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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셉츄아진트와 쿰란 텍스트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4장 콘스탄티누스의 공인까지 - 셉츄아진트와 쿰란 텍스트

건방진방랑자 2022. 2. 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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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츄아진트와 쿰란 텍스트

 

 

프톨레미 2(Ptolemy II, BC 285~246)는 유대인들에게 희랍어 성경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12지파에서 각기 6명씩 선출된 72명의 학자가 72일 동안 제각기 독립된 골방에 쑤셔박혀 번역했는데 나중에 맞추어보니 번역의 결과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유대인학자들은 그 실체성을 인정하고 있다. 각 부족에서 합의를 거쳐 공동의 노력으로 정밀하게 이루어진 번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BC 3세기~2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이 번역을 보통 셉츄아진트’(Septuagint), 우리말로는 칠십인역이라고 부른다. 셉츄아진트는 그 나름대로 마소라 텍스트와는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히브리경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많은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것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원본에서 번역되었고 어떤 것은 원본 없이 희랍어 자체로 구성되었다. 초기기독교인이 구약을 인용한다 하는 것은 히브리어 원전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셉츄아진트에서 인용하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의 정통후예임을 자랑하는(11:1)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구약도 히브리성경이 아닌 셉츄아진트에서 인용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셉츄아진트가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시대에 얼마나 유대이즘의 헬라화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방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셉츄아진트가 히브리어 원문에 없는 내용을 첨가하거나 원문의 내용을 생략했으며, 때로는 부주의하게 번역하거나 원문의 내용의 의미맥락을 바꾸어 교묘하게 왜곡시켰다는 주장이 본문비평과정에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쿰란문서의 발견은 이러한 주장을 뒤엎는 계기가 되었다. 쿰란문서 중에서 셉츄아진트 그 자체의 희랍어 초기사본(BC 2세기로 소급되는 문헌들)도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셉츄아진트 번역의 저본이 된 히브리어 텍스트도 많이 발견되었다. 여태까지는 셉츄아진트가 마소라 텍스트에 비교해서 6,000군데나 다르고, 이 다른 부분의 판정에 있어서 모두 셉츄아진트의 텍스트는 열등한 번역의 결과라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쿰란문서의 발견으로 셉츄아진트가 마소라 텍스트와는 다른 종류의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삼았다는 확증을 갖게 했으며, 이 책의 번역자들은 그 원문을 매우 신중하고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또한 그 번역자들이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번역방법의 원리를 적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셉츄아진트의 가치는 재평가되었다. (천시무엘, 사해사본과 쿰란공동체 160.)

 

알렉산드리아헬레니즘문명을 로마에 넘겨주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보존되고 성장한 유대이즘의 전혀 새로운 국면, 초기 기독교라는 싹을 로마문명의 주류로 만드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했다. 기독교는 유대이즘과 헬레니즘의 본질적 융합에서 생겨난 기화(奇花)이다. 아니,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헬레니즘의 토양에서 새롭게 피어난 유대이즘의 독특한 가치관체계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초대교회역사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초기기독교인에 대한 로마권력의 박해를 확대해석해왔다. 쿼바디스(Quo Vadis)류의 영화 몇 장면이 주는 인상으로 로마제국과 초기기독교 관계를 그릇되게 설정해왔다. 로마가 실제로 박해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해방이나 독립을 꾀하려는 운동이었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박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로마는 헬레니즘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아 다양한 신들의 종교문화를 수용하기를 즐겨했으며, 다양한 이방인들의 비교적(秘敎的) 종교전통을 포용했다. 예수는 일찍이 시이저(가이사)의 것은 시이저(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2:17, 22:21, 20:25)라고 말하여 자신의 영적 운동이 정치적인 맥락에서 떠나 있음을 명료하게 밝혔다. 다시 말해서 시이저가 지배하는 로마권력에 항거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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