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5-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견여래불?”
‘여리(如理)’는 ‘리와 같이’ ‘리대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그리고 물론 이것은 한역불교에서 더 뚜렷이 발전된 개념이지만, ‘리(理)’라고 하는 것은 ‘사(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사(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리(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본체론과는 다르지만 본체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리(理)는 진여(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생멸(生滅)의 세계가 아닌 생멸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언어는 오로지 생멸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며 진여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다. 본 분(分)에서 말하는 ‘상(相)’은 바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다. ‘여리(如理)’는 곧 언어를 격절시킨다는 뜻이다.
‘실견(實見)’에서의 ‘실(實)’은 역시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그러니까 ‘여실하게 본다’의 뜻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참 모습을 보라!’라고 번역하였다.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이 분을 시작하기 전에 이 분의 내용과 관련하여 또 불교의 중요한 이론체계 하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위 ‘삼신설(三身說, trayaḥ kāyā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붓다라는 존재(存在)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 즉 우리의 붓다에 대한 인식의 구조를 밝힌 이론이다. 삼신(三身)이란 보통, 1) 법신(法身, dharma-kāya) 2) 응신(應身, nirmāṇa-kāya) 3) 보신(報身, saṃbhoga-kāya)을 말하는데, 이외로도 화신(化身, nirmāṇa-kāya)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이외로도 또 수없는 신(身)들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미의 해석도 모든 경전이 제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그래서 불교학도들이 이것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보면 때로 심하게 혼효(混淆)되어 있다. 그러나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대체로 합의(合意)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법신(法身)은 ‘진리의 신체’를 의미하며 영원불변의 진리의 당체를 가리킨다. 법불(法佛)이니 법신불(法身佛)이니 법성신(法性身)이니 자성신(自性身)이니 여여불(如如佛)이니 여여신(如如身)이니 실불(實佛)이니 제일신(第一身)이니 진신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이의 다른 이름들이다.
둘째로, 응신(應身)이란 온갖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간(世間)의 사람들의 부름에 향응(響應)하여 나타나는 신체라는 의미로서 응신(應身), 응신불(應身佛), 응화신(應化身) 등으로도 불리운다. 응신은 크게 보면 결국 색신이다.
셋째로 보신(報身)이란 우리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으로서 행업(行業)을 쌓아 그 행업(行業)의 보(報)로서 완전한 공덕(功德)을 구비한 불신(佛身)이 되는 것을 말한다.
법신(法身) | dharma-kāya | 진리의 신체 |
응신(應身) | nirmāṇa-kāya | 사람들의 부름에 향응하여 나타나는 신체 |
보신(報身) | saṃbhoga-kāya | 행업(行業)의 보(報)로서 완전한 공덕을 구비한 불신이 되는 것 |
그런데 이렇게 해설을 하면 뭔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 도올은 현재 역사적으로 살아 있다. 이 도올은 색신(色身)을 구비한 자(者)로서 매일매일 밥먹고 똥싸고 울고 불고 애들하고도 다투고 살고 있다. 아마도 나의 아내 같은 사람이 내 옆에서 바라보는 나는 분명히 살아있는 역사적인 실존적 인물이다. 내가 방귀라도 뀌면 아내는 옆에서 실제로 쿠린내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책으로 나를 접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나를 접하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책 속에서 지금 방귀를 꾸었다고 해도 그 냄새를 맡을 리가 없다. 그들은 오직 내가 설하는 진리만을 이 책을 통해 접하고 그 진리의 주체로서의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를 그냥 상정할 뿐이다. 내가 죽고난 다음에 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인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이 두가지로 나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첫째방식을 색신(色身)이라 하고 그 둘째방식을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색신이란 역사적 실존인물을 가리키는 것이요, 법신이란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색신(色身) | Historical Buddha 역사적 붓다. |
Historical Jesus 역사적 예수 |
법신(法身) | Buddha as Spiritual Principle 정신원리로서의 붓다 |
Jesus of Faith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즉 그리스도 |
역사적 붓다나 역사적 예수는 모두 색신(色身)을 이름이요, 정신적 원리로서의 붓다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모두 이 법신(法身)을 가리킨 것이다. 오늘 나 밥먹고 똥싸는 김용옥은 색신(色身)이요, 먼 훗날 도올서원의 강의자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추상적 김용옥은 법신(法身)이다. 붓다의 사후부터 대승불교 중기(中期) 즉 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이 색신(色身, rūpa-kāya)과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고 하는 명료한 이신(二身)의 개념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 이신(二身)이, 잡소리를 좋아하는 많은 이론가들에 의하여 복잡한 개념으로 발전케 된 것이다. 삼신(三身)사상에서 응신(應身)이니 화신(化身)【중생(衆生)의 교화(敎化)를 위하여 종종(種種)의 형체를 취(取)하여 화현(化現)하는 불(佛)】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 색신(色身)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보신(報身)이란 이 응신(應身,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의 개념의 중간자적 통합으로서 후대에 제시된 것이다.
色身(역사적 붓다) 색신 |
應身(化身) 응신(화신) |
報身 보신 |
法身(진리체로서의 붓다) 법신 |
그런데 삼신(三身)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색신(色身, 응신應身)과 법신(法身)의 두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인류의 종교사에 모두 공통된 문제의식의 아키타입(원형)인 것이다.
기독교의 문제점은 법신(法身) 예수를 모르고 색신(色身) 예수에게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점은 색신(色身) 붓다를 너무 무시해 버리고 법신(法身)붓다만을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종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구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색신(色身)의 신화화(mythologization)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심각하게 봉착한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에 못박혀 있던 인간이 무덤 속에 가사상태로 사흘 정도 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현대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 해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얼마든지 초대교회의 제자들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날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픽션이 순식간에 퍼져 당대의 사실로 확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쉽사리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상식적이고도 건강한 논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입에 담지 못할 이단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사실적 가능성에 대한 논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초대교회의 성립이 선행하고 부활이 날조되었다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성립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인하여 성립한 것이고, 사도 바울의 개종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기에, 만약 예수부활을 이렇게 사실적 가능성으로 기술하게 되면 기독교사가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신학이 성립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살아났다!
그런데 우리의 해결은 바로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는 색신(色身)의 사실이 아니라 법신의 사실인 것이다. 예수의 법신(法身)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 논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사실이요, 소망의 사실이요, 대망의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의 사실이다. 기독교가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애초부터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혼동이 생기고 오히려 색신(色身)의 신화화라는 미신만을 낳게 된 것이다. 예수의 색신(色身)에 집착하고 있는 뭇 중생들에게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상식에 어긋나는 쌩거짓말들만 내뱉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분리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미륵불의 하왕생’보다도 더 리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20세기 기독교신학이 ‘역사적 예수’에 집착하고, 또 그 역사적 예수의 논의가 과거의 신화화에 대한 비신화화를 추구하며, 양식사학(Form Criticism, Formgeschichte)이라고 하는 매우 정교하고 존경스러운 문헌비평의 학문방법까지 탄생시켰지만, 그 모든 논의의 근본 오류는 예수의 색신(色身)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불트만신학을 읽을 만큼은 읽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웁게도 치밀한 지식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지혜를 결여하고 있었다. 종교현상은 그것을 비신화화하기에 앞서 그 자체의 법, 다르마로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의 색신에 대한 집착에서 근원적으로 떠나야 한다! 카톨릭신학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Trinitarianism)도 오로지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신비적 이동(異同)의 문제만 집착하고 있을 뿐, 내가 말하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는 복잡한 교리가 되고 만다. 그것은 후대교회의 성찬제식론의 일부로 등장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한 말엽적 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근원적으로 기독교의 테마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에 비하면 불교는 역사적 붓다를 너무 초기부터 법신화(法身化)시켜 버렸다. 붓다의 생애 자체가 신비적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러니칼하게도 더 추상화되고, 예수의 생애는 너무도 신비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구체화된 것이다. 불교의 삼신론(三身論)의 주체는 법신(法身)이다. 싯달타라는 카필라성의 왕자, 그 색신(色身)은 법신(法身) 위에 잠깐 걸쳐진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불교가 색신(色身)을 무시하고 법신(法身)에 집착한 것은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나 도올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이법을 논하는 웅대한 정신에 접한다. 그러나 사실 나 도올은 출판사에 다녀오다가 경찰한테 티켓이라도 뜯기는 판에는 애승이 전경아저씨한테 살살 빌고있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치주염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는데, 치과에 가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은 그 끔찍하도록 짜릿한 큐렐의 공포 이외에는, 우주고 인간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냘픈 서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색신(色身)이 이렇게 초라하다 해서, 감히 이 도올의 우주적 정신을 얕봐서야 되겠는가? 붓다의 본질은 색신(色身)에 있지 않고 법신(法身)에 있다. 나 도올의 가치는 김용옥의 색신(色身)에 있지 아니하고 법신(法身)에 있다. 그것은 나 색신(色身)의 더러움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그 인간이 설(說)하는 법(法, 진리)에 있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철칙을 논구하고자 함이다. 나 색신을 괴롭히지 말라! 길거리에 걸어가는 나 도올을 놓고 쑥떡꿍 쏙딱꿍거리지 말라! 나는 매일 매일 울고 웃는 초라한 인간이니까. 붓다도 예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 1절에서 ‘신상(身相)으로 여래(如來)를 보지말라’는 뜻은 바로 붓다를 색신(色身)으로 바라보지 말고 진리의 구현체인 법신(法身)으로서 바라보라는 대승(大乘)의 명령인 것이다.
5-2.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하오니이까? 여래께서 이르신 몸의 형상이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신상(身相)’을 나는 ‘몸의 형상’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붓다의 색신(色身)을 구성하는 특징에 관한 것이다. 상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어는 ‘lakṣaṇa’인데 ‘nimitta’와 대응하여 물체의 외면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표시(mark), 싸인(sign), 심볼(symbol), 증거(token), 성격(characteristic), 속성(attribute), 성질(quality)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소위 ‘부처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삼십이상(三十二相, dvātriṃśan mahā-puruṣa-lakṣaṇāni)이라는 것이 있는데, 삼십이대장부상(三十二大丈夫相),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 삼십이대사상(三十二大士相)으로 불리운다. 이는 부처님 혹은 전륜성왕의 몸에 구족된 32종(三十二種)의 미묘한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도 경전마다 차이가 있으나 『대지도론(大智度論)』 권제4(卷第四)에 나열된 것【『大正』 25/90~91】을 여기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족하안평립상(足下安平立相): 편평족과 마당발의 형태. 석굴암 본존 발바닥모양이 그러하다.
2. 족하이륜상(足下二輪相): 발바닥에 두 개의 수레바퀴자국 같은 것이 있다. 석굴암 본존불에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3. 장지상(長指相): 발가락ㆍ손가락이 가늘면서 길다.
4. 족근광평상(足跟廣平相): 발뒤꿈치가 넓고 평평하다.
5. 수족지만망상(手足指縵網相):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무늬 없는 비단 같은 그물, 즉 황금빛 물갈퀴가 있다(오리발처럼).
6. 수족유연상(手足柔軟相): 손ㆍ발이 매우 보드라워 도라면(兜羅綿) 같고 홍적(紅赤)색을 띤다.
7. 족부고만상(足趺高滿相): 발등이 거북이 등 모양으로 높고 통통하다.
8. 이니연박상(伊泥延膊相): 장딴지가 이니연이라는 사슴의 다리 같이 가늘고 둥글며 예쁘게 점점 굵어진다.
9. 정립수마슬상(正立手摩膝相): 일어서서 팔을 내리면 무릎까지 내려간다.
10. 음장상(陰藏相): 자지가 마왕(馬王)의 자지처럼 산봉우리같이 크고 우뚝 솟으나 보통 때는 오므라들어 몸 속에 안 보일 정도로 숨어있다.
11. 신광장등상(身廣長等相): 키가 두 팔 벌린 넓이와 같다.
12. 모상향상(毛上向相):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이 위로 솟아있고 감청(紺靑)색이며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13. 일일공일모생상(一一孔一毛生相): 털구멍 하나에 반드시 한 개의 털만 나며, 그 색깔은 청유리색이며, 모든 털구멍에서 미묘한 향기가 난다.
14. 금색상(金色相): 온몸 전체가 순금빛이며 광채가 나고 깨끗하다.
15. 장광상(丈光相): 온몸에서 발하는 빛이 한 길이 된다.
16. 세박피상(細薄皮相): 살결이 보드랍고 매끄러우며 일체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17. 칠처융만상(七處隆滿相): 두 발바닥ㆍ두 손바닥ㆍ두 어깨ㆍ목덜미 일곱 군데가 도톰하고 원만청결하며 빛이 나며 유연하다.
18. 양액하융만상(兩腋下隆滿相): 두 겨드랑이 밑이 불고불심(不高不深), 도톰하여 허당이 없다.
19. 상신여사자상(上身如獅子相): 윗몸의 위용이 단엄(端嚴)한 것이 꼭 사자 같다.
20. 대직신상(大直身相): 사람 중에서 그 신체가 가장 곧고 크다.
21. 견원호상(肩圓好相): 양 어깨가 둥글며 풍만한 느낌을 주며 특별히 잘생겼다.
22. 사십치상(四十齒相): 잇빨의 갯수가 40개이며 가지런하고 백설같이 희다.
23. 치제상(齒齊相): 잇빨생김이 높거나 낮거나 둘쑥날쑥하지 않고 가지런하여 털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다.
24. 아백상(牙白相): 잇빨이 백설같이 희고 광채가 난다. 혹설에는, 40개 이외로 아래위 두 개씩 네 잇빨이 희고 광결(光潔)하다.
25. 사자협상(獅子頰相): 두 뺨이 넓고 도톰한 것이 동물의 왕인 사자의 뺨 같다.
26. 미중득상미상(味中得上味相): 목구멍 양쪽에서 감로가 흘러나와 무엇이든지 입안에 들어가면 최고로 맛있게 된다.
27. 대설상(大舌相): 혓바닥이 길고 넓고 연박(軟薄)하여 입안에서 나오면 얼굴전체를 덮을 수 있다(선사 마조馬祖를 연상한다).
28. 범성상(梵聲相):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것과 같이 맑고 멀리 퍼지는데 꼭 가릉빈가(迦陵頻伽, 까라윙까) 새소리 같다. 듣는 자에게 기쁨을 준다.
29. 진청안상(眞靑眼相): 눈동자가 검푸르며(감청색紺靑色), 푸른 연꽃과도 같다.
30. 우안첩상(牛眼睫相): 속눈썹이 길고 가지런하고 얽히지 않은 모습이 소의 눈과 같다.
31. 정계상(頂髻相): 머리꼭대기 한가운데 살이 솟아올라 꼭 상투모양을 하고 있다【석굴암본존상의 머리꼭대기에도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다】.
32. 백모상(白毛相): 두 눈썹 사이로(미간眉間) 흰 털이 나서 도라면(兜羅錦)과도 같다. 그 모습이 백설과도 같이 희며 광결청정(光潔淸淨)하다.
그리고 이외로도 부처님 색신(色身)의 특징을 묘사하는 말로써 ‘팔십종호(八十種好)’라는 것이 있는데【『대반야경(大般若經)』 제381(第三百八十一】, 그 걸음걸이가 코끼리처럼 유유자적하다든가, 귓밥이 윤상(輪狀)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든가 하는 80종의 특징을 가리킨다. 그를 어찌 여기 일일이 나열하리요? 32상(三十二相)은 인류학자나 불상연구가들에게 좀 도움이 될 것 같아 자세히 묘사한 것이다. 그 묘사가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로 점차 올라갔는데 인도사람들의 ‘미인관’이라든가 ‘초인적 인간상’에 대한 관념이라든가 의학적 지혜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
부처는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날 이런 색신의 모습으로 쳐다보려 하느뇨?”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27~29).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은 못자국에 손가락을 쑤셔넣고서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어리석은 예수의 제자들이여!
공(空)의 이치를 터득한 수보리는 대답한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오니이다.”
5-3.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佛告須菩堤: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불고수보리: “범소유상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아론(無我論)’이 강한 어조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 처음 ‘허망(虛妄)’ 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허망이라는 말은 곧 인간의 인식과 관련된 말이다. 존재 그 자체의 허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ㆍ수단이 모두 허망하다는 뜻이다. 콘체는 이 허망을 ‘fraud’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우리 인식의 기만성을 내포한 말이다. ‘견제상비상(見諸相非相)’의 ‘견(見)’은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깨닫는다면, 그제서야 곧 여래(如來)를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법정 스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이 구절을 어느 선객(禪客)이 제상(諸相)과 비상(非相)을 같이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해석한 적도 있다. 문의(文義)의 맥락으로 보면 바른 해석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하여도 그 종지(宗旨)에 어긋남은 없다.”
원불교는 법당에 모신 법신불(法身佛)이 참으로 법신(法身)이라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등신불(等身佛)일 필요가 하나도 없다 하여 아예 그것을 원(圓, 동그라미)의 모습으로 추상화시켰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이다. 원불교도 처음에는 이러한 혁신불교로서 출발한 콤뮤니티운동이었다. 그러나 원불교의 과제상황은 바로 그러한 혁신적인 발상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유지시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데 있다. 원불교도들에게 끊임없는 반성을 촉구한다.
석두희천(石頭希遷) 문하(門下)의 선승,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 혜림사(慧林寺)에 머물 때, 매우 추운 겨울 날씨에 법당에서 좌선을 하다가 궁둥이가 시려우니까 법당에 놓인 목불상을 도끼로 뻐개 불 지피우고 궁둥이를 쬐이는 장면이 있다. 내 책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통나무, 1998) 68~69쪽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의 의미를 한번 이와 관련시켜 다시 새겨볼 만하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則見如來).’는 『금강경』에 처음 나오는 사구게(四句偈)다. 『금강경』에서 ‘사구게’라고 말한 것이 꼭 이런 것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4행시에 해당되는 대목이 제10분, 제26분, 제32분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4개의 4행시가 있는 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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