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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대승운동의 출발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대승운동의 출발

건방진방랑자 2022. 3. 2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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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운동의 출발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좌부(Theravāda)와 대중부(Mahāsāṅghika)의 분열을 계기로, 대중부가 발전하여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역사적 정황을 전달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중부도 어디까지나 소승부파불교의 일파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이 곧 바로 대승불교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대승불교 운동에 대중부의 이론이 보다 깊은 영향은 주었을 것입니다. 결국 초기부파불교의 주축이 아라한을 지향하는 상주(常住)의 특수승려집단에 한정되었던 것이라면, 대승불교운동은 아쇼카시대에 극성했던 스투파신앙의 흥기에 따라 파생된 레이맨(layman) 즉 재가 신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중혁신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투파신앙이 일어나자, 역사적 싯달타의 진신의 일부가 담겨져 있다고 간주된 묘역으로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 탑() 주변으로 먼 지역으로부터 와서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이 며칠ㆍ몇 달을 머물 수밖에 없어 자연히 묘역에는 여행객들의 콤뮤니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투파는 본시 승가에서 관리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역의 종족사회에서 창출한 매우 개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이들 스투파 주변의 신도들을 향해 붓다의 본생담(자타카, Jātaka)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설화꾼들이 생겨났고, 이 설화꾼들은 전혀 기존의 승가에서 계율을 받은 승려가 아닌 자유로운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유식하고 유능하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붓다의 전생 이야기나 붓다 당대의 전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마치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자연히 그 주인공인 붓다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승려의 기능을 하는 새로운 지도자상으로 변모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달타 전생의 본생담주인공들을 보살’(Bodhisattva)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신 또한 보살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렇게 꾼으로 살다보니까 모종의 새로운 계율도 만들게 되고 또 새로운 승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의 출발입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는 개인의 자각의 불교로서보다는 대중의 신앙(śtraddhā)의 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또 아라한의 경지보다는 곧바로 붓다(최종적 각자)가 되는 것을 희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대승불교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적 붓다의 구체적 체취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추상적인 비아이콘적 형상, 즉 보리수나 발자국이나 금강좌의 상징물만 가지고도 간접적으로 붓다를 느끼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지만, 대승불교운동시기에 오면 역사적 붓다로부터 너무 시간이 격절되었고, 소승부파불교의 전승과 동떨어진 일반재가신도들이 붓다에 관한 정보가 너무도 추상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요구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성하 달라이라마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는 저는 달라이라마에 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어도 모든 상상과 느낌을 항상 동원할 수 있지만, 전혀 성하를 한번도 뵌 적이 없는 사람들, 혹은 시대적으로 격절된 한참 후대에 성하를 한번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하의 사진이나 동상같은,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요구하게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타부시 되어온 입열반의 붓다를 등신의 아이콘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변혁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아이콘에서 아이콘으로의 전환은 타부가 지배하던 승가집단내의 논리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쇼카 전성시대에 불교는 인도의 북서쪽, 지금의 파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쪽으로 이동하여 위세를 떨쳤는데, 이 지역은 알렉산더 원정이후에 알렉산더대왕이 떨궈놓고 간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박트리아왕국이 지배하던 영역이었습니다. 이 박트리아는 중국역사에는 대하(大夏, 따시아)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박트리아왕국은 결국 중국역사에서 월지(月氏, 月支, 위에즈)로 통칭되는 쿠샨족의 왕조로 대치되었고, 쿠샨왕조(Kushān Dynasty)중국역사에서는 꿰이수앙(貴霜)으로 불리움야말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수용하여 왕조문화의 기반을 닦았는데, 그 지배영역에 바로 간다라(Gandhara)지역과 마투라(Mathura)지역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불상의 기원이 간다라냐? 마투라냐?를 놓고 사계의 열띤 논쟁이 있지만 저는 간다라기원설을 정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불상이 최초로 제작된 것은 AD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사건이었습니다高田修, 佛像誕生, pp.205~7. 이숙희 옮김, 불상의 탄생(서울 : 예경. 1994), pp.202~4..

 

 

 아쇼카가 세운 스투파 바이샬리. 이 탑에 관하여서는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제7에 상세한 기술이 있다. 이런 탑 주변으로 보살운동이 일어났고, 대승불교가 탄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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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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