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학의 문제설정
한편 ‘힘’에는 능동적인(active) 힘과 반동적인(reactive) 힘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반동적이라는 것은 진보에 반대되는 ‘반동’이란 뜻이 아니라, active에 대한 반대를 말합니다. 즉 active란 ‘작용적인 힘’이란 뜻이고, reactive란 ‘반작용적인 힘’이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어떤 힘에 대해 반응하여 반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 의지에는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긍정적인 의지이고, 반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부정적인 의지입니다. 대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가치평가’(evaluation)입니다.
요컨대 니체는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도입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힘’과 ‘의지’란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의미나 가치를 파악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도입합니다. 그것은 개념이나 사물들을 의지의 ‘징후’로 보는 것이고,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하면, 니체는 칸트에게 “왜 그런 걸 연구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즉 칸트에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죠. 이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칸트가 무엇을 하려고 (의지)하는지가 드러나리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게 바로 칸트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가치요 권력의지라는 겁니다.
▲ 신성한 기원?
위 그림은 구스(Hugo van der Goes)의 「인류의 타락」(The Fall of Man)이다. 성서는 인류의 조상이 신에 의해 낙원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성한 기원을 찾는 계보학이라면 이런저런 인물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아담과 이브에 이르고, 그것을 창조한 신에 이른다. 그런데 만약 신이 아담과 이브라는 두 인물에 의해 하나의 계보를 갖는 인류만을 창조했다면, 한 세대만 지나도 인류에겐 더없이 지대한 불행이 될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실수를 한 것이다. 왜냐고? 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아이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대체 누구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지? 인간이라곤 부모인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같은 씨로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만이 있는데, 동물과 결혼할 순 없는 일이니,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근친상간으로 가족을 이루기 시작하면, 사실 가족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들이자 누이의 자식이므로 조카가 되고, 아버지가 동시에 외삼촌이 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단일한 조상과 순수한 혈통을 찾으려는 모든 ‘신화’들이 공통으로 맞게 되는 운명이다. 근친상간 없이 제대로 가족이 발생하려면, 하나의 순수한 혈통에선 불가능하다. 다른 외부인들, 다른 혈통을 갖는 사람들이 가족적 혈통 안에 항상 들어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다른 혈통은 적어도 3개 이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 인류의 단 하나의 기원, 이런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족보학은 단일한 기원인 조상을 찾으려 한다. 반면에 계보학은 이처럼 그것의 비순수성, 기원의 우발성과 이질성을 드러낸다.
계보학이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지요. 그는 진정한 ‘비판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진정한 비판철학이 아닙니다. 즉 가치와 의지에 대해 묻지 않고 ‘순수한’ 인식능력만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제시합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참’ ‘거짓’ 같은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켜서, 어떤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의 과제란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치에 연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더 밀고 나가서 가치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 따라서 가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조회해야 하는 기준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계보학이란 가치의 철학’이요 권력의지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하면, 니체는 힘과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핵심 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의 새로운 질문방식, 새로운 문제설정이 도달한 창조적인 귀착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산타 마리아 성당
투시법 이후 예술은 대상을 정확히 재현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래서 예술도 이젠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위의 그림은 초기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건축가인 브라만테(Donato d'Agnolo Bramante)가 만든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의 내부다. 정면에 제단이 있고, 그 뒤에 내진(apse)과 합창대 자리가 있다. 그러나 평면도인 아래의 그림을 보면 내부가 십자형이 아니라 T자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에 보이는 제단 뒤편에는 공간이 없으며 평평한 벽일 뿐이란 것이다. 브라만테는 그 벽에다 그림을 그려서 내진과 합창대석이 있고, 공간이 있는 듯한 착각을 만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재현인가! 모든 재현은 이처럼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만든다(평평한 면에 깊이를 만드는 투시법 자체가 바로 정확하게 눈을 속여 없는 깊이를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재현은 바로 놀라운 눈속임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과연 참을 뜻하는 진리를 구현하는 활동일까? 아니면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속이는 거짓을 실행하는 활동일까? 재현은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일까, 아니면 눈속임과 거짓을 추구하는 활동일까? 그렇게 추구되는 진리란 혹시 거짓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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