 이미 선진시대(先秦時代)에 불교와 무관하게 성립한 중국의 지혜의 서()노자(老子)7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故能成其私
고능성기사

 

 

여기서 말하는 무사(無私)’는 곧 불교의 무아(無我)’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하게 무사(無私)하면 곧 그 사()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역설이 여기 숨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사(成私)하기 위해서 무사(無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사(成私)는 무사(無私)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신선(身先)’이란 후기신(後其身)’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그 몸이 앞서는 것이다. ‘신선(身先)’이라 했지, ‘선신(先身)’이라 하지 않았다. ‘선신(先身)’의 선()은 신()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이다. ‘신선(身先)’은 신()이라는 주어에 붙는 자동사일 뿐이다. ‘불주상보시(不住相布施)’에도 복덕(福德)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하게 우리가 불주상(不住相)’할 때에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즉 여기서 보살운동무아(無我)의 도덕성을 윤회(saṃsāra)와 결부시켜 논의하는데, 그 인과는 우리가 말하는 세속적 인과관계는 아닌 것이다. 왕필(王弼)은 그의 명저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선다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는 것일 뿐이지, 그 몸을 앞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함도, 결과적으로 몸이 보존되는 것일 뿐이지, 그 몸을 보존하려 해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後其身而身先, 身先非先身之所能也; 外其身而身存, 身存非存身之所爲也.

후기신이신선, 신선비선신지소능야; 외기신이신존, 신존비존신지소위야.

 

 

 

 

4-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동쪽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가사량불?” “불야, 세존!”

 

 

어의운하(於意云何)’는 계속 나오는 관용구다. ‘뜻에 있어서 어떠한가?’인데, 세조본의 아름다운 우리말에 따라 네 뜻에 어떠하뇨?’로 일관되게 번역하겠다.

 

우리가 동쪽하늘의 양이나 크기를 개념적으로 수량화해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보시가 결과적으로 가져오는 무량(無量)한 복덕(福德)이 이와 같이 엄청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도덕을 실천한다 하는 것은 외면적으로 도덕을 초월하는 것(trans-ethical)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도덕성의 도덕은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도덕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살사상에 대한 깊은 도덕적 권면이 숨어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4-5.

수보리야! 남ㆍ서ㆍ북방과 사유ㆍ상ㆍ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가사량불?” “불야. 세존!”

 

 

우리가 보통 시방(十方)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 온갖 방위를 가리키는 인도인의 개념화방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 동방인들은 주로 4방ㆍ8방은 잘 말해도 시방을 말하지는 않았다. ‘시방에는 상()과 하()2방이 더 들어가는데 이것은 인도인들의 공간감각이 중국인들보다 훨씬 입체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방(四方)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네 방위다. 사유(四維)라는 것은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들어 가는, 동북ㆍ동남ㆍ서남ㆍ서북을 말한다. 여기에 상()과 하()가 들어가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염불이라는 챈팅(chanting)의 습관 때문에 받침(stop)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숨이 받침으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방시방으로 발음되는 것이다.

 

이 시방 중에서 동방 하나만을 먼저 꺼집어 내어 이야기하고 나머지를 싸잡아서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방식은 인도인이 논리를 구사하는 특이한 패턴이다. 반야심경도 잘 살펴보면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압축되어있는 것이다.

 

 

 

 

4-6.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堤! 菩薩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不可思量.

수보리! 보살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불가사량.

 

 

반야심경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를 연상하면 같은 패턴의 문장구성방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7.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가르친 바 대로 머물지니라.”

須菩堤! 菩薩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오직으로 한 것은 세조본의 우리말을 따랐다. 여기서 가르친 바 대로라는 것은 본분(本分)에서 말한 내용을 가리킨다. 보살은 부처님의 이와 같은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노자(老子)2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란 말이 있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이루어진 공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老子)불거(弗居)’는 여기서 말하는 불주어상(不住於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중국인들은 오히려 불교의 불주(不住)’의 논리를 노자적(老子的)인 불거(弗居)로서 이해했음에 틀림이 없다. 중국인들에게서는 노자(老子)가 분명 선행되었던 지혜의 경전이다. 이 선행하는 의미의 틀에 따라 외래적(外來的) 사상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사실 중국의 불교는 한역(漢譯)이 되면 곧 격의(格義)’ 불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격의를 너무 협애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격의불교라는 의미를 너무 비하해서 바라볼 필요도 없다. 격의이건 비격의이건 그것은 모두 인류의 지혜의 소산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장(老莊)의 지혜와 대승불학(大乘佛學)의 지혜는 그 맛은 다르지만 우리 삶에서 의미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말한다. 나는 이 아가페적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말하는 불주상보시(不住相布施)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라져야 한다. 나의 아가페적 사랑은 가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테레사수녀가 그러하고, 문둥이를 껴안고 그 문둥이의 모습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성 프란시스가 그러하다. 우리 이제 참으로 모든 사상과 종교의 벽을 허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인용

목차

금강경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