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법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8-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만약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많다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녕위다불?”
이 장에서 우리의 ‘악취공(惡取空)’의 가능성을 경계한다. 법(法)을 버리고 비법(非法)을 떠난다 해서 그럼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 무위(無爲)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적 도덕적 행위는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행하는 자세가 보살승에 올라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리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인도인의 과장벽이 심한 우주관의 한 전형이다. 중국인들은 매우 소박한 천지(天地), 즉 음양의 하늘과 땅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인의 우주관은 오늘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갤럭시이론들과 비슷하다. 그 과장된 표현이 심하지만,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실상에 보다 가까운 표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수미산(須彌山)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그것을 동심원으로 둘러싸는 일곱 개의 산맥이 있다. 그리고 제일 외연에는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쳐 있다. 이 구산(九山)의 사이사이에 팔해(八海)가 있다. 또 그 제일 바깥쪽 바다에는 사대주(四大洲)가 떠있다. 요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수미세계(須彌世界)이며, 위로는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대지하(大地下)의 풍륜(風輪)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하나의 수미세계를 1,000개 모은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라고 한다. 이 소천세계(小千世界)를 또 1,000개 모은 세계가 중천세계(中千世界)이며, 이 중천세계(中千世界)를 또 1,000개 모은 세계가 대천세계(大千世界)이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소(小)ㆍ중(中)ㆍ대(大) 3종의 천세계(千世界)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세 개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는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수미 세계의 1,000의 3승, 즉 10억 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한 부처님의 교화의 범위가 된다.
‘칠보(七寶)’도 경전마다 이동(異同)이 심하고 순서도 다르지만, 대체로 귀금속이나 보석, 즉 가장 값이 비싼 것들 7종(種)을 가리키는 것이다.
보통 1) 금(金, suvarṇa), 2) 은(銀, rūpya), 3) 유리(瑠璃, vaiḍūrya), 4) 파려(頗黎, sphaṭika), 5) 차거(硨磲, musāragalva, 인도에서 나는 조개), 6) 산호(珊瑚, lohitamuktikā), 7) 마노(瑪瑙, aśmagarbha)를 가리킨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찰 수 있는 칠보만큼의 많은 물질적 재산으로 어떤 사람이 보시를 한다면 과연 이 사람의 복덕은 많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돈 많은 청년에게 한 말을 상기해볼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 19:23~24).
또 예수의 산상수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 6:19~21).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했을 때의 하늘은 저 푸른 구름 위가 아니다. 그 구름 위에는 싸늘하고 희박한 공기가 있을 뿐이다. 그 하늘은 바로 ‘대승(大乘)의 마음’인 것이다. 예수가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한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함이다. 보물을 오직 세속적인 향락을 위하여 쌓아둔다면 내 마음은 오직 그 세속적 향락과 함께 있을 뿐이다. 여기 ‘하늘’이라 함은 보이지 않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이다. 칠보(七寶)공덕의 궁극적 효용은 보이는 물질세계의 풍요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다웁게 깨닫고 사느냐 하는 형상을 넘어선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 형상을 넘어선 마음의 세계를 예수는 ‘하늘’이라 한 것이다(Heaven = Mind).
그런데 일단 칠보공덕의 세속적 효용을 붓다와 수보리는 긍정하는 자세로 대화를 진행한다.
8-2.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오이다. 그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오니이다.”
須菩堤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 福德多.”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다.”
보화를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곧 대승적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대승적 마음가짐이란, 곧 복덕에 복덕이라는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복덕을 복덕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복덕은 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함이 없음을 행하면 되지 않음이 없다”(위무위爲無爲, 즉무불치則無不治. 제3장).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이 『대정(大正)』 판본에는 ‘즉비복복성(卽非復福性)’으로 되어 있다. 『대정(大正)』본에 특별한 교주(校註)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단순한 식자상의 오류로 간주된다. 나카무라는 『대정(大正)』본의 오류를 그대로 따랐고 이기영본(本) 역시 동일하다. 우리가 이런 경우 어떤 근거 위에서 『대정(大正)』의 판본을 오류라 할 수 있는가? 『대정(大正)』도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훌륭한 판본이지만, 『대정(大正)』과 『고려』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대정(大正)』은 활자배인본(活字排印本)이요, 『고려』는 목판본(木版本)이라는 것이다. 양자간(兩者間)에 특별한 의미상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때는, 목판본(木版本)이 활자본(活字本)에 항상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활자본(活字本)은 식자공에 의하여 너무도 쉽게 오식(誤植)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상으로도 ‘시복덕(是福德),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 시고여래설복덕다(是故如來說福德多).’의 문장에 있어서 ‘복덕(福德)’이 ‘복복(復福)’으로 바뀌어야 할 하등의 필연성이 없다. 우리 『고려대장경』의 판본의 우수성이 처처(處處)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위대하도다! 고려Corea라는 대제국 문화인들의 섬세한 손길이여!
세조본도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으로 되어 있다.
8-3.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곧 이 경 중에서 사구게라도 하나 타인을 위하여 설파하는데 이른다면, 이 사람의 복이 칠보공덕의 사람의 복을 뛰어 넘으리라.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 其福勝彼.
“약복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위타인설, 기복승피.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문 중에 경(經)이라 하니 이는 불타의 한나절 설법인데 어찌 경(經)이라 할손가? 이미 『금강경』이라는 책이 설법자의 손에 쥐어져 있기라도 하단 말가? 재미있는 지적이기는 하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질문이다. 인도문화는 본시 오디오문화다. 입에서 귀로 전달되는 것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화다. 그런데 이 질문은 비디오를 중시하는 중국문화전통의 사람에게서 나온 질문일 뿐이다. 중국의 한자문화는 비디오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책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경(經)이라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의 불타의 설법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헌이 아니라 노래다.
2절까지 수보리의 칠보공덕자에 대한 현실적 긍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전제로서 복덕이 복덕성으로 인식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했다. 붓다는 한발자욱 더 나가 최종적 설법을 한다. 붓다의 언설(경經)은 하나의 비약이다. 대승(大乘)은 소승(小乘)의 연속적 발전이 아닌 하나의 비약이다.
여기 어떤 위대한 사업가가 있어 큰 사업을 벌이고 그 사업을 통해 한강의 모래알만큼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린다고 하자! 돈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벌 뿐이요, 그 돈이 돌고 도는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돈이 돈으로서 가치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돈의 돈됨을 부정하는, 그 돈의 돈됨을 초월하는 곳에 그 돈의 가치가 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부호의 물질적 사업의 방대함과 어느 한 촌부가 깨달음의 한마디라도 타인에게 전달한 것을 비교할 때, 과연 그 부호가 위대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영원히 남을 지혜의 깨달음 한마디라도 전달하는 그 촌부의 행위를 위대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IMF로 거대한 사업이 도산하고 거대재벌이 물거품처럼 해체되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반짝이는 금강석과도 같은 지혜의 말씀은 도산하거나 해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사구게’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행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 말씀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어느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사구게’라는 말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 『금강경』의 4개의 사행시만을 낭송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송인(宋人)의 우보다 더 우매한 것이다. 많은 불교의 설법자들이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고 설(說)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嗚呼)!
8-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바로 이 『금강경』이 설(說)하고 있는 대승의 지혜야말로 일체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깨달음의 원천인 것이다. 이 『금강경』의 설법을 떠나서 우리는 반야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 붓다의 최후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최후의 심판,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다음을 보라!
8-5.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닌 것이다.”
須菩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일언(一言)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의 불(佛)은 곧 ‘깨달음’이다. 불법(佛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一言)은 바로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대승예수의 최후의 일언은 이런 것이었다: “나 예수의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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