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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9분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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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한 상도 상이 아니어라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9-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須陀洹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불?”

 

 

이 제9분은 역사적으로 금강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한 분이다. 금강경은 소승과 대승이라는 구분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당대에 성립한 부파불교에 대한 통렬한 반성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로 이 분()금강경이 쓰여진 당대의 부파불교의 통념에 대한 매우 통렬한 비판의 어조를 깔고 있다. 불교의 언어는 매우 밋밋하고 두리뭉실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면에 숨어있는 역사적 정황을 날카롭게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향사과(四向四果)’라고 하는, 소승 부파불교가 인간수행의 과정으로 설정한 4개의 계위(階位)에 관한 것이다. 여기 집역(什譯)에 즉하여 그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階位
계위
산스크리트 음역 羅什
라집의 역
통용
第一位
1
srota-āpanna 須陀洹
수다원
入流
입류
預流
예류
第二位
2
sakṛdāgāmin 斯陀含
사다함
一往來
일왕래
一來
일래
第三位
3
anāgāmin 阿那含
아나함
不來
불래
不還
불환
第四位
4
arhat 阿羅漢
아라한
(應供)
(응공)
阿羅漢
아라한

 

 

1위는 수다원(須陀洹)이라 음역되는 것으로 인간세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에 방금 들어간() 의 의미다. 즉 속세를 떠나 전문적인 조용한 비구승의 길에 초입(初入)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초입의 예비단계라는 뜻을 살려 보통 예류(預流)’라고 한다.

 

2위는 사다함(斯陀含)이라 음역되는 것으로 원어를 직역하면 한 번 오는 자가 된다. 인도인의 이상은 해탈(mokṣa)’이다. 해탈이란 곧 윤회(saṃsāra)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두 번 다시 생사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최후의 가능성이다. 수행이 깊어져 가는 제2단계, 즉 삼결(三結: 유신견有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을 끊어 버리고 탐ㆍ진ㆍ치의 삼독(三毒)의 죄업이 희박하게 된 이 단계에 오면, 천상(天上)이나 인간세(人間世)에 단 한 번만 다시 태어남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쁠까? 즉 한 번만 더 윤회의 굴레로 들어갈 뿐, 더 이상의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인간세(人間世)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天上)으로 가고, 다시 인간세로 돌아와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천상(天上)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인간세로 가고, 다시 천상(天上)으로 돌아와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을 천상과 인간세를 왔다갔다(왕래往來) 하므로 일왕래(一往來)’라 의역한 것이다. 보통 일래(一來)’라고 부른다.

 

3위는 아나함(阿那含)이라고 음역되는 것으로, 그 산스크리트 원의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이다. 이 경지는 상당히 높은 경지로, 욕계(欲界)의 번뇌를 완전히 절단시킨 사람으로, 사후(死後)에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날지언정, 절대 두 번 다시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색계에서는 이미 각자(覺者)의 위치에 간 사람으로, 욕계로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환(不還)’ ‘불래(不來)’로 의역된 것이다.

 

4위인 아라한은 이미 첫머리에 소승ㆍ대승에 관한 개략에서 논의한 바대로, 소승불교에서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이미 학도(學道)가 완성(完成)되어 더 이상 배움이 필요없기 때문에 무학위(無學位)’라 하고, 그 이하의 3위를 유학위(有學位)’라고 하는 것이다. 아라한은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들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 즉 삼계(三界: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불생(不生)’, ‘살적(殺賊)’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붓다의 위치보다는 아래로 설정된 것이다.

 

사향사과(四向四果)’라 할 때 ()’은 수행의 목표를 말하며 ()’는 도달한 경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팔위(八位)가 된다.

 

() ()
예류(預流) () 예류(預流) ()
일래(一來) () 일래(一來) ()
불환(不還) () 불환(不還) ()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阿羅漢) ()

 

 

우선 소명태자의 분()이름은 그가 만약 이 내용에 즉해서 얘기했다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이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어느 한 모습도 참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다. 어느 한 모습도 근원적으로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의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수다원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수다원의 향(, 발심)을 가진 자가 수다원의 과(, 결과로서의 경지)를 획득했다할 때, 우리는 그 획득함을, 획득했다하는 자부감대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우리 해인사판에는 수다원가 타()로 되어 있다. 기타 판본은 거의 다()로 통용된다. 이하 사다함(斯陀含)’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는 다()의 속자(俗字)이다. 본 경()에서는 속자(俗字)의 경우, 정자(正字)로 환원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세조본 역시 ()’를 썼다.

 

 

 

 

9-2.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이오니이까? 수다원을 이름하여 들어간 자라 하지만, 그는 들어감이 없습니다. 그는 형체에도, 소리에도, 내음새에도, 맛에도, 만져지는 것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만 수다원이라 이름할 수 있습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다원이 수다원일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수도의 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에가 아니다. 어느 곳에도 들어감이 없기 때문에 수다원인 것이다. 이 분()에서 깨고자 하는 것은 모든 수도인들의 자의식이다.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생겨나는 자의식을 모두 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스님들뿐 아니라 수행을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이 깊게 읽고 깨우쳐야 할 말씀이다.

 

이 부분에서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을 의역하였다.

 

 

 

 

9-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斯陀含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디함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불?”

 

9-4.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사다함을 이름하여 한 번 왔다갔다 할 자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에 바로 사다함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명일왕래, 시명사다함.”

 

 

라집(羅什)이 음역과 의역을 이용하여 기나긴 산스크리트 원문을 간결하게 처리해버리는 한역방식이 참으로 돋보인다. 사다함? 하늘과 땅을 이제 단 한 번만 왔다갔다 할 자라구? 우리 이제 대승들은 그러한 신화적 상상력의 단계에 머물러 우리 존재를 규정짓는 바보짓을 하지말자! 사다함이 사다함일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왔다갔다 함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천당 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구? 수보리는 말한다. ‘이라는 게 없나이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구? 하늘에서 천군천사 대동하구 빵빠레를 울리면서 오신다구? 수보리는 말한다. ‘이라는 게 없나이다.

 

도올은 말한다. 이게 다 소승기독교인을 위한 신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라구. 기독교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대승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가? 감과 옴이 없는(불왕래不往來)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가? 꼭 천당 가고 지옥 가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할까? 연보 돈 내어 기도원 짓고 교회당 건축해야만 천당 갈 것인가? 사방에 드높이 올라가는 건 모두 교회 건물뿐이니 도대체 그 많은 건물 지어 무엇 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것이 다 소승 기독교의 폐해다. 한국의 목사님들이시여! 그대들의 신도들을 참으로 대승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사이다. 매일 매일 십일조 내라구 쫄린 주머니 털어 공해뿐일 건물 짓는데 우리민족의 신앙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사이다.

 

 

 

 

9-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경지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阿那含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능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불?”

 

9-6.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아나함을 이름하여 이제 다시 아니 올 자라 하지만, 실제로 온다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만 아나함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名爲不來, 而實无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명위불래, 이실무래. 시고명아나함.”

 

 

우리 해인사본()실무래(實无來)’로 되어 있는 부분이 명본(明本)에는 실무불래(實無不來)’로 되어 있고, 세조본도 명본(明本)을 따랐다. 우리나라 시중 통용본도 한결같이 무불래(無不來)’로 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나함(阿那含)이 불래(不來)의 뜻이므로 그것의 부정은 무불래(無不來)’가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문에서 무불래(無不來)’라고 하면 그것은 이중부정이 되어, ‘오지 않음이 없다.’ 언제고 온다가 된다. 근본적으로 불래(不來)’라는 개념의 부정이라는 맥락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집(羅什)무래(無來)’ 즉 온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다시 아니 올 자라고 하는 개념을 파기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깊은 뜻을 모르고 그것을 무불래(無不來)’로 고치는 것은 옛사람들, 특히 교정을 좋아하는 소학가(小學家)들의 천박함에 지나지 않는다. 육조(六祖)의 주석에도 고명불래(故名不來), 이실무래(而實無來)’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육조(六祖)가 본 금강경판본에는 무래(無來)’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해인사판본의 우수성이 이런 데서 입증되는 것이다. 대정(大正)본은 바로 우리 고려본을 따랐다. 따라서 나카무라도 이 부분을 무래(無來)’로 바르게 번역했는데(ることければなり), 이기영은 또 이 부분만 무불래(無不來)’로 원문도 고치고 번역도 그에 따라 했으니 도무지 그 일관성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통용본을 따르신 것 같다.

 

 

 

 

9-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생각을 해서 되겠느냐? 아니 되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阿羅漢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불?”

 

 

1(第一位)로부터 제4(第四位)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같은 패턴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앞의 3위는 모두 ()’로 되어있었는데 최후의 제4위는 그것이 ()’로 되어 있다. 아라한의 증득(證得)의 상태가 이전의 3단계의 상태와는 다르다고 하는 차별성을 살리는 표현으로, 범문(梵文)에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라집(羅什)이 그에 맞추어 번역한 것이다. 앞의 세 경우는 ‘phalaṃ’이라하여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썼지만, 아라한의 경우는 ‘arhattvam(Arhatship)’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아라한은 어원적으로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자’,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의미다. 그러면 여기 문장의 실내용은 이렇게 된다: “아라한이 '나는 이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이렇게 해석하면 이해가 보다 리얼해질 것이다.

 

 

 

 

9-8.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니 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이오니이까? 실제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노라하는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아상ㆍ인상ㆍ중생상ㆍ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須菩堤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名阿羅漢. 世尊! 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著我人衆生壽者.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명아라한. 세존! 아라한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번역이 실제적 의미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면서 읽기 쉽게 되어 있으므로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 의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나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아상(我相)의 노예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 삶에서 쉽게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태이다. 많은 존경스러운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반성해야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수보리가 자신에게 붙여진 명예로운 이름들을 들어, 자기자신을 맹렬히 반성하는 대목이다. 타인에게 적용되었던 논리를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 자신을 객화하여 보편적인 논리로 형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9-9.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의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됨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니, 이는 욕심을 떠난 제일의 아라한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다라는 이 같은 생각을 짓지 않습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인중최위제일, 시제일리욕아라한. 아불작시념, 아시리욕아라한.

 

 

무쟁삼매인중최위제일(無靜三昧人中最爲第一)’의 원문은 ‘araṇā-vihāriṇām agryaḥ’이며 그 뜻을 직역하면, ‘다툼이 없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최고의 사람이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나 이외의 인간들로부터의 온갖 모욕과 박해와 비난, 그리고 외도(外道)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감정이나 오염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평화(dwelling in Peace, 콘체 역)와 순결(purity)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은 수보리가 속세로부터 은퇴하여 깊은 숲속에서 홀로 살면서 마음의 평정과 평화를 즐겼던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바로 이런 뜻이 최후의 일절에 나오는 낙아란나행자(樂阿蘭那行者)’의 의미와 결부되어 있다.

 

 

 

 

9-10.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수보리야말로 아란나의 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世尊! 我若作是念我得阿羅漢道, 世尊則佛說須菩堤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堤實無所行, 而名須菩堤是樂阿蘭那行.”

세존! 아약작시념아득아라한도, 세존즉불설수보리시낙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시낙아란나행.”

 

 

여기 아란나(阿蘭那)의 행()을 즐기는 자’(araṇā-vihārin)라는 표현은 앞의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과 같은 표현이다. ‘득무쟁삼매인(得無諍三昧人)’이라는 것은 의역이고 낙아란나행자(樂阿蘭那行者)’는 음역이다.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은 사람의 산스크리트 복수 소유격이 ‘araṇā-vihāriṇām’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될 것이다. ‘아란나(阿蘭那)의 행을 즐기는 자라는 것은 정적한 곳에서 일체의 경계를 끊어버리는 무쟁삼매를 수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을 하고 있는 수보리는 곧 함이 없다(무소행無所行)’는 말로 자신을 비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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