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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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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승의 바른 종지

대승정중분(大乘正宗分)

 

 

3-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佛告須菩堤: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소명태자의 분의 이름은 적합치 못하다. 왜냐하면 금강경의 본경에 해당되는 부분(132절까지)에서 이 대승(大乘)’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최초의 혁명적 보살운동이 아직 대승이라는 규합개념(organizing concept)으로 소승과 대비되기 이전의 소박한 진리를 이 경()은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의 대승은 오직 보살일 뿐이요, ‘선남선녀일 뿐이요, ‘더 이상 없는 수레(agrayāna)’, ‘가장 뛰어난 수레(Śreṣṭha-yāna)’보살의 수레(bodhisattva-yāna)’일 뿐이다. 단지 소명태자는 후대에 형성된 개념을 통해 그 종지를 명료히 하고자 했을 뿐이다대승(大乘)’이라는 표현은 라집본(羅什本)에서 152절에 한번 등장하지만 그것도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mahāyāna’로 되어 있지 않다.

 

정종(正宗)’이라 함은 바르고 으뜸됨이다. 바로 이 제3분이야말로 가장 바르고 으뜸되는 대승의 종지(宗旨)를 밝히는 장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훈으로 종()마루라 한다. 이것은 클라이막스라는 뜻도 된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바로 이 제3분에서 정점을 형성한다. 금강경의 모든 것이 여기서 쏟아져 나온다. 사실 제3분 이후의 문장은 제3분의 내용을 펼친 것이다.

 

일본에는 스모오(相撲)’라는 운동경기가 있다. 우리의 씨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서구적 의미에서의 운동경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식이다. 스모오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기나긴 제식이 진행된다. 엄숙하고 긴장되고, 수천수만의 관중이 밀집해서 쳐다본다. 그리고 요코즈나(よこづな, 横綱)’라는 최고의 스모오토리가 나오기까지는 낮은 급의 수많은 경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막상 요코즈나의 스모오는 아주 허망하게 끝난다. 아주 시시하게 끝난다. 스모오는 둥근 선을 쳐놓고 그 밖으로 사람을 밀쳐내기만 해도 끝나고, 그냥 엎어지기만 해도 끝난다. 보통 아주 짧은 몇십 초 안에 끝난다. 몇 라운드나 가는, 볼거리가 있는 서양의 권투경기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런데 왜 스모오는 세계적으로 그렇게 열광적인 인기가 있는 경기가 되고 있을까?

 

이 제3분을 읽는 초심자는 아마도 허망한 스모오 경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 분을 넘기게 될 것이다. 겨우 이 한마디였다니! 그러나 바로 이 분에서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심령의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그대는 아마도 금강경을 덮어야 할지도 모른다. 먼 훗날 그러한 체험이 다시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금강경읽기를 미루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본사람들은 정종(正宗)마사무네(まさむね)’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술이름이다. 우리가 정종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종은 바르고 으뜸가는 최고의 술이라는 뜻이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정종은 들이키는 순간에 곧바로 취하지는 않는다. 들이키는 순간에는 맛이 없다. 그러나 취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게 마련이다.

 

3, 이 정종분을, 정종 마시듯이 마셔라! 비록 아무런 맛이 없을지라도 서서히 그대들은 남은 생애를 통하여 이 정종분(正宗分)의 취기를 음미하게 될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고()한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번 뭇 보살, 뭇 마하살들(훌륭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라는 선포를 한다. ‘이와 같이의 내용이 이제 2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앞으로 오는 2절과 3절은 1절의 이와 같이를 부연하는 내용이다.

 

 

 

 

3-2.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 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若胎生, 若濕生若化生, 若有色若無色, 若有想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기심소유일체중생지류, 약난생약태생, 약습생약화생, 약유색약무색, 약유상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령입무여열반이멸도지.

 

 

소유(所有)’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있는 바의 뜻인데, 백화문에서는 이 자체로 일체라는 뜻이 된다. 다음에 일체(一切)’라는 것이 다시 나오므로, 나는 이것을 존재하는으로 번역하였다. ‘소유일체중생(所有一切衆生)’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뜻이다. 그런데 중생(衆生)이란 무엇인가?

 

여기 중생(衆生)’이란 ‘sattva’의 번역인데, 현장(玄奘)유정(有情)’으로 번역했던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이 ‘sattva’가 계속 문제되는 이유는 바로 보살의 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흔히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인간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윤회의 범위를 생각할 때, 중생은 인간에만 국한될 수는 없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며, 요새 말로는 생물(生物)’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물(生物) 중에서도 식물은 제외되는 것 같으며 동물(動物)만을 지칭하는 것 같다우리말의 짐승중생(衆生)’에서 전화(轉化)된 것이다.

 

유정(有情)’()’은 곧 마음의 작용이며 감정내지 의식작용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에서는 지각(sensation)’을 가리킬 수도 있다. 중생(衆生)은 원래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행능정생이정중생(幸能正生以正衆生, 다행스럽게도 그 삶을 바르게 함으로써 뭇 생명을 바르게 한다)’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보통 이를 뭇 사람으로 번역하지만, 장자(莊子)사상의 근본 취지로 볼 때는 중생(衆生)’이 꼭 인간이나 동물에만 국한된다고만 해석할 수도 없다. 하여튼 중생(衆生)’은 불성(佛性)을 지니는 것이며 성불(成佛)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정(無情=비정非情)과 구분되는 유정(有情)이다. 유정(有情)함령(含靈)’ ‘함식(含識)’이라고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고도의 의식이나 영혼을 구유하는 존재(存在)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이 중생(衆生) 사뜨바9종류로 분류하여 말한다. 그런데 이 구류중생(九類衆生)은 크게 세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첫 카테고리는 태어나는 방식(mode of conception)에 관한 분류로 처음 4종류가 들어간다.

1)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2) 태생(胎生)은 자궁의 태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3) 습생(濕生)은 물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물고기나 모기 등의 곤충류가 이에 속한다.

4) 화생(化生)은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도깨비나 신, 그리고 지옥의 존재와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카테고리는 형태의 유무에 관한 분류로서 다음의 두 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색(有色)은 형태를 가진 모든 생물이며,

2) 무색(無色)은 형태가 없는 신들이다.

 

세 번째 카테고리는 지각의 유무로 분류되는 것으로서 마지막 3종류가 들어간다.

1) 유상(有想)은 오관(五官)의 지각을 가진 존재(all organisms with sense-organs)이며,

2) 무상(無想)은 물리적 오관(五官)의 지각을 갖지 않는 천상의 존재들이다.

3)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은 지각을 가졌다고도 안 가졌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고의 신들이다.

 

뭇 보살 마하살들은 이 모든 아홉 종류의 중생들이, 그들의 무명으로 인하여 윤회의 바퀴를 돌고있는 불쌍한 현실을 공감하여, 이들을 모두 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하려 한다는 것이다.

 

멸도(滅度)’()’불을 끈다는 의미요, ‘()’건네다’(), 즉 제도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즉 구원한다는 뜻이다. ()이란 이다. 무엇을 끄는가? 그것은 불을 끄는 것이다. 불이란 무엇인가? 우리 존재는 불로 훨훨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ㆍ갈애의 불이요, 곧 연기의 불이요, 곧 윤회의 불이다.

 

그 불을 끈 상태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반(涅槃)’은 곧 ‘nirvāṇa’의 음역인데 니원(泥洹)’이라고 음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은 바로 불의 꺼짐이다.

그런데 이 꺼진 상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가 유여열반이요, 그 하나가 무여열반이다. 1) 유여열반(有餘涅槃)이란 문자 그대로 남음()이 있는() 열반(꺼짐)이다. 무엇이 남아있는가? 열반에 들긴 했는데, 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오온(五蘊)의 집적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유정(有情)이요, 생명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장작의 불이 꺼지긴 했는데 장작이 숯이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완전한 꺼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숯도 남지않고 재조차 남지않고 완전히 연소되어 꺼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남김이 없는 열반(꺼짐) 무여열반(the Nirvāṇa without substratum)’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온(五蘊)이 사라지고 열반만 남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사실 죽음이다. 존재에 있어서 완전한 열반은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입멸(入滅), 사거(死去),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입적(入寂)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럼 불교는 죽음의 예찬의 종교인가? 그렇다! 다음의 두 싯귀를 보라!

 

乾坤一戱場
건곤일희장
건곤은 하나의 연극무대
人生一悲劇
인생일비극
인생은 하나의 비극일뿐 - 황똥메이(方東美) -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장한 듯이 무대위서 떠들지만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 맥베스 -
Signifying nothing.

 

나는 불교를 생각할 때, 비극을 생각한다. 나는 불타를 생각할 때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을 생각한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련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이련만, 그토록 그토록 울부짖으며 우리는 매달려야 하는가?

 

보살은 말한다: “난생이건 태생이건, 습생이건 화생이건, 유색이건 무색이건, 유상이건 무상이건 비유상비무상이건, 이들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를 내가 무여열반에 들게 함으로써 멸도하리라!” 그러면 보살은 살인자인가? 그럼 불타는 살생자인가? 살아있는 모든 자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자이기라도 하단 말이냐??

 

사실, 문맥으로 보면, 이 나의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할 수 있는 불교학자는 없다. 그들의 답변은 이렇게 궁색해질 것이다. 여기서의 무여열반이란 열반의 소승적 철저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일 뿐이다. ‘무여열반이란 생명의 불이 꺼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죽음이다. 나 도올에게도 죽음에의 갈망이 있다. 순간 순간 죽음이라는 미지의 환상이 엄습한다. 인간 존재는 사실 타나토스(Thanatos)적 본능 속에서 산다. 그것은 에로스(Eros)와 동시적인 강렬한 본능이다. 소승적 수도승(修道僧)들은 분명, 멸절(滅絶)의 철저성을 강조했고, 그 강조는 분명 번뇌의 온상인 육체의 멸절에까지 이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진정한 해탈은 죽음에서 비로소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성철당의 돈오돈수도 결국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는 침묵할 뿐인 것이다.

 

판본의 문제인데 우리 해인사판에는 가끔 ()’()’로 되어 있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无想)’의 경우처럼. 판본을 중시하여 판본모습 그대로 배인(排印)한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如是滅度無量无數無邊衆生, 實无衆生得滅度者.’

 

 

윤회의 공포

 

바로 여기까지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이와 같이의 내용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즉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한 것이다. 바로 이 3절의 내용이야말로 대승정신의 출발이며, 바로 금강경』」벼락경이 될 수밖에 없는 전율의 출발인 것이다. 벼락같이 내려친 대승(大乘)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과연 붓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파(說破)하려 하고 있는가?

 

우선 외면적으로 이 불타의 한마디는, 비록 외면적으로는 보살을 주어로 하고 있지만, 불타가 추구해온 자비(慈悲)의 삶에 대한 전면부정이다. 이것은 모든 전도주의(Evangelism), 모든 구원주의(Saviorism, Soteriology)에 대한 전면 파업이다!

 

나는 윤회의 굴레를 계속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중생들을 구원할려고 하였다. 아니! 나는 구원하였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같이 위로하고 애통해 하고,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가르치고 또 동고동락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윤회의 굴레의 아픔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멸도(滅度)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나 붓다의 실존적 깨달음은 멸도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 자비행에 있지 아니하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멸도의 길을 열어준, 열음의 혜택을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로 나는 아무도 멸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구원을 받아야 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비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죽도록 열심히 산 나의 번거로운 삶의 수고는 헛짓이었나? 그렇다! 그것은 나의 인식 속에서 전면 부정되어야 할 사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붓다 자신의 자비로운 삶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붓다는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를 생각할 때, 아니, 불교를 잉태한 인도문명을 생각할 때, 단 한마디의 말을 떠올린다. 그것은 윤회의 공포(the Horror of Transmigration)’! 이것은 비단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윤회는 인도 문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의 기본틀이다. 윤회 없는 삶이란 없다. 윤회란 한마디로 내 삶의 행위가 행위 자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 되어 시간 속에서 영속된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또 하나의 윤회의 삶을 의미한다. 그 또 하나의 삶으로의 태어남은 또 하나의 죽음(재사再死)을 전제로 할 것이다. 그 또 하나의 죽음은 다시 또 이생으로의 환귀를 의미할 것인가? 하여튼 이런 생각은 공포스러운 생각이다. 나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나의 삶이 삶이 아니다. 이 생사(生死)의 끊임없는 고리를 이어가는 업은 나의 삶의 도덕적인 행위다.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낳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낳는다. 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윤회는 하나의 사실이다. 시간 속의 존재의 사실이다. 그리고 윤회만을 엄격히 생각한다면 윤회 속에는 인간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 윤회의 영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업()의 존재(存在)이기 때문이다.

 

이 윤회는 인간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윤회는 숙명론(fatalism)이나 종말론(eschatology)이 아니다. 기독교처럼 복락의 천국론(天國論, Kingdom of Heaven)이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이후무종(以後無終)의 영속(永續)일 뿐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비극!

 

해탈이란 바로 이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브라만계급으로부터 모든 카스트의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공통(共通), 윤회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의 복음이었다. (, karman)윤회(saṃsāra)해탈(mokṣa), 이 세 가지는 인도문명의 기본골격이었다. 그러나 윤회로부터의 해탈, 그 복음의 소식은 붓다의 시대를 벗어날수록 특정한 수도인(修道人)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아라한들의 고행(苦行)에 가리어 버렸다. 뭇 중생들은 오직 해탈의 가능성이 없는 윤회의 굴레를 굴리고 있었을 뿐이다.

 

윤회의 주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다. 그것은 행위. 그런데 여기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윤회를 일으키는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 윤회의 주체는 업이다. 그러면 업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런데 불타는 무엇을 말했든가? 불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은 무엇이었든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이었든가? 일체개고(一切皆苦)? 아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아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아니다! 사실 이러한 얘기들은 붓다가 아니래도 당대의 모든 현자(賢者)들이 상투적으로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덧없고, 오직 열반(涅槃, nirvāṇa)만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이런 얘기들은 당대의 현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는 말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 할 정종법인(正宗法印)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삼법인(三法印)이 아니요, 바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일법인(一法印)인 것이다.

 

 

 

 

붓다와 예수의 최후의 말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諸法)이란, ‘()’이라 해서 무슨 대단한 달마진체(眞諦)’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나 유식(唯識)에서 칠십오법(七十五法), 백법(百法) 운운했듯이 그냥 모든 존재(存在)’를 말하는 것이다. ()은 존재요,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법을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 작위적으로 만든 유위적 법(, 존재)이요, 하나는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무위적 존재다.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후자를 무위법(無爲法)이라 하는데, 유위법 속에는 또다시 크게 색법(色法), 심법(心法), 심소유법(心所有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4카테고리가 있다. 우리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때의 제행(諸行)의 행()‘saṃskāra’를 말하는데 이 행()은 곧 유위법(有爲法)의 통칭(通稱)인 것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제행諸行)’은 덧없다(무상無常)는 것이다. ‘덧없다하는 것은 불변(不變)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항상됨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諸法)의 법()은 제행(諸行)의 행()과는 달리,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말이다.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 없다.’ 이것이 곧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뜻인 것이다. 그런데 ()가 없다함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아(, ātman)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가 아니다. 는 넓은 의미에서의 ()’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다. ()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불타의 논리적 깨달음에 속하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내가 없다는 그런 상식적 논의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아()라는 것은 곧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래에(sub) 놓여진 것(stance)이다. 즉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 책상이 있다고 할 때 참으로 우리가 책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책상을 실체화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책상을 책상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책상의 자기동일체로서 책상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책상의 자기동일체를 바로 우리가 ()’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기 저 꽃은 예쁘다!’ 아주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저기 저 꽃이 있고, 그 있는(존재하는, 가 있는) 꽃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구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기 꽃이 있고 그 꽃은 아름다움을 소유한 상태로 있다? 과연 그런가! 내일 보면 어떨까? 시들어져 버렸다. 어저께는 어땠는가? 피지도 않았다. 그럼 이 순간에는 어떠한가? 과연 저기 저 꽃이 있는가? 그럼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나의 마음의 상태인가? 내가 저 꽃을 감지하는 순간의 나의 느낌인가? 그것은 실체성이 있는가? 과연 저 꽃은 아름다운가? 저기 저기 저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에 그 느낌의 대상으로서의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존재가 아닌 나의 느낌을 담아낸 어떤 물체의 조합이었다. 그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오온(五蘊)이라 부르고 그 조합을 가합(假合)이라고 부른다. 즉 그 꽃은 존재(存在)가 아닌 오온의 가합인 것이다.

 

다시 묻겠다! 제법(諸法)은 있는가? 모든 존재는 참으로 존재하는가? 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제법(諸法)은 무아(無我),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의 포효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없다! 그 나가 없다고 외치고 있는 붓다라는 아()조차가 허공(虛空)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큰 문제가 발생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면, 윤회(saṃsāra)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가 없는데 윤회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면 불교는 애초로부터 윤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윤회설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윤회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다. 윤회를 전제로 하지 않는 존재를 생각할 수도 없고, 윤회의 전제가 없는 불교는 생각할 수도 없다. 사실 윤회는 이론이기 전에 하나의 사실이요, 구원이기 전에 하나의 현실이다. 윤회는 모든 생명의 생사의 법칙이요, 순환의 대세다. 불교가 윤회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도라는 문화환경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윤회의 설정이 없이는 인간삶의 도덕성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선업(善業)에 대한 요구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윤회와 무아(無我)의 모순’, 이것은 불교사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상황이었다. 윤회와 무아 사이에 존()하는 갈등과 긴장은 불교사의 시작으로부터 끝까지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였다. 실로 모든 불교의 종파(宗派)의 성립(成立)은 바로 이러한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성립한 지류적(支流的)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살론의 등장은, 아라한에게 파산을 선고하고 나온 새로운 대중운동의 출발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금강경본문에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사실 이것은 소승 아라한들의 멸절(滅絶)에의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보살들에게는 바로 이 멸절에의 동경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도 무아(無我). ()도 무아(無我). 생사(生死)에는 생사라고 하는 고유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반(涅槃, nirvāṇa)에도 열반이라고 하는 고유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윤회의 지멸(止滅)이 곧 열반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윤회는 삶의 현실이다. 그 삶을 벗어나는 죽음이 그 삶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들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 윤회의 현실이 곧 열반이라고 하는 생각의 회전이다. 이 생각의 회전은 또 무아의 부정의 부정, 부정의 끊임없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이 생사의 고리 밖에는 잡을 것이 없다. 열반이 자리잡을 수 있는 그 실체적 자리가 근원적으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이 사상은 곧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과감한 생각으로 비약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 그 자체가 죄가 아니요, 번뇌 그 자체가 중생구원의 자비(慈悲)로 화()하는 것이 곧 대승이다!

 

인간 붓다는 선포한다. 붓다인 그대 보살들이여! 그대들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마음가짐을 지닐지라: “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원이란 근원적으로 그 뭇 중생들에게 존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구원한 바가 없다. 나의 구원의 삶, 그 자체가 성립불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항상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성경의 한 구절이 있다(복음서의 원형인 마가복음을 선택한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마가 15:33~34).

 

 

예수는 분명 그의 삶을 인간에 대한 구원의 삶으로 이해했다. 예수는 분명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고 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는 (Light)’이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진입한 빛이다. 그는 육체의 어둠 속으로 수육(受肉)한 구원의 빛이요 영혼이다. 그는 제자 앞에서 때로는 그 모습이 변형(Transfiguration)되어 해같이 찬란한 빛으로 되고 그의 옷조차 빛으로 화()한다(마태17:2, 마가9:2).

 

우리가 잘 아는 동화에 거지왕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왕자가 우연히 얼굴이 똑같게 생긴 거지의 옷을 입게 되고, 거지로서 오인되어 경험하는 온갖 수난과 열락의 이야기! 예수의 상황도 이와 같다. 예수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윤회(saṃsāra)의 어둠 속에 갇힌 존재가 아닌 자유로운 천상(天上)의 빛이다. 항시 해탈(mokṣa)이 가능한 자유로운 빛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인간의 옷을 입었다. 거지왕자가 거지로 오인될 수밖에 없듯이, 예수는 윤회의 굴레 속의 사람으로 오인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내가 왕자라 하고 빛이라 할 수록 그는 조롱과 멸시와 핍박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의 삶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윤회의 굴레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가 그의 죽음을 예언하고, 그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은 바로 거지왕자가 이제 그 진짜 거지를 만나 다시 자기의 본모습인 왕자로 되돌아가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의 몸의 윤회의 어둠을 버리고 다시 빛의 세계로, 천상(天上)의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기나긴 오해와 박해와 수모의 시간들을 버리고 영광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기쁜 그 순간! 왕궁의 모든 찬란한 보화가 기다리고 있는 그 기쁜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회귀(回歸)의 기쁜 순간에 예수는 무어라 외쳤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이 구절에서 항상 눈물을 흘린다. 왜냐? 나는 한 인간의 소름끼치는, 절망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울부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그 어느 누구도 이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하는 자들이 없다. 성서의 기자들이 이것을 기록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서기자들의 위대한 대승정신인 것이다. 예수의 이 순간의 외침은 바로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러한 해석은 무서운 이단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한 사실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을 어찌 달리 해석할 방도가 있을까?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정녕코 나를 십자가에 죽이시려 하시나이까? 주여! 주여! 나는 하나의 인간이로소이다. 나는 거지가 되어 태양보다 더 찬란한 희비(喜悲)의 삶을 살았소이다. 날 그대로 두소서! 윤회(saṃsāra)의 어둠 속에 그대로 두소서! 어찌하여 날 죽이시나이까? 어찌하여 날 해탈(mokṣa)의 허공 속으로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인간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해탈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해탈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의 전면부정이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또 무어라 외쳤던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23:34), 바로 이 알지 못함’, 이것은 곧 인간의 무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의 무여열반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간됨의 완성이었고, 신의 아들됨의 성취였다. 가만히 앉아 좌선(坐禪)한 채 입적(入寂)하는 붓다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인류의 무명의 굴레를 불사르는 속의 해탈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회가 곧 열반(涅槃, nirvāṇa)이라고 하는 대승적 삶의 승리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예수의 죽음ㆍ해탈의 순간에 외친 하나님의 아들됨의 부정의 지혜라고 한다면, 우리의 주제도 동일하다. 만약 인간 붓다가 브라만들에게 잡히여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면, 그 십자가에 못박힌 붓다의 최후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여열반의 죽음을 찬란한 삶으로 전환시킨 그 한마디였을 것이다.

 

 

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바로 이 절에서 정종분(正宗分)은 피크를 이룬다. 이것은 불타의 무아론(無我論)의 본의로 회귀하자는 보살운동의 캣치프레이즈이기도 한 것이다. ‘Return to Buddha!’

 

역사적으로 보살의 의미규정은 이 한 절에 완료되고 완성된다. 바로 보살됨의 내용이 이 한 절을 벗어남이 없다. 역사적으로 대승의 규정은 이 한 절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종지(宗旨)인 것이다.

 

이 사상(四相)이라고 하는 ()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에 대해서는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고 또 역대의 해석이 구구 분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므로, 모든 역대의 해석을 각설하고 간략하게 내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설파하겠다.

 

한마디로 이 사상(四相)의 부정은 곧 불타의 일법인(一法印)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멸도(滅度)의 행위의 부정의 인식론적 근거를 밝힌 것이다. 이미 앞 절에서 내가 어느 정도 약설(略說)했기에 장황설을 삼가하기로 하겠다.

 

보살에게는 어떠한 경우도 ()’라고 하는 실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가 있으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다. 즉 보살됨의 규정은 곧 무아(無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실천이 없이는 반야의 지혜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우선 라집(羅什)의 번역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 원문의 개념을 상응시키면 다음과 같다.

 

라집역(羅什譯) 산스크리트 원문 현장역(玄奘譯)
아상(我相) ātman 아상(我想)
인상(人相) pudgala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
중생상(衆生相) sattva 유정상(有情想)
수자상(壽者相) jīva 명자상(命者想)

 

 

그런데 산스크리트 원문의 순서는, 아인중수(我人衆壽)의 순서가 아니라, ātman sattva jīva pudgala의 순서대로 되어 있다. 라집(羅什)이 그 순서를 바꾼 것은 그 나름대로 한역의 독립적 리듬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사상에 대한 한역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해석자에 따라 제멋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의 개념적 이해는 비교적 명료한 것이므로 우선 그것을 해설해 보자! 모든 개념은 역사적 상황을 갖는 것이며, 이 네 개념은 기실 알고 보면 새로운 보살승운동이 기존의 그리고 당대(當代)의 모든 사념(邪念)들을 타파하기 위한 것으로서 설정한 대자적 개념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아트만(ātman)은 전통적 브라마니즘의 가치관의 부정이다.

그것은 브라마니즘이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상정한, 아트만이라고 하는 실체적 원리이며, 그것은 윤회(saṃsāra)의 주체인 것이다. 여기 아트만의 부정은 불교의 반()브라마니즘적 성격을 명료히 드러내는 것이다.

 

2) 다음, 사트바(sattva)는 초기대승불교의 자체 반성을 촉구하는 말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사트바는 곧 유정(有情)이다. 유정(有情) + 깨달음의 추구가 되면 그것은 곧 보살이 된다. 즉 보살(bodhisattva)과 중생(sattva)의 이원적 구분의 상()이 있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보살은 유정(有情, 중생衆生)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보살이 곧 중생이요, 중생이 곧 보살인 것이다. 중생과 보살이 따로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가 일승(一乘)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유정(有情)과 비정(非情)의 구분조차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지바(jīva)는 불교와 동시대에 흥기興起한 자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바(jīva) 혹은 지바아트만(명아命我)은 존재의 순수영혼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모든 생명에는 이 순수영혼인 지바가 실체로서 존재하며, 이 지바는 업()에 의하여 속박된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업을 바로 지바에 달라붙는 일종의 미세한 물질(pudgala)로 간주했다. 이 업물질(karma-pudgala)에 의해 지바는 때가 끼고 계박(繫縛)을 당한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추종자들은 이 업물질을 순수영혼으로부터 벗겨내는 고행(苦行)을 해야한다. 고행을 통해 이 때가 제거되면 순수영혼 지바는 순수한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상태가 곧 해탈(mokṣa)이요 열반(涅槃, nirvāṇa)이다. 그러나 대승사상은 이러한 사유의 전면부정이다.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엄존한다는 생각 자체가 무아론(無我論)에 위배되는 것이다.

 

4) 뿌드갈라(pudgala)는 소승 부파불교 중의 한 지파인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에 대한 비판으로 보여진다.

독자부이론은 바로 초기 불교의 고민거리였던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윤회의 주체로서 뿌드갈라를 설정했다. 뿌드갈라는 오온(五蘊)과는 다르지만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의 존재다. 이 뿌드갈라는 윤회의 업을 운반하는 자기동일체로서 인간에 대한 도덕적 수행의 요구의 존재론적 근원이 되는 것이다. 독자부의 뿌드갈라 이론은 명료한 아트만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뿌드갈라를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중간자적 존재로서 상정함으로써 실체의 오류를 최소화시키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윤회(saṃsāra)의 자기동일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실체론의 오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부의 뿌드갈라 이론은 대승의 무아론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인도불교가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홍명집(弘明集)같은 문헌에서 나타나는 신멸불멸논쟁(神滅不滅論爭)에서 불교가 무아론(無我論)의 입장과 상치되는 신불멸론(神不滅論)’의 입장을 고수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도 바로 당대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이 이 독자부(犢子部) 뿌드갈라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독자부(犢子部)는 뿌드갈라의 이론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pudgalavāda’라고도 불리운다.

 

이렇게 사상(四相)을 고구(考究)하면 사실 이 아()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는 무아론(無我論)의 네 개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를 말하는 중국인의 언어환경 속에서는 이것은 모종의 독자적 의미체계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에게 이 말은 하등의 정확한 원전적 레퍼런스를 동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상(四相)을 존재(存在)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한다. 먼저 아상(我相)이란 나라는 생각이다. 인상(人相)이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중생상(衆生相)이란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 저 죽어있는 돌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감이다. 수자상(壽者相)이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모든 존재로 확대되어 나간다. ‘Ego Man Life Existence’의 실체관의 외연의 확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    
  중생(衆生)  
수자(壽者)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아()와 인()을 한 쌍으로 보고, 중생(衆生)과 수자(壽者)를 한 쌍으로 보는 것이다. ()는 나요, ()은 타(). 내가 있다는 생각, 타인(他人)이 있다는 생각, 이것은 바로 실체적 사고의 전형이다. 즉 불타에게서 구원의 주체인 가 있고 구원의 대상인 가 있었다면 불타는 곧 자신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다. 보살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말 어원을 한어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는 국어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말의 짐승(즘생)은 곧 중생(衆生)’의 변행태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생(衆生, sattva)은 유정을 통칭하며 유정의 개념에서는 식물의 외연이 빠진다는 나의 발언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우리말에 중생이 상말로 쓰일 때는 짐승의 의미가 내포된다.

 

중생상(衆生相)’이란 즘생(짐승) 같은 삶을 영위하는 뭇 인간들이다. 거기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수명(壽命)과 복락(福樂)을 구유한 고귀한 존재인 이다. 이렇게 보면 수자(壽者)와 중생(衆生)은 한 의미의 쌍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我相아상 人相인상
壽者相수자상 衆生相중생상

 

 

()현장(玄奘)의 번역대로 곧 ()’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요곧 생각인 것이다. ()가 있고 인()이 있고 중생(衆生)이 있고 수자(壽者)가 있다는 생각(), 그 모습()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부처님은 문둥이! 십자가는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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