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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이황과 이이 -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이의 방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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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이황과 이이 -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이의 방법

건방진방랑자 2022. 3. 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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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로 살아가는 이이의 방법

 

 

조선시대 모든 사대부의 현실적인 꿈은 과거 급제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겉으로는 안빈낙도(安貧樂道)했던 공자의 수제자 안연을 흠모한다며 읊조리고 다녔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해서나 부모와 가문을 위해서도 반드시 수행해야 할 사대부의 의무였습니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대부가 한번도 합격하기 힘들다는 과거시험에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합격이 아니라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도장원공이란 아홉 번이나 장원에 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국가에서 시행하는 모든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매스컴을 탔을 법한 인물이었던 셈이지요. 그 청년이 바로 퇴계 이황과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쌍벽을 이룬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입니다.

 

이이의 학문적 조숙함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지요. 그녀는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원조가 아닐는지요. 그만큼 그녀는 혹독하게 어린 아들을 훈육했습니다. 율곡 이이가 어린 나이에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이 본인의 탁월한 능력도 한몫했겠지만 말입니다. 심리적으로 그가 어머니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의존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6세가 되던 해 그의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이의 슬픔과 절망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삼년상을 치른 뒤 19세에 금강산 어느 사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청년 시절 이이가 아직도 어머니의 품에서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어머니라는 절대적 준거가 사라지자, 이이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화려했던 과거 합격 경력이 이이 본인을 위한 희망이었다기보다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영민한 아들의 효심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금강산에서의 생활은 청년 이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1년 반이 지난 뒤 완전한 유학자로 다시 태어나 금강산을 내려오며, 그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이념을 가슴에 아로새겼습니다.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면서 신유학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졌던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신유학 이념으로 권력을 길들이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이는 정도전(鄭道傳)의 개혁정신을 다시 회복한 유학자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중앙 정계에 있을 때, 이이는 아홉 번이나 대사간(大司諫)이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대사간은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을 말합니다. 대사간으로서 그는 군주의 실정을 따지고 관료들의 실책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이()에 맞게 조절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지방 관료로 있을 때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한 적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지방의 관료들과 백성들을 신유학의 이념으로 무장시키려는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요. 이런 현실 개혁적인 입장에서 그는 신유학의 사유를 가다듬었고, ()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신유학을 숙고했습니다. ()가 이념의 범주라면, ()는 현실의 범주였으니까요. 그의 현실주의적 신유학 사상은 율곡전서(栗谷全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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