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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주희 - 외면에서 달빛을 찾으려는 노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주희 - 외면에서 달빛을 찾으려는 노력

건방진방랑자 2022. 3. 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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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에서 달빛을 찾으려는 노력

 

 

주희는 이 외향적 공부 방법을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라고 말합니다. 격물치지란 사물의 이치[]를 파악해서 내 마음의 앎을 완성하는공부를 의미하지요. 흔히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탐구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를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그에게는 나 자신과 무관한 외재적인 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희의 초월적 이는 인간이나 사물에게 동일한 상태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과정은 나와 관계 없는 외부 대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와 동일하게 공유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럼 격물치지 공부의 의미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주희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앎을 이루는 것[致知]이 사물을 연구함[格物]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은, 나의 앞을 이루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사람 마음의 영특함에는 앎이 없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사물에는 이치가 없을 수가 없다. 단지 이치에 대해 아직 연구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앎에도 다 실현되지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 근거하여 연구해서 지극한 곳에 이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하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비약적으로 이치를 깨닫게 될 것[豁然貫通]이니, 그렇게 되면 만물들의 겉과 내면[表裏]’, ‘정밀한 것거친 것[精粗]’을 모두 파악하게 되고, 동시에 우리 마음의 완전한 본래 모습[全體]’커다란 작용[大用]’도 모두 밝혀지게 될 것이다. 대학장구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 莫不有知; 而天下之物, 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소위치지재격물자, 언욕치오지지, 재즉물이궁기리야. 개인심지령, 막불유지; 이천하지물, 막불유리. 유어리유미궁, 고기지유부진야. 시이대학시교, 필사학자, 즉범천하지물, 막불인기이지지리이익궁지, 이구지호기극. 지어용력지구이일단활연관통언, 즉중물지표리정조, 무불도; 이오심지전체대용, 무불명의.

 

 

만약 격물치지 공부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방법이라면, 어떻게 사물의 이()를 파악한 것으로 내 마음의 본래 모습이 모두 밝혀질 수 있겠습니까? 주희의 말대로 사물의 이에 대한 연구가 내 마음의 본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사물의 이와 내 마음의 본성이 같아야만 합니다. 주희가 말한 마음의 완전한 본래 모습()’이란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물 속의 내면[]과 정밀한 것[]이란 만물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이를 말하지요. 주희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다 보면 어느 날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활연관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물에 내재한 이를 연구해나가면 어느 날 모든 사물을 초월해 있는 이 자체를 파악하게 되는 비약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지금이 달 밝은 밤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이때 달은 볼 수 없고, 단지 여러 모양의 물그릇들에 비친 달그림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둥근 물그릇 안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기로 하지요. 이 경우, 우리는 달그림자가 마치 둥근 물그릇에만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네모난 물그릇을 들여다보지요. 여기에도 환하게 달그림자가 비추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달그림자가 네모난 물그릇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요. 이렇게 계속 여러 모양의 물그릇들 속에 비친 달그림자들을 보다 보면, 문득 모두가 밝은 달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달그림자가 물그릇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 위의 달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말한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험이지요. 이때 하늘 위의 달은 내가 보고 있는 물그릇에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비추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물에 비친 달과 내 마음속에 비친 달은 결국 똑같이 하늘 위의 달이기 때문이지요. 주희는 이런 시선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다 보면, 어느덧 내 자신의 마음속 본성과 그 본성의 작용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이 주희가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통해 의도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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