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형상거부
“인류의 종교사에 있어서 대중문화ㆍ예술과 관련된 가장 큰 잇슈 중의 하나가 결국 신성(Divinity)을 어떻게 시각화(visual representations)하냐는 문제와 되어 있다고 봅니다. 신은 일체의 시각적 표상을 거부한다든가, 인간외적 물체의 상징으로만 나타난다든가,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표상 방법이 있겠는데, 아주 간단히 나누면 아이코닠 이미지(iconic image)와 언아이코닠 이미지(aniconic imagery)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코닉 이미지는 대체로 인간의 형상(anthropomorphic image)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아이콘(icon)이라 하면 대체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도의 베다제식전통에서는 신들에 대한 아이콘적인 형상이 허용되질 않았습니다. 브라흐만(Brahman) 사제들의 제식에 있어서도 제단과 주문ㆍ찬가만 있었을 뿐, 어떤 구체적 신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원시불교도 이러한 베다전통을 따라 이미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든 붓다의 형상화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도 본시 야훼의 형상화를 거부합니다. 모세도 호렙산 떨기에서 타지않는 불꽃만 보았을 뿐이었고, 야훼에게 ‘당신을 누구라 하오리까?’하고 물으니 ‘나는 곧 나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로다.’(I am who I am. 출3:14)라고 하고 그 구체적 형상화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지성소에는 일체의 형상이 허용되질 않습니다.
이러한 형상에 대한 극단적 거부를 표방하는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이란 말 자체가 유일절대신인 알라에게 복종함으로서 마음의 평화(살람)에 도달한다는 의미지요. 그리고 이 유일절대자는 초월신이며, 이 ‘초월’이라는 뜻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알라의 본질과 속성이 피조물과 유추될 수 있는 일체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입니다. 이 초월자ㆍ유일자ㆍ보편자ㆍ창조자ㆍ지배자ㆍ전지전능자인 절대자에 대하여서는 일체의 상대적 형상이 거부되는 것입니다. 모든 마스지드(모스크, 회교 사원)는 텅 비어있는 공간일 뿐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공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통 지나치게 이슬람을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과격한 종교로서 생각하는데, 사실 이슬람종교야말로 유일신관(monotheism)을 말하는 한에 있어서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정결하며 가장 정화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유일절대신인 알라만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나 무함마드나 모세나 붓다나 모든 종교의 개창자들을 예언자, 선지자로만 간주할 뿐이며, 알라가 보낸 사람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니까 아예 아리우스가 말하는 대로 예수에게도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성만을 인정하는 것이죠. 이슬람의 교리는 매우 정직하고 간결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양성을 포용하는 매우 관용적인 종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강령이라 말할 수 있는 6신(六信)에, 알라가 유일하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종족에게 내려진 경전들을 믿으며, 모든 종족에게 나타난 선지자들을 다 믿고 존중한다는 신조가 명기되어 있는 것입니다【이 ‘이슬람 육신(六信)’에 관하여서는 정수일 선생의 다음 글을 참고할 것: 깐수 정수일 박사의 이슬람문명산책, ‘종교와 세속생활의 지킴 이슬람교의 여섯 가지 믿음,’ 『신동아(서울 : 동아일보사, 2001년 11월호), pp.443~457. 이슬람의 전반적 이해를 위하여 나는 다음의 세 책을 참고하였다. 김용선, 『코란의 이해』, 서울 : 민음사, 1991. 金定慰, 『이슬람사상사』, 서울 : 민음사, 1991. Karen Armstrong, A History of God, New York : Ballantine Books, 1993. 이 중 암스트롱의 책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의 4천년의 역사를 추구한 책인데 이슬람부분의 해설이 편견없이 잘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론적 깊이가 있다.】. 유일신인 알라에 대한 일체의 형상화를 거부한다면 사실 이슬람적 해결은 다원주의적 포용성을 얼마든지 지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상에 대한 거부가 너무 강렬하다 보니까 이종교(異宗敎)의 성상주의(iconography)와 맞부닥치게 되면 그것을 파괴하는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즉 성상파괴주의, 우상파괴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이 바미얀대불(the great Buddha at Bamiyan)을 파괴한 것은 예술가적 심미성의 눈에서 볼 때에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본다면 아이콘은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신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아이코노클라즘의 소행은 이슬람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현상이지요.”
“마침 이슬람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우리 티벹에도 라사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작은 규모의 무슬림 콤뮤니티가 있습니다. 지난 4세기 동안에 걸쳐 카쉬미르(Kashmir)와 라다크(Ladakh)지역으로부터【카쉬미르(Kashmir)와 라다크(Ladakh)는 모두 인도 파키스탄의 국경분쟁으로 끊임없는 불안에 싸여있는 지역이다. 인ㆍ파 쌍방에서 그 영토권을 주장하지만, 현재 인도의 펀잡(Punjab), 히마찰 쁘라데쉬(Himachal Pradesh) 위쪽 최북상에 잠무 앤 카쉬미르(Jammu and Kashmir)라는 하나의 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카쉬미르계곡은 아주 풍족한 토양에 격절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곳이며 17세기 무갈의 황제 자한기르가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여름 별궁을 지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카쉬미르는 지금도 회교도 인구가 60%를 넘는다. 우리가 지금 입는 고급 모직 캐쉬미어는 본시 이 지역에서 생산되던 카쉬미르 숄(Kashmir shawl)이 16세기부터 유럽에 알려지면서 유명한 브랜드가 된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카쉬미르 숄은 본시 야생 염소의 털로서 만든 것이었다. 라다크(Ladakh)는 행정적으로는 잠무 앤 카쉬미르에 속해있지만 독립적 전통을 갖는 또 하나의 문명이다. 서 히말라야산맥과 티벹고원을 연결하는 고지대의 통로로서 지구상의 마지막 샹그릴라(the last Shangri-la)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14세기말에 쫑카파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이래로 티벹불교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그들은 대개 역도(traitors)로서 규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이들을 접촉하면서 세상에 이렇게도 경건하고 점잖고 순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가 할 정도로 교양있고(cultured) 평화로운(peaceful)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티벹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생활하며 티벹사람들과 싸우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불교도들과 결혼하고 인척관계를 맺으며 해피하게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알라신에게로의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 평화를 얻고 사는, 그러면서도 우상숭배적인 미신에 빠지지 않고 담박하게 살 줄 아는 이슬람 고유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티무슬림들 같아요.”
달라이라마는 정말 폭이 넓은 인류의 스승이었다. 그는 어느 종교든지 그 훌륭한 장점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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