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과 이이(李珥)
주자학을 심화시킨 철학적 논쟁들
조선은 주희를 따르던 유학자들이 세운 왕조였다. 따라서 이 땅의 유학자들에게 중국인 주희의 사상은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필수적인 학문이었다. 복잡하고 방대한 주희의 사상을 정리하느라 그들은 자신의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주희의 생각을 따라잡게 되자, 조선 유학자들은 도설(圖說)이라는 형식의 글을 만들게 되었다. 말 그대로 간단한 도식과 설명으로 주희의 가르침을 요약하려고 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이황은 주희의 가르침을 열 장의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글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책이다. 아래의 사진은 그중 첫 번째 그림에 해당된다.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황의 방법
1392년,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합니다. 조선 개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이 바로 고려 말에 들여온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특히 주자학을 배웠던 사대부들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해두어야 할 유학자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인물이지요.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이념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었지요. 그는 우선 고려왕조의 이념적 토대였던 불교를 비판할 수 있는 신유학의 사상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1394년 완성된 『심기리편(心氣理篇)』과 1398년 완성된 『불씨잡변(佛氏雜辨)』입니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교를 마음[心], 도교를 기[氣] 그리고 신유학을 이(理)에 배분하여, 신유학의 타당성을 논증했습니다. 반면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철저하게 불교를 부정하고 신유학을 긍정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입니다. 이런 이론적 작업과 함께 정도전은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이념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1394년에 편찬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그리고 1395년 완성된 『경제문감(經濟文鑑)』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이 두 권의 책으로 유교 이념에 부합한 사회 제도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지요.
거의 모든 면에서 조선의 반석을 놓았던 유학자 정도전은 훗날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으로 등극하는 이방원(李芳遠)에게 무참하게 살해됩니다. 유학자 정도전의 죽음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학과 권력 사이의 알력 관계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왕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이(理)의 지배 아래 두려 했던 신유학의 정신, 그리고 이(理)마저도 자기 밑에 두려는 현실 권력, 양자 사이의 충돌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도전이 죽은 지 100여 년 뒤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이런 갈등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영위한 유학자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도전 이래 수많은 유학자들이 권력에 의해 도륙당했던 사화(士禍)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황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가 일어났고, 그의 나이 4세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났으며, 19세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가, 45세에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났지요. 결국 퇴계 이황 당시, 신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황은 가급적 정치를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속내가 ‘퇴계(退溪)’라는 호에 담겨 있습니다. 즉 ‘퇴계’는 글자 그대로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것은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현실 정치에서 어느 정도 발을 빼려는 그의 의중을 반영한 것입니다. 결국 조선왕조 초기에 정도전이 가슴에 품었던 이념과 현실 가운데 퇴계는 이념의 측면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신유학의 이념, 즉 신유학의 체계를 숙고하고 정리하여 후학들을 키워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정치에 다시 나아가 권력의 경솔함과 무자비함을 길들이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달리 생각해보면, 이 점에서 이황도 매우 정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생전에 주로 주희의 철학을 공부하고 정리하는 순수한 이론가로서 자신의 생애를 영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갑니다. 그러던 1559년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이황보다 스물여섯 살이 적은 당시 33세의 젊은 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1572)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대승이나 이황은 이 편지가 앞으로 8년 동안 지속될 논쟁의 서막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젊은 유학자와 노년의 유학자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지금은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고 부릅니다. 기대승과 이황 사이의 논쟁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서신들은 각각 『고봉집(高峯集)』과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이의 방법
조선시대 모든 사대부의 현실적인 꿈은 과거 급제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겉으로는 안빈낙도(安貧樂道)했던 공자의 수제자 안연을 흠모한다며 읊조리고 다녔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해서나 부모와 가문을 위해서도 반드시 수행해야 할 사대부의 의무였습니다. 이 점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대부가 한번도 합격하기 힘들다는 과거시험에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합격이 아니라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도장원공’이란 ‘아홉 번이나 장원에 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국가에서 시행하는 모든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매스컴을 탔을 법한 인물이었던 셈이지요. 그 청년이 바로 퇴계 이황과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쌍벽을 이룬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입니다.
이이의 학문적 조숙함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지요. 그녀는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원조가 아닐는지요. 그만큼 그녀는 혹독하게 어린 아들을 훈육했습니다. 율곡 이이가 어린 나이에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이 본인의 탁월한 능력도 한몫했겠지만 말입니다. 심리적으로 그가 어머니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의존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6세가 되던 해 그의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이의 슬픔과 절망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삼년상을 치른 뒤 19세에 금강산 어느 사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청년 시절 이이가 아직도 어머니의 품에서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어머니라는 절대적 준거가 사라지자, 이이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화려했던 과거 합격 경력이 이이 본인을 위한 희망이었다기보다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영민한 아들의 효심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금강산에서의 생활은 청년 이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1년 반이 지난 뒤 완전한 유학자로 다시 태어나 금강산을 내려오며, 그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이념을 가슴에 아로새겼습니다.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면서 신유학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졌던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신유학 이념으로 권력을 길들이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이는 정도전(鄭道傳)의 개혁정신을 다시 회복한 유학자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중앙 정계에 있을 때, 이이는 아홉 번이나 대사간(大司諫)이라는 직책을 맡습니다. 대사간은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을 말합니다. 대사간으로서 그는 군주의 실정을 따지고 관료들의 실책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한마디로 권력을 이(理)에 맞게 조절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지방 관료로 있을 때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한 적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지방의 관료들과 백성들을 신유학의 이념으로 무장시키려는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요. 이런 현실 개혁적인 입장에서 그는 신유학의 사유를 가다듬었고, 기(氣)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신유학을 숙고했습니다. 이(理)가 이념의 범주라면, 기(氣)는 현실의 범주였으니까요. 그의 현실주의적 신유학 사상은 『율곡전서(栗谷全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황에게 날아든 한 통의 서신
어느 날 옆집에서 살고 있던 유학자 정지운(鄭之雲)이 이황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만든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이황에게 보여주고, 그림과 그림에 붙인 설명이 옳은지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지요. 『천명도설』을 살펴보다가 이황은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드러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드러난 것이다’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무심결에 이황은 이 구절을 ‘사단은 이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난 것이다’라고 고쳐주었습니다. 약간 어렵고 복잡한 논의이지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사단’과 ‘칠정’이란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단’은 이미 맹자의 유학 사상을 다룰 때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는 네 가지 선한 마음이나 감정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반면 ‘칠정’이란 개념은 『예기(禮記)』에서 최초로 등장한 용어입니다. 이것은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그리고 욕망「欲] 등 인간의 현실적인 일곱 가지 마음이나 감정을 의미합니다. 기억력이 좋은 독자들은 아마 정이의 「안자소호하학론」이 떠오를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칠정’이라는 표현이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정이가 말한 칠정과 『예기』에 등장하는 칠정에는 약간 차이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이는 『예기』의 ‘두려움[懼]’이라는 감정 대신 ‘즐거움[樂]’이라는 감정을 칠정에 포함시키고 있지요. 그렇다고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단과 칠정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개념이 우리 인간에게 두 가 지 경향의 마음이나 감정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맹자의 말대로 사단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드러난 윤리적인 감정입니다. 반면 칠정은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드러나는 일반적인 현실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지운이 작성한 『천명도설』이 흥미로운 이유는,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정지운은 사단이라는 윤리적 감정이 이(理)에서 드러난 것이고 칠정이라는 현실적 감정은 기(氣)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정지운은 사단이나 칠정이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이미 이와 기라는 두 가지 계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운데 사단은 이와 칠정은 기와 우선적인 관련성을 갖는다고 본 것이지요.
어쨌든 정지운을 만난 뒤 이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갑니다. 자신이 제안했던 구절이 한양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말이지요. 이황이 안동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양은 그의 ‘사단칠정론’ 때문에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한양의 유학자들이 이황의 입장에 대해 찬반으로 갈라져 열띤 논쟁을 벌였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6년 뒤, 그러니까 1559년 안동에 머물고 있던 이황의 손에 한 통의 편지가 전해집니다. 그 편지는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기양양하기 이를 데 없던 젊은 유학자 기대승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본성이 드러날 때 기가 잘못 작용하지 않으면 본연의 선이 곧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입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천리가 드러난 것이지만, 칠정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단은 바로 칠정 중 ‘드러나서 절도에 맞는 것’의 핵심일 뿐입니다. 『고봉집』(2권) 「고봉상퇴계사단칠정설(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
蓋性之乍發, 氣不用事, 本然之善, 得以直遂者, 正孟子所謂四端者也. 此固純是天理所發, 然非能出於七情之外也. 乃七情中, 發而中節者之苗脈也.
개성지사발, 기불용사, 본연지선, 득이직수자, 정맹자소위사단자야. 차고순시천리소발, 연비능출어칠정지외야. 내칠정중, 발이중절지묘맥야.
편지에서 기대승은 사단에도 본성, 즉 이(理)의 계기와 기(氣)의 계기가 함께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단이란 순수하게 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이황의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은 기대승이 주희의 이기론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나온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는 이와 기라는 두 가지 계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희의 생각이었으니까요. 기대승이 사단의 마음을 이와 기로 동시에 설명해야 한다고 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물론 기대승도 사단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이의 직접적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올바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사단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기의 작용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기대승의 근본적인 입장입니다. 나아가 그는 사단은 칠정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황의 생각처럼 사단과 칠정이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절도에 맞는 칠정을 사단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칠정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단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도덕적 마음으로서의 사단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반적 감정으로서의 칠정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 |
이황(李滉) | 기대승(奇大升) |
사단은 理가 드러난 것 | 사단에도 理와 氣의 계기가 공존함 |
四端과 七情은 별개 | 七情 속에 四端이 있음 |
七情 중 절도에 맞는 게 四端 |
절도에 맞게 드러난 감정이 사단이다
또 기대승은 사단이 그 자체로 보면 선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절도에 맞지 않는 부정적인 사단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감정[情]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면, 사단이 드러날 때에도 절도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다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 사람을 살펴보면, 간혹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시비를 따져서는 안 될 것에 대해 시비를 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봉집(2권)』 「고봉상퇴계사단칠정설(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
若泛就情上細論之, 則四端之發, 亦有不中節者, 固不可皆謂之善也. 有如尋常人, 或有羞惡其所不當羞惡者, 亦有是非其所不當是非者.
약범취정상세론지, 즉사단지발, 역유불중절자, 고불가개위지선야. 유여심상인, 혹유수오기소부당수오자, 역유시비기소부당시비자.
기대승은 사단 가운데 두 가지 마음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과 어떤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인 ‘시비지심’이 바로 그것이지요. 분명 수오지심과 시비지심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 선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대승은 이런 경우의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이 과연 선한 것인지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상황의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은 결코 선한 마음이 아닙니다. 결국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단 그 자체라기보다는, 감정이 상황에 따라 절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여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런 관점 때문에 기대승은, 칠정의 감정들 가운데 절도에 맞게 드러난 감정을 사단이라고 말한 것이지, 그 외에 도덕적 마음으로서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황, 윤리적 감정과 현실적 감정의 차이를 사유하다
이황은 사단의 순수성을 확신했던 유학자입니다. 그 순수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사단은 이(理)가 드러난 것’이라고 역설했던 것이지요. 그런 이황에게 기대승의 편지는 도발적인 도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기대승은 자신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아래인 젊은 유학자이지 않습니까?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학의 정신으로 보면, 이황은 기대승을 선배 유학자를 가르치려드는 오만한 학자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황은 기대승이 젊다는 이유로 그의 반박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기대승의 도전을 자신의 학문적 성숙을 가능하게 해준 행운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황의 반론을 한번 들어볼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어디로부터 드러나는 것입니까? 인의예지의 본성으로부터 드러납니다. 희로애구애오욕은 어디로부터 드러나는 것입니까? 외부 사물이 육체에 감촉하니 마음에서 움직여 대상에 따라 드러나는 것입니다. (..) 사단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 칠정은 아직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 이렇게 보면 두 가지가 비록 모두 이(理)와 기(氣)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기원하는 바에 따라 각각 핵심이 되는 것과 중시해야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이것은 이(理)고 이것은 기(氣)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16권) 「답기명언론사단칠정제일서(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一書)」
惻隱羞惡辭讓是非 何從而發乎 發於仁義禮智之性焉爾 喜怒哀懼愛惡欲 何從而發乎 外物觸其形而動於中 緣境而出焉爾 (..) 四端皆善也 (..) 七情善惡未定也 (..) 由是觀之 二者雖曰皆不外乎理氣 而因其所從來 各指其所主與所重而言之 則謂之某爲理 某爲氣 何不可之有乎
측은수오사양시비 하종이발호 발어인의예지지성언이 희노애구애오욕 하종이발호 외물촉기형이동어중 연경이출언이 (..) 사단개선야 (..) 정선악미정야 (..) 유시관지 이자수왈개불외호이기 이인기소종래 각지기소주여소중이언지 즉위지모위리 모위기 하불가지유호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필두로 하는 선한 마음, 즉 사단은 인의예지의 본성으로부터 드러나는 것이고, 반면 즐거움과 노여움을 대표로 하는 현실적 마음들은 반드시 육체를 거쳐서 드러난다는 입장이지요. 이황은 어디서 이런 주장을 끌어왔을까요? 그는 정이가 「안자소호하학론」에서 피력했던 본성과 감정에 대한 논의를 전거(典據)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기대승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의 이론을 차분하게 정리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황은 기대승이 지적했던 문제점을 일정 정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기대승은 사단이나 칠정에 모두 이(理)와 기(氣)가 공존하고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피력했지요. 사실 기대승의 지적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희를 존경했던 이황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기에서 그는 하나의 타협안을 기대승에게 제안합니다. 사단에는 분명 이와 기가 존재하지만, 선한 감정인 사단에는 이가 더 강력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칠정에도 이와 기가 함께 존재하지만, 선과 악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감정인 칠정에서는 기가 더 강력한 작용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황은 자신의 예전 주장은, 사단과 칠정에서보다 중요한 측면만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해명합니다. 결국 그의 결론은, 사단은 이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난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문제가 될 것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경우 핵심적인 것을 가리켜 말했을 뿐이니까요. 오히려 이황은 개념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기대승의 경솔함을 은근히 나무라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서신 왕래에도 애초의 입장을 유지하다
그러나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까요. 논쟁이 심화되자 이황은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개념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이황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이론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럼, 이황이 8년 동안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정리한 ‘사단칠정론’의 핵심 부분을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사단이 외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진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입니다. (…) 대개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른다는 것은 이를 주로 하여 말했을 뿐, 기 밖에 따로 있는 이를 말한 것이 아니니, 사단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은 기를 주로 하여 말했을 뿐, 이 밖에 따로 있는 기를 말한 것이 아니니, 칠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퇴계선생문집』(16권) 「답기명언론사단칠정제이서(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四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耳 (…) 大抵有理發而氣隨之者 則可主理而言耳 非謂理外於氣 四端是也 有氣發而理乘之者 則可主氣而言耳 非謂氣外於理 七情是也
사단감물이동 고불이어칠정 단사즉이발이기수지 칠즉기발이이승지이 (…) 대저유리발이기수지자 즉가주리이언이 비위리외어기 사단시야 유기발이이승지자 즉가주기이언이 비위기외어리 칠정시야
이황은 사단이나 칠정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인간이 외부 사물에 감응했을 때 마음에서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즐거움’을 예로 들어볼까요?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 선한 감정이 발생합니다. 또 좋아하는 그림을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즐거움이라는 현실적인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모두 동일한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두 감정 모두 외부 사물이나 사태에 직면해야만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지 못하거나 좋아하는 그림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황은 외부 사태에 반응하여 감정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황은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의 순수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理)의 순수성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황이 기대승의 타당한 주장, 다시 말해 인간의 감정에는 이(理)와 기(氣)의 계기가 모두 공존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사단과 칠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미묘한 주장입니다.
“사단은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입니다.”
이황이 사단이나 칠정 모두 이와 기라는 두 가지 범주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다면 이황의 입장이 일부 변경된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까닭은 그가 사단은 이가 드러나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기존의 이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해둘 것이 있습니다. 이황이 생각했던 이기론(理氣論)에는 이미 모종의 가치평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황이 기(氣)라는 개념을 상당히 폄하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지요. 그는 사단은 이(理)가 먼저 드러나고 기(氣)가 그것을 따르는 경우라 말하고, 반면 칠정은 기(氣)가 먼저 드러나고 이(理)가 그것을 올라타는 경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따르다[隨]’는 표현과 ‘타다[乘]’는 표현에 주목해보세요. 두 표현에서 모두 이가 주인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기는 마치 몸종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령 이가 드러나는 경우 기는 이를 따라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와 반대로, 기가 드러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는 기를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황은 이가 올라탄다[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표현을 사용했지요. 결국 기대승과의 서신 왕래를 하면서도 이황은 자신의 애초 입장을 나름대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희의 이기론을 그대로 따른 이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이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이 이(理)가 드러난 경우라면 칠정은 기(氣)가 드러난 경우라고 보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가 드러난다는 말은 우리 내면에 있는 이가 외부 사물을 만났을 때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라는 것이 마치 기처럼 그렇게 작동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을 던지는 이유는 주희에게서 이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를 다시 떠올려보도록 하지요. 강물은 요동치며 작용합니다. 그에 따라 강에 비친 달그림자도 요동치게 되겠지요. 이런 경우 달그림자 자체가 움직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요동치는 강물이 기를 상징한다면,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이이가 기대승을 편들며 이황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황이 기본적으로 주희의 이기론의 구조를 오해했다고 본 것이지요. 만약 이기론에 대한 입장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단이나 칠정에 관한 논의는 전혀 합의되기 어려울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검토하면서 우선 주희의 이기론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합니다.
대개 형체도 있고 작용도 있으며 움직임과 멈춤이 있는 것은 기(氣)이다.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지만 움직이거나 멈춘 것 속에 내재하는 것이 이(理)이다. 이가 비록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지만 기는 이가 아니면 움직일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지만 형체가 있고 작용도 있는 것을 다스리는 것이 이이고, 형체도 있고 작용도 있지만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것을 담는 그릇이 기이다.”
그러므로 본성은 이이고 마음은 기이며 감정[情]은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12권) 「답안응휴제일서(答安應休第一書)」
大抵有形有爲而有動有靜者 氣也 無形無爲而在動在靜者 理也 理雖無形無爲 而氣非理則無所本 故曰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者 理也 有形有爲而爲無形無爲之器者 氣也 是故 性 理也 心 氣也 情 是心之動也
대저유형유위이유동유정자 기야 무형무위이재동재정자 리야 리수무형무위 이기비리즉무소본 고왈무형무위이위유형유위지주자 리야 유형유위이위무형무위지기자 기야 시고 성 리야 심 기야 정 시심지동야
이이의 이기론은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설명되는 주희의 이기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理)가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지만 모든 개체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기(氣)는 형체도 가지고 있고 작용도 가지고 있어서 모든 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능동적인 힘을 가진 것이지요. 비록 이가 아무런 형체도, 작용도 갖지 못했지만 기를 다스리고 통솔합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가 없다면 기가 바탕으로 삼을 근본이 없어진다고 말한 것이지요. 한편 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를 담는 그릇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이의 평가처럼 만약 형체도 없는 이가 기를 다스린다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이의 어떤 영향력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런 작용도 없이 기 안에 내재되어 있을 뿐인 이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러한 이가 정말 기를 존재하게 하는 근본 바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주희는 인간 안에 깃든 이를 명덕(明德)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밝은 덕’으로서의 명덕은 스스로 환히 비추는 능력을 갖고 있지요. 따라서 이 덕의 밝음이라는 힘은 결과적으로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생성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의문들 속에서 이황의 경우처럼, 이가 스스로 드러나 작동한다고 보는 관점 또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드러난 측은지심은 기에 속한다
앞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이이는 본성, 마음 그리고 감정이 이(理)에 속하는지, 아니면 기(氣)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도 숙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성(性)은 형체도 없고 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속하지요. 반면 마음[心]과 감정[情]은 뚜렷한 형체는 없더라도 작용을 하기 때문에 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구분한다면, 이이의 생각대로 마음과 감정의 작용은 모두 기에 속하게 되고, 본성 자체는 이에 속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이가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퇴계 선생은) ‘사단은 이(理)가 드러나서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드러나서 이(理)가 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탄다는 말은 옳지만, 단지 칠정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단 또한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타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본 이후에야 측은지심이 드러나는 것입니까? 어린아이를 보고 측은해지는 것은 바로 기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근본은 인(仁)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가 탄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의 마음만 이런 것이 아니라, 천지의 모든 변화도 모두 기가 변화해서 이가 타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율곡전서』(10권) 「답성호원(答成浩原)」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 所謂氣發而理乘之者 可也 非特七情爲然 四端亦是氣發而理乘之也 何則 見孺子入井 然後乃發惻隱之心 見之而惻隱者 氣也 此所謂氣發也 惻隱之本則仁也 此所謂理乘之也 非特人心爲然 天地之化 無非氣化而理乘之也
사단 리발이기수지 칠정 기발이리승지 소위기발이리승지자 가야 비특칠정위연 사단역시기발이리승지야 하칙 견유자입정 연후내발측은지심 견지이측은자 기야 차소위기발야 측은지본즉인야 차소위리승지야 비특인심위연 천지지화 무비기화이리승지야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따르면, 사단은 이가 드러나서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이는 ‘이가 드러나서 기가 따른다’는 논리는 범주적으로 오류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는 드러나는 작용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이황의 관점 가운데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탄다’는 논리만을 수용했습니다. 이것은 곧 사단이나 칠정 모두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탄다’는 논리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사단칠정론’과 관련된 이이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기대승의 관점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이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사례를 다시 분석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그것을 보고 있으면 자연히 측은지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는 것이나 측은지심이 드러나는 것 모두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이는 아이를 보는 것이나 측은해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 모두 기(氣)에 속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이렇게 측은지심이 드러나자마자 이(理)가 올라타게 되는데, 이이는 이것이 바로 인(仁)의 본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이이는 자신의 사단칠정론을 구성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탄다’는 논리를 사단과 칠정에 관철시킴으로써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때 사단이든 칠정이든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면 모두 기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단을 작동시킨 인의예지의 본성만이 이의 영역에 속하겠지요.
기대승을 편들며 이황을 비판한 이이
이렇게 이이는 사단을 칠정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감정에 포함시키고, 두 가지 모두 기로서의 마음의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단은 칠정을 포괄할 수 없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괄합니다. (…) 사단은 칠정이 완전한 것만 같지 않고, 칠정은 사단이 순수한 것만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저의 생각입니다. 『율곡전서』(10권) 「답성호원(答成浩原)」
四端不能兼七情 而七情則兼四端 (…) 四端不如七情之全 七情不如四端之粹 是則愚見也
사단불능겸칠정 이칠정즉겸사단 (…) 사단불여칠정지전 칠정불여사단지수 시즉우견야
사실 이이의 ‘사단칠정론’은 기대승의 입장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칠정 중 가장 순수한 것이 바로 사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이의 견해에 따르면, 칠정과 사단 그 자체는 모두 ‘기가 드러나서 이가 타고’ 있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결국 이 점은 사단의 경우뿐만 아니라, 칠정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현실적 감정의 경우에도 모두 나름대로 이(理)가 그 감정들 속에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황에게 이(理)라는 것은 기(氣)의 주인으로서 나름의 독자성과 활동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로 상징되는 현실의 정치세계를 벗어나도 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황의 사단칠정론은 현실 정치로부터 부단히 물러서려고 했던 그의 생각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황과 마찬가지로 이이도 주희의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을 따랐던 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라는 작용을 떠나서 이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이가 정치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이에게는 작용하고 있는 기의 세계를 떠나서 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이가 부단히 역동적인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지요.
이황과 이이의 후배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
앞에서 보았듯이, 젊은 유학자 기대승의 반발로 시작된 논쟁이 바로 ‘사단칠정논쟁’입니다. 이때 이황은 사단의 마음과 칠정의 마음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물론 사단의 마음이 다른 마음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이(理)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만 하겠지요. 바로 이 점을 젊은 유학자 기대승이 집요하게 문제 삼았습니다. 어떻게 기(氣)를 떠나서 이(理)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지요. 사실 주희에게 이는 작용하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것에 편재하는 순수한 이치였습니다. 이 점에서 기대승의 문제 제기는 범주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이도 기대승에 이어서 이황의 이런 입장을 여러 각도에서 비판합니다. 사단의 마음은 단지 칠정의 마음 중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만을 지칭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동시에 이와 기라는 두 범주에 지배된다는 입장입니다.
이황, 기대승 그리고 이이로 이어지는 논쟁을 통해 조선 유학은 주희 철학 체계의 핵심 주제인 이기(理氣)의 문제를 깊이 숙고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말기까지 지속된 또 하나의 논쟁이 조선 유학계에 조용히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또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불리는 논쟁입니다. ‘인물성동이논쟁’은, 이 논쟁이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쟁점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반면 ‘호락논쟁’은 논쟁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이름을 따와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했던 유학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에 살았는데, 이곳을 보통 ‘호서(湖西)’ 지역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던 유학자들은 주로 한양 부근에 살았는데, 당시 이곳을 ‘낙하(洛下)’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호락논쟁’이란 명칭은 ‘호서’의 ‘호(湖)’와 ‘낙하’의 ‘락(洛)’에서 따온 것입니다.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은 1712년 이간(李柬, 1677~1727)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논쟁에서 시작됩니다. 이 논쟁을 통해 조선 유학은 드디어 개체의 규정 문제에까지 이기론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논쟁이 가능했던 것은 주희의 형이상학 체계가 가진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희에게서 이(理)는 모든 개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통일성의 원리였습니다. 반면 기(氣)는 모든 개체의 개체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별의 원리였지요. 따라서 주희는 모든 개체가 이라는 차원에서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오직 기라는 차원에서만 구별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혹시 기억나는지요? 주희가 이와 기의 관계를 물과 그릇의 관계로 비유했던 것 말입니다. 사실 주희는 개체성과 개별성에 주목하기보다는 통일성에 주목했던 유학자입니다. 이 때문에 그를 형이상학자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만약 누군가 다양한 모양의 그릇에 사로잡혀 그 안에 담겨 있는 물을 둥근 물이나 네모난 물로 각각 규정하려 했다면 주희는 그를 심하게 질책했을지도 모릅니다.
주희의 입장에서 보면, 오직 기의 차원에서만 인간과 동물이 구별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을 담고 있는 둥근 그릇과 네모난 그릇처럼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똑같은 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원칙적으로는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동물의 본성과 같다는 이간의 주장은 주희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이간의 말을 들어볼까요?
이(理)가 비록 하나의 근원이라 할지라도 기(氣)는 고르지 못합니다. 음양오행 중 바르고 소통하는 것을 얻어서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서 동물이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추세입니다. (…) 사람과 동물 사이에 바르고 소통하는 기와 치우치고 막힌 기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만이 홀로 이를 완전히 얻었고 동물의 경우는 반은 얻고 반은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이런 이치의 오류에 대해서는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외암유고(巍巖遺稿)』 (4권) 「상수암선생별지(上遂巖先生別紙)」
盖理雖一原, 而氣則不齊. 得二五之正且通者爲人, 偏且塞者爲物, 亦自然之勢. (…) 謂有正偏通塞之不同則可. 謂有人獨盡得, 而物則半得半不得之說, 則其理得失, 姑未暇論.
개리수일원, 이기즉불제. 득이오지정차통자위인, 편차색자위물, 역자연지세. (…) 위유정편통색지불동즉가. 위유인독진득, 이물즉반득반부득지설, 즉기리득실, 고미가론.
지금 살펴본 이간의 주장은 주희의 존재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어진 개체들이 어떤 개별성을 보이든 간에 개체에 내재된 이(理)는 항상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네모난 그릇이든 둥근 그릇이든 거기에 담겨 있는 물은 항상 동일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희가 생각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형이상학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이황과 이이의 후배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지 않다
그러나 이간의 낙론(洛論)과는 달리, 한원진을 대표로 하는 호론(湖論) 계열 학자들은 개별자의 문제에 대해서 경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원진이 왜 이간의 의견에 반대하는지, 그의 말을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인의예지신이라는) 오상은 오행 중 빼어난 기(氣)의 이(理)입니다. 반드시 빼어난 기를 얻은 뒤에야 그 이를 비로소 오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빼어난 기를 얻지 못하면, 비록 이가 있다 해도 오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를 모두 얻었으므로 오상의 덕을 모두 갖추었으나, 동물은 혹여 하나의 빼어난 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오행의 빼어난 기를 다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호랑이나 이리의 인(仁)이나, 벌이나 개미의 의(義) 같은 것은 다섯 가지 덕 가운데 겨우 하나의 밝은 덕만을 가진 것이니, 그 나머지의 덕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남당집(南塘集)』(권10) 「답이공거임신팔월(答李公擧壬辰八月)」
五行秀氣之理也 必得其秀氣然後 其理方謂之五常 如不得秀氣 則雖未甞無其理 亦不可謂五常也 人則盡得五行之秀 故五常之德無不備 物則或得一氣之秀 而不能盡得其秀 故虎狼之仁 蜂蟻之義之類 僅存其一德之明 而其餘德則不能有也
오행수기지리야 필득기수기연후 기리방위지오상 여부득수기 즉수미상무기리 역불가위오상야 인즉진득오행지수 고오상지덕무불비 물즉혹득일기지수 이불능진득기수 고호랑지인 봉의지의지류 근존기일덕지명 이기여덕즉불능유야
한원진의 주장에서 눈에 띄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한원진이 이간에 비해 기(氣)의 개별화 작용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다시 말해, 그는 이(理)라는 동일성의 차원보다는 기(氣)라는 차이성의 원리에 더 주목했습니다. 이것은 경험 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관찰로부터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더 이상 한원진의 논의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 점은 조선 유학이 주희의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조금씩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아쉬운 점은, 호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주희의 근본적 도식 자체를 극복해 새로운 유학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미 일본은 이토 진사이나 오규 소라이 같은 고학파학자들이 등장해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사유를 넘어서려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조선의 신유학 내부의 이런 분열상이야말로 새로운 유학의 사유가 등장하게 될 토양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조선의 신유학은 정약용이라는 대가급 유학 사상가가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읽을 것들
1.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한국사상연구소 편집, 예문서원, 2001)
한국사상연구소가 편집한 이 책은 한국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문들을 선별하고 풀어내어 소개한 9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집입니다. 「한국의 성리학 사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책의 4부에는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전개되었던 ‘사단칠정논쟁’, 이이의 유학 사상, 나아가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등에 대한 원문과 그 번역문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해당 부분에 각 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간략한 해제가 함께 실려 있어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됩니다.
2. 『한국철학 에세이』(김교빈, 동녘, 2003)
이 책은 한국 철학을 대표하는 9인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제목 그대로 에세이 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9인의 사상가들 중 7인이 유학자라는 점에서 한국의 유학 사상에 대한 개론서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조금 아쉬운 점은 각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접근하다 보니, 사상가 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한 일화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유학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는 나름대로 훌륭한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3. 『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손영식, 울산대학교출판부, 2005)
저자 손영식은 중국에서 전개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운동의 전문가로, 국내에서는 몇 안 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에서 전개된 신유학 운동을 ‘철학 사학’이라는 시선에서 조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를 점철해온 사화와 당쟁의 내적인 논리를 조선 유학자들의 철학적 논리와 연결시켜 해석한 부분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지요. 큰 문제를 툭툭 던지는 것과 같은 강한 문체, 그리고 마치 강의안을 연상시키는 듯한 형식이 조선 유학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흥미를 제공해줍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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