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관직을 버린 도연명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吏曰: “應束帶見之.” 潛歎曰: “我豈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卽日解印綬去.
賦「歸去來辭」, 著「五柳先生傳」, 徵不就. 自以先世爲晉臣, 自宋高祖王業漸隆, 不復肯仕. 至是終世, 號靖節先生.
해석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송나라 문제(文帝) 때에 진(晉)의 징사(徵士)【나라의 부름을 받은 학덕이 높은 선비를 일컫는다. 동진(東晉)에 저작좌랑(著作佐郞)의 관직으로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인 도잠이 죽었다.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도잠의 자(字)는 연명(淵明)으로 심양(潯陽) 사람인데 도간(陶侃)의 증손이다.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젊어서 고상한 의취가 있어 일찍이 팽택(彭澤)의 현령이 된 지 80일에 군의 독우(督郵)가 왔다.
吏曰: “應束帶見之.”
관리가 “응당 의관을 차려입고 그를 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潛歎曰: “我豈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卽日解印綬去.
도잠이 탄식하며 “내가 어찌 다섯 말의 쌀【오두미(五斗米): 『진서(晉書)』에 광록대부(光祿大夫)의 하루 봉록이 곡식 석 섬으로 나와 있다. 현령의 녹봉이 하루 다섯말이면 적당한 봉록이다.】을 위해서 허리를 굽혀 시골 어린놈을 향하랴.”라고 하며 곧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떠났다.
「귀거래사」를 짓고 「오류선생전」을 짓고서 불러도 나가질 않았다.
自以先世爲晉臣, 自宋高祖王業漸隆, 不復肯仕.
스스로 선조들을 진(晉)나라 신하로 여겼고 송(宋高)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왕업이 점점 융성해져 다시는 벼슬하길 즐거워하질 않았다.
至是終世, 號靖節先生.
세상을 끝마칠 때에 이르러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불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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