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4.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
힌두이즘(Hinduisin)을 일본학자들은 인도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도인의 종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특정한 제도종교라고 부르기 어려운 인도인의 생활관습에 대한 일반명사인 것이다. 힌두이즘이 하나의 종교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브라흐마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성립하자 그 불교의 승가집단에 대하여 힌두이즘이라는 새로운 반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불교가 쇠퇴한 후 인도의 역사는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대결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도에 있어서 이슬람의 역사는 정복왕조의 역사와 일치한다. 이슬람 정복왕조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북쪽의 터키ㆍ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이야기 해야 한다. 가즈니의 마흐무드(Mahmud of Ghazni)는 아프가니스탄지역에 강력한 이슬람왕국을 세웠다. 이 왕국은 셀쥬크왕조를 거쳐 결국 구르왕조의 손에 떨어졌다. 구르왕조의 무하마드(Mohammed of Ghur)는 1191년 펀잡을 넘어 북인도를 침범한다. 그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다음 해 1192년 그의 노예였던 명장 꾸듭 웃딘(Qutb-ud-din)이 델리를 점령한다. 무하마드는 가즈니로 돌아가면서 꾸틉 웃딘을 델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무하마드의 사후 꾸틉 웃딘은 델리의 술탄이 되었고 이로써 인도에 최초의 이슬람왕조가 성립하였다(1206년).
이 최초의 이슬람왕조를 그 개조가 노예 출신이었기에 우리는 노예왕조(Slave Dynasty)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 델리 남쪽에 있는 이 꾸틉 미나르(Qutb Minar)는 1193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노예왕조의 전승기념탑이다. 이것은 20세기 간디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인도 역사의 비극의 출발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오늘의 인도의 모습을 탄생시킨 인도의 운명이기도 했다.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무색케 만드는 아름다운 탑이었다. 사암과 대리석의 조화로 이루어진 5층의 원탑인데 각층의 경계마다 발코니가 둘러쳐져 있다. 지면의 직경은 15m, 꼭대기 직경은 2.5m, 높이는 73m에 이르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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