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판 펼치기
과심(誇心)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은 과심(誇心)이 극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도량(度量)을 보기로 하자. 이 역시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를 만한 대단한 배포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사람들 간의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아, 왜들 그래”하면서 어깨 한 번 툭 쳐줄 수 있는 모습, “자, 자, 우리 술이나 한잔 하러 갑시다”라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모습, 그런 게 바로 도량(度量)이다. 사실 이 정도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꽤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정도를 ‘절세의 도량(度量)’이라고 부르는가? 보통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기 힘든 살벌한 상황, 폭발 직전의 상황에서도, 도량(度量)의 경지에 도달한 소양인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절세의 도량(度量)’이다.
갈등은 논리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 제3자가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말로 설득하면 어느 정도는 가라앉힐 수 있다. 잘 흥분하지 않는 소음인이 갈등 해결을 해내는 것이 그런 이유다. 동무(東武)가 ‘소음인은 아무리 어리석어도 사람을 어루만질 줄 안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나 소음인의 논리만으로는 안 되는, 소양인의 ‘절세의 도량(度量)’이 필요한 단계가 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보통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이익의 충돌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의 충돌이다. 그런데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기준으로 하는 설명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충돌이 커지고 격해지는 이유는 감정의 충돌이다. 개인 대 개인의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거대한 집단끼리의 충돌이나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는 사소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충돌했다는 것이 창피하니까, 겉으로는 이익의 충돌이나 도덕관의 충돌인 것처럼 강조한다. 갈등이 시작되는 요인은 그게 맞겠지만, 갈등이 커지는 것은 서로 감정적 대응을 하며 마음이 상하기 때문이다.
일정 한도를 넘는 싸움은 감정싸움이다. 한 측면은 자존심 싸움이고, 또다른 측면은 불신감의 충돌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논리가 통하기 쉽지 않다. 논리가 아닌 도량(度量)이 앞에 나서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또 하나, 의견 충돌은 기본적인 기준에서 차이가 날 때 복잡해진다. 기준이 명확할 때는 누가 옳고 그른지가 쉽게 가려지니까,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드물다. 즉 서로 다른 보편을 가지고 있을 때가 어렵다는 것이다. 소음인은 하나의 보편을 기준으로 정확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데 장점을 가진다고 했다. 작은 갈등은 소음인만큼 명확하게 해결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두 집단이 보편이라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면, 소음인은 슬슬 헷갈린다. 더군다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간의 자존심 싸움이 되고 불신감이 심한 상태에서는, 논리를 가지고 각각의 서로 다른 보편을 합쳐서 새로운 보편을 만드는 작업은 기대하기 어렵다.
논리는 그 다음이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찾는 게 급해진다. 이건 정오(正誤)의 문제가 아니다. 호오(好惡)의 감각으로 찾아내야 한다. 누가 잘할까? 소양인이 잘한다.
자, 다시 정리해보자. 소양인이, 자신이 보편이라고 생각했던 주장이 안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처했다. 어설프게 소음인을 흉내 내어 비논리적인 근거를 대고, 강경한 단어를 쓰고, 권위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과심(誇心)의 함정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장점을 믿고 자신의 방식으로 노력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기준이 찾아진다.
결국 소양인의 도량(度量)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적절한 때에 리셋(reset) 단추를 누를 줄 아는 것’이다. 자기가 고집하던 것, 자기가 보편이라고 믿었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까지만 되면 그 뒤는 쉽다. 자연히 소양인 특유의 순발력이 살아나고, 예민한 감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새로운 기준을 찾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도량(度量)이다.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과감히 리셋 단추를 누를 줄 아는 경지를 우리말로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새 판 펼치기’라고 하면 어떨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