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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대상으로서의 실천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대상으로서의 실천

건방진방랑자 2022. 3. 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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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으로서의 실천

 

 

첫째는 대상으로서의 실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첫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을 객체의 형식으로만 파악했고 그것을 실천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대상, 현실을 실천이란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포이어바흐는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단백질 덩어리란 말이죠. 이 극단적인 문장에서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유물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의 유물론을 흔히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하지요. 맑스가 보기에 이런 유물론은 대상이나 현실을 단백질처럼,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고정적인 객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맑스 말대로 대상이나 현실을 실천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비지터(The Visitor)란 영화를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약간 앞의 과거로 돌아가려던 중세의 영주가 마술사의 실수로 수백 년 뒤의 미래인 20세기에 떨어집니다. 그의 시종과 함께 말이죠. 돈키호테를 연상하면 20세기에 떨어진 중세인의 행동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영주와 시종이 20세기로 날아와 처음 한 행동은 지나가다 세워둔 자동차를 괴물로 알고 두들겨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떨어진 곳에는 영주의 후손이 살고 있었지요. 치과 의사의 부인으로 말입니다. 시종의 후손 역시 그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은 바로 영주가 원래 갖고 있던 성이었습니다. 영주는 놀라고 분노하지요. 자기의 성을 시종의 후손이 갖고 있고,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데다가, 자기의 후손은 그 밖에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 이쯤하고 다시 돌아갑시다. 중세에도 20세기에도 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벽돌로 높이 쌓은 담이 있고, 그 안에는 좋은 방과 정원이 있지요. 물론 약간 수리도 하고 개축도 했겠지만, 그거야 대세에 지장 없으니 무시합시다. 포이어바흐가 본다면 20세기에 남아 있는 성은 중세에 있던 영주가 소유한 성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중세의 영주도 단백질이요, 그 후손도 단백질인 데는 차이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두 시기의 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중세의 성은 영주의 권력이 나오며 어떤 돈을 치르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지만, 20세기의 성은 아무나 돈만 내면 먹고 잘 수 있는 호텔이,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리 잘난 기사가 창을 들고 설쳐도 뺏을 수 없는 건물이 된 것입니다. 돈과 관계없는 어떤 권력도 그 성 안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완전히 다르기에 우스운 일이 생기고, 또 그래서 영화가 되는 거지요.

 

결국 이 성을 둘러싸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그 성의 본질이 달라지는 겁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시민혁명이나 산업혁명 같은 변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모두가 바로 실천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이고, 따라서 성의 본질은 이같은 실천의 개입 없이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포이어바흐처럼 관조한다면 성은 성일 뿐이지만요.

 

결국 포이어바흐는 대상을 정태적인 것, 지각에 의해 관조하기만 하면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대상 자체가 인간의 생활 과정, 실천 과정 속에서 변화되고 변혁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거지요. 성이란 대상을 단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귀족들이 사는 집으로만 파악할 뿐인 것입니다.

 

반면 맑스는 대상의 개념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맑스는 대상을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서 파악하려 합니다. 의식과 대비되는 물질,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란 개념에서 벗어나, 물질 혹은 대상 자체를 물질적 생산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로써 대상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성은 성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호텔이 된다는 것입니다.

 

 

탄차 끄는 아이들

18세기 중반쯤 그려진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탄차 끄는 아이들이다.

작은 어른과 구별되는 어린이’, 그것은 그를 둘러싼 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그의 삶 자체의 변화를 함축한다. 맑스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이는 아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어린이가 된다.” 그러나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아이가 어린이가 되는 것도 단지 부르주아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위 그림은 19세기 중반 이른바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던 영국의 탄광에서 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대체 누가 이들의 순진무구함을 주장했으며, 대체 누가 이들의 순결함을 어른들의 타락한 세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던가! 맑스는 영국의 공장 감독관들의 보고서를 수다하게 인용하면서 심지어 4~5세의 아이들까지 공장에서 14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지칠 줄 모르는 꼬마 노동자들”, 그것이 이들의 이름이었다. 거의 동일한 시기, 거의 동일한 곳에서 이토록 다른 삶을 사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며, 국가가 그 통일성과 인륜성의 이념을 대표한다고 하는 헤겔식의 관념을 뒤집어 버린다. 아이들이 , , 스위트 홈을 노래하는 달콤한 가정은 저렇게 처절하게 탄차를 끄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계급으로 분열된 세계일 뿐 아니라 두 계급이 서로 적대하는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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