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극단적 평가의 철학자
니체만큼 극단적인 평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니체 지지자들은 그의 사상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고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랄하며 시적인 경구들에서 새로운 사상의 징후를 느끼고 찬탄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니체 비판가들은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사상의 원천이요 집약이라는 지독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적인 문구들이 만들어내는 ‘초인’의 사상에서 파시즘의 심증을 굳히곤 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평가가 어떤 것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증폭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의 모습을 정확히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니체에게 가해지는 이 두 종류의 평가는 이런 미덕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니체의 독특한 사상이 대체 무엇을 새롭게 제기하고 어떤 사고의 대지를 개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예언자의 모습도, 악마적 파시스트의 모습도 아닌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니체에게서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철학과 관련해서 니체를 다루는 것은 이런 목적에 매우 적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계보학’을 비판철학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를 해석한 저작으로, 니체 철학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인 들뢰즈의 『Nietzsche and Philosophy』가 있습니다(국역은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이하의 논의는 들뢰즈의 이 책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저는 ‘니체의 문제설정은 무엇인가?’라는 차원에서 그의 사상에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의 철학은 하나의 명구집 혹은 아포리즘 정도로 읽히거나, 문학적 수사에 가려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드러나지 않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니체 저작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니체의 철학에는 체계가 없다”거나 “그는 어떠한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에 체계가 없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이것저것 횡설수설한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물론 체계가 완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완결적이고 폐쇄적인 체계를 만들려는 발상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전제한 위에서 말입니다만. 이런 점에서 저는 좋은 의미든 아니든 간에 니체철학에 체계가 없다는 말은 철저하게 잘못된 오해라는 들뢰즈의 비판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샤세리오(Théodore Chassériau)의 그림 「에스더의 화장실」(The Toilet of Esther)이다.
오해하지 말라. 이 시기 프랑스의 화장실(toilet)은 우리처럼 대소변을 보는 곳이 아니라, 씻기도 하고 화장도 하며, 때론 몰래 찾아온 애인을 만나기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옆에 시중 드는 하인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세 명 중 누가 제일 예쁜가? 물론 주인공인 가운데의 에스더일 것이다. 이유는? 사실 아름답다는 느낌에 정확한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래도 니체처럼 묻자.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갸름한 얼굴, 쌍꺼풀이 있는 큰 눈, 높고 늘씬한 코, 얇고 붉은 빛이 도는 입술, 긴 목 등등. 다시 묻자. “어떤 것이 그가 제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가?” 그것은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척도가 저 사람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실 아름다움의 척도는 대개 익숙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 못 보던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기괴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애를 키우는 부모는 대개 자기 자식의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느낀다.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아이가 미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쌍꺼풀도 없고 찢어진 듯한 눈을 가진 전형적인 누런 황인종의 얼굴이 아닌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는 걸까? “무엇이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삼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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