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올 때마다 우리는 매번 뒤통수가 따갑거나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듯한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소탕하고 살해하고 처치하는 인간들의 현란한 스펙타클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막상 ‘괴물의 입장’을 듣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괴물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어딘가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았던가.
영화 『슈렉』의 급진성은 바로 언제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조연급 배우 ‘괴물’을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의 대상인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괴물의 관점에서, 괴물의 마음으로, 괴물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기회를 맛보게 된 것이다. 아브젝트의 시점에서, 아브젝트의 삶과 사랑과 꿈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크리스테바의 철학적 기획과 『슈렉』의 급진성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만약 『슈렉』의 결말이 ‘못생긴 피오나 공주’가 슈렉의 키스를 받아 ‘어여쁜 피오나 공주’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미녀와 야수』에서 남녀의 위치만을 바꾼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슈렉』은 상대방의 야수성과 야생성을 반드시 교정해야만 획득되는 문명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야수인 채로, 그가 ‘늪의 괴물’인 채로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슈렉』의 또 다른 미덕은 버려진 존재들, 짓밟히고 배제된 ‘아브젝트’의 이야기를 굳이 오싹한 공포물이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물로 만들지 않고 유쾌하고 산뜻한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슈렉』에서 슈렉과 피오나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바로 동키와 핑크 드래곤이다. 처음에는 거대한 핑크 드래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의 ‘여성성’을 이용했던 동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핑크 드래곤의 구애를 피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도움을 받아 슈렉과 피오나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진정한 여성성을 발견해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여자 생쥐와 남자 사자 사이의 슬픈 로맨스처럼,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슈렉』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생물학적 차이마저 유쾌하게 넘어버린다. 『슈렉 3』에서 핑크 드래곤과 동키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하이브리드’들은 우울한 결핍 혹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핑계로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너와 나의 차이가 인종의 차이든, 계급의 차이든, 더 나아가 ‘생물학적 종(種)의 차이’일지라도, 우리의 사랑이 그 차이를 끌어안을 만큼 크고 따스한 것이라면, 그 사랑의 결과물은 저토록 귀여운 ‘하이브리드’ 후손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