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랑은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결점이 눈에 띌수록, 더욱 완전해지는 신비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위험과 불안과 공포까지 마침내 끌어안을 수 있는 감성의 스케일이 아닐까.
모든 장애물은 ‘잠시’ 활동을 멈추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두 연인의 키스 타임이 시작된다. 마법이 풀리는 방식은 단지 괴물이 미남미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모습이 되는 것 또한 마법이 풀리는 ‘또 하나의 길’이니까. 두 사람의 키스가 끝나고 피오나가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에 공중부양까지 당한 이후에도 피오나는 ‘낮의 미모’를 회복하지 못한다. 뭔가 내 안의 응어리가 한바탕 시원하게 씻겨나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한데,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다. 이럴 수가. 슈렉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마법이 풀리지 않은 것일까.
슈렉: 사랑해요, 피오나.
피오나: 슈렉, 나도 사랑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네요.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는데, 난 왜 이렇죠?
슈렉: 당신은 이미 아름다워요.
우리가 버린 아브젝트를 우리 안의 창조적 혼돈으로 바꾸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적 힘, 바로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영원히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이거나 나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네가 나를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불안감, 나의 선천적인 결핍이 너의 밝은 미래에 어둠을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런 것들은 사랑의 ‘아브젝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브젝트를 끌어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고수들이 지향하는 ‘커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서로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게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키처럼, 슈렉처럼, 피오나처럼, 그 어떤 결핍이나 단점도 끝내 ‘사랑의 구실’로 변신시키는 연애의 기술을 배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품은 불안과 우울,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상상력의 에너지원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너의 결점이 유난히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도 더욱 완전해지는 즐거운 신비다.
나는 여성을 회복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보는 관점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원하는 미국의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동력인 이 영원한 주변성으로 시작하여 긍정적인 개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성이란, 달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태양의 반대라는 점에서 바로 이 달의 형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성을 더 많이 소유할지는 몰라도, 남성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해시킬 수 없는 이 부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마도 항상 헤겔이 말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달’로서의 여성은〕 공동체가 폐쇄적이지 않도록 하고, 동질적이고 그래서 억압적이지 않도록 하는 불침번일 수 있다. 즉, 나는 여성의 역할을 일종의 불침번, 이질성, 그래서 항상 감시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줄리아 크레스테바 인터뷰』(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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