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니체 : 계보학과 근대철학
극단적 평가의 철학자
니체만큼 극단적인 평가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니체 지지자들은 그의 사상이야말로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적 사고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사고 영역을 여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합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랄하며 시적인 경구들에서 새로운 사상의 징후를 느끼고 찬탄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니체 비판가들은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사상의 원천이요 집약이라는 지독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니체를 잘 모르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적인 문구들이 만들어내는 ‘초인’의 사상에서 파시즘의 심증을 굳히곤 합니다.
물론 극단적인 평가가 어떤 것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증폭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의 모습을 정확히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니체에게 가해지는 이 두 종류의 평가는 이런 미덕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니체의 독특한 사상이 대체 무엇을 새롭게 제기하고 어떤 사고의 대지를 개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예언자의 모습도, 악마적 파시스트의 모습도 아닌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니체에게서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철학과 관련해서 니체를 다루는 것은 이런 목적에 매우 적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계보학’을 비판철학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를 해석한 저작으로, 니체 철학에 대한 탁월한 연구서인 들뢰즈의 『Nietzsche and Philosophy』가 있습니다(국역은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이하의 논의는 들뢰즈의 이 책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저는 ‘니체의 문제설정은 무엇인가?’라는 차원에서 그의 사상에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의 철학은 하나의 명구집 혹은 아포리즘 정도로 읽히거나, 문학적 수사에 가려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드러나지 않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니체 저작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니체의 철학에는 체계가 없다”거나 “그는 어떠한 체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에 체계가 없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이것저것 횡설수설한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물론 체계가 완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완결적이고 폐쇄적인 체계를 만들려는 발상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전제한 위에서 말입니다만. 이런 점에서 저는 좋은 의미든 아니든 간에 니체철학에 체계가 없다는 말은 철저하게 잘못된 오해라는 들뢰즈의 비판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샤세리오(Théodore Chassériau)의 그림 「에스더의 화장실」(The Toilet of Esther)이다.
오해하지 말라. 이 시기 프랑스의 화장실(toilet)은 우리처럼 대소변을 보는 곳이 아니라, 씻기도 하고 화장도 하며, 때론 몰래 찾아온 애인을 만나기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옆에 시중 드는 하인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세 명 중 누가 제일 예쁜가? 물론 주인공인 가운데의 에스더일 것이다. 이유는? 사실 아름답다는 느낌에 정확한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래도 니체처럼 묻자.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갸름한 얼굴, 쌍꺼풀이 있는 큰 눈, 높고 늘씬한 코, 얇고 붉은 빛이 도는 입술, 긴 목 등등. 다시 묻자. “어떤 것이 그가 제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가?” 그것은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척도가 저 사람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실 아름다움의 척도는 대개 익숙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 못 보던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기괴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애를 키우는 부모는 대개 자기 자식의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느낀다.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아이가 미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쌍꺼풀도 없고 찢어진 듯한 눈을 가진 전형적인 누런 황인종의 얼굴이 아닌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는 걸까? “무엇이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삼게 만들었나?”
권력에의 의지
니체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칩시다.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요컨대 꽃이나 노을, 몸매 같은 것들은 가상이고 그 근저에는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질문방식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 전체의 주된 흐름이 되어 왔던 질문방식이며, 흔히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로 간주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질문을 바꾸어 버립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진리의 예를 들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는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걸 요구하는 플라톤식의 질문과 달리,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진리를 점령하고 있는 의지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force)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어떤 힘이 지배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구별해 주는 것이 ‘의지’라고 합니다. 거꾸로 이러한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의지가 힘들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합니다. 줄여서 ‘권력의지’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권력을 추구하거나 욕망하는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 이거 진짜 훌륭한 거 맞나?
계보학은 말 그대로 보자면 계보를 찾는 학문이다. 그래서 통상 계보를 찾고 ‘아버지’를 찾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누구, 한민족의 ‘아버지’ 단군 등등.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계보의 선을 그리는 것. 그러나 니체는 ‘족보학’이란 말에 더 부합하는 이런 종류의 계보학에 대한 비판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버지나 신성한 기원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차라리 라 투르(La Tour)의 유머러스한 위 그림(제목은 「야바위꾼」The cheat)에 더 가깝다. ‘진리’ ‘자유’ ‘인간’ ‘도덕’ ‘정의’ 등과 같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관념들, 모든 활동의 목적이자 기원이라고 간주되는 그런 에이스 카드나 킹 카드 등을 보면서, “이거 진짜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 맞나?” 하면서 그런 관념이 발생한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눈 앞의 카드를 보고서, 의혹의 시선으로 감추어진 손을 찾아가는 두 여인의 삐딱한 눈동자처럼, 그 위대한 관념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오른쪽의 저 여인처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맹목적 순진성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선’이니, ‘진리’니, ‘도덕’이니, ‘인간’이니 하는, 대개는 의문 없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그런 관념의 혈통과 ‘계보’를 찾아간다. 그리곤 그것이 어이없는 것에서 시작되었거나 끔찍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자신의 작업을 ‘망치 들고 하는 철학’이라고 불렀다.
계보학의 문제설정
한편 ‘힘’에는 능동적인(active) 힘과 반동적인(reactive) 힘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반동적이라는 것은 진보에 반대되는 ‘반동’이란 뜻이 아니라, active에 대한 반대를 말합니다. 즉 active란 ‘작용적인 힘’이란 뜻이고, reactive란 ‘반작용적인 힘’이라는 뜻입니다. 후자는 자기에게 가해지는 어떤 힘에 대해 반응하여 반작용하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 의지에는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긍정적인 의지이고, 반작용적인 힘에 대응하는 것이 부정적인 의지입니다. 대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의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가치평가’(evaluation)입니다.
요컨대 니체는 철학에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도입하고 있으며, 이와 더불어 ‘힘’과 ‘의지’란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의미나 가치를 파악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도입합니다. 그것은 개념이나 사물들을 의지의 ‘징후’로 보는 것이고, 어떠한 사물이나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연구하면, 니체는 칸트에게 “왜 그런 걸 연구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즉 칸트에게 선험적 종합판단이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죠. 이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칸트가 무엇을 하려고 (의지)하는지가 드러나리라는 것이며,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게 바로 칸트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가치요 권력의지라는 겁니다.
▲ 신성한 기원?
위 그림은 구스(Hugo van der Goes)의 「인류의 타락」(The Fall of Man)이다. 성서는 인류의 조상이 신에 의해 낙원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성한 기원을 찾는 계보학이라면 이런저런 인물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아담과 이브에 이르고, 그것을 창조한 신에 이른다. 그런데 만약 신이 아담과 이브라는 두 인물에 의해 하나의 계보를 갖는 인류만을 창조했다면, 한 세대만 지나도 인류에겐 더없이 지대한 불행이 될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실수를 한 것이다. 왜냐고? 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아이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대체 누구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지? 인간이라곤 부모인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같은 씨로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들만이 있는데, 동물과 결혼할 순 없는 일이니,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근친상간으로 가족을 이루기 시작하면, 사실 가족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들이자 누이의 자식이므로 조카가 되고, 아버지가 동시에 외삼촌이 되는 그런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단일한 조상과 순수한 혈통을 찾으려는 모든 ‘신화’들이 공통으로 맞게 되는 운명이다. 근친상간 없이 제대로 가족이 발생하려면, 하나의 순수한 혈통에선 불가능하다. 다른 외부인들, 다른 혈통을 갖는 사람들이 가족적 혈통 안에 항상 들어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다른 혈통은 적어도 3개 이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 인류의 단 하나의 기원, 이런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족보학은 단일한 기원인 조상을 찾으려 한다. 반면에 계보학은 이처럼 그것의 비순수성, 기원의 우발성과 이질성을 드러낸다.
계보학이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지요. 그는 진정한 ‘비판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진정한 비판철학이 아닙니다. 즉 가치와 의지에 대해 묻지 않고 ‘순수한’ 인식능력만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제시합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참’ ‘거짓’ 같은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켜서, 어떤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의 과제란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치에 연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더 밀고 나가서 가치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 따라서 가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조회해야 하는 기준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계보학이란 가치의 철학’이요 권력의지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하면, 니체는 힘과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핵심 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의 새로운 질문방식, 새로운 문제설정이 도달한 창조적인 귀착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산타 마리아 성당
투시법 이후 예술은 대상을 정확히 재현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래서 예술도 이젠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위의 그림은 초기 르네상스기의 대표적 건축가인 브라만테(Donato d'Agnolo Bramante)가 만든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의 내부다. 정면에 제단이 있고, 그 뒤에 내진(apse)과 합창대 자리가 있다. 그러나 평면도인 아래의 그림을 보면 내부가 십자형이 아니라 T자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에 보이는 제단 뒤편에는 공간이 없으며 평평한 벽일 뿐이란 것이다. 브라만테는 그 벽에다 그림을 그려서 내진과 합창대석이 있고, 공간이 있는 듯한 착각을 만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재현인가! 모든 재현은 이처럼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만든다(평평한 면에 깊이를 만드는 투시법 자체가 바로 정확하게 눈을 속여 없는 깊이를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재현은 바로 놀라운 눈속임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과연 참을 뜻하는 진리를 구현하는 활동일까? 아니면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속이는 거짓을 실행하는 활동일까? 재현은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일까, 아니면 눈속임과 거짓을 추구하는 활동일까? 그렇게 추구되는 진리란 혹시 거짓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자명한 것이란 애초에 없다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에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자명한 것’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그게 있는 건지가 문제되고 있는데, 따라서 자명한 것이란 말 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데, 그 자명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 확실한 것에 어떻게 도달하겠냐는 것이고, 절대적이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절대이성’이 과연 절대적이겠냐는 겁니다. 마치 ‘사물 자체’에 대해 이미 말하고 있으면서, 사물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을 찾아나선다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한다면, ‘자명한 것’을 통해 무언가 하려는 바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주장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거나(데카르트도, 칸트도 모두 그렇습니다), 당신 주장은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아무 소용도 없다고 거부하고 반박하려 하는 거겠죠. 혹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지식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사상이야말로, 심지어 아직 자명한 데 이르지 못했다 해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다른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겠지요. 이런 걸 니체는 진리의지(진리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니체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와 재건자인 데카르트와 칸트를 명시적으로 비판합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문법의 환상’이라고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고 하려니 ‘생각한다’라는 말의 주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각한다’의 주어인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기 깔려 있다는 겁니다. 이는 동사를 사용하려면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문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명제는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무엇이란 당연히 권력의지겠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이제까지 정당성이 보증된 어떠한 철학자도 없다고 합니다. 자명한 확실성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애초에 의지가 작동하는 가치만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명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자체는 애시당초 잘못된 것이며 어불성설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되었던 나란 주체는 문법의 환상에 불과하며, 반대로 ‘내가 하는 생각’이란 권력의지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한편 니체는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힘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아’(Self)를 구성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근대철학의 자명한 출발점이었던 주체 개념에 대한 해체 작용을 합니다.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또한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 하나의 물체와 세 개의 그림자
하프 스테너(Douglas R. Hofstadter)의 「괴델, 에셔, 바흐」(Gödel, Escher, Bach).
G, E, B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저 물체의 진정한 모습일까? 어느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기에 어느 것이나 진정한 모습이다. 어디 저 세 개의 상뿐일까? 비스듬히 빛을 비추어 얻은 다른 모든 상들이 저 물체의 모습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한 점에서 본 것이란 점에서 일면적이지만, 역시 일면적인 다른 모든 상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것이다. 이를 니체는 ‘투시주의’라고 불렀다. 니체는 어느 것도 특권적인 상이 아니란 점에서 대문자로 쓰는 진리(Truth)는 없으며, 동시에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들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 “진리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점마다 잘 보이는 면이 다르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잘 보려고 하는 것을 찾아서 정말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투시주의는 진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흔히 비난하듯이 ‘상대주의’와도 별 상관이 없다.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다른 한편 자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 퍼붓는 니체의 공격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진리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주체뿐만 아니라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진리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예컨대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의지가 바로 진리의지입니다. 더불어 그는 이러한 진리의지가 어떤 가공할 효과를 야기할 것인지도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유혹”입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진리라는 환상으로의 유혹이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에 다른 거짓된 지식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지로의 유혹이며, 거짓으로부터 사수되어야 한다는 착각으로의 유혹이고, 이걸 사수하기 위해선 다른 거짓을 전파하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의 유혹입니다.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 그것은 호르케 수도사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빚어낸 것입니다. 그가 보기엔 ‘코미디’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중세철학이 의존하고 있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코미디에 대한 철학적 문헌을 남겼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감추어 둔 그 문헌을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호르케 수도사는 진리의 이름으로, 또한 신의 이름으로 죽음이라는 저주를 내렸던 것입니다. 윌리엄 수도사(앞에서 보았던 중세 후기의 대표적인 유명론자 오컴의 이름이 바로 윌리엄이었지요)가 그 사건의 주범이 호르케임을 찾아냈을 때, 호르케는 수도원과 함께 그 책을 불살라 버립니다. 자신의 죄많은 육신도 함께 말입니다.
또한 니체는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그러한 종류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판단은 그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진리의지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윌리엄 수도사가 아무리 설득한들 호르케 수도사가 결연히 지키려고 하는 신념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것이 거짓임을 믿게 할 수도 없으리란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다면 진리만큼이나 많은 거짓이 우리들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에 대한 질문 자체가 바뀝니다. 근대철학은 오직 진리일 때만 지식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진리(과학)가 아니라면, 더군다나 진리(과학)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선 어떤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체 말처럼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종류의 거짓이라면 대체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니체처럼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지만 존재한다고 하면, 그래서 지식이나 판단을 진리의지란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어떤 효과를 의지하고(willing)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해집니다. 결국 이 질문을 통해 지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떠한 효과를 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로도 전환됩니다.
그리고 니체는 칸트에 의해 완성된 근대적 윤리학, 즉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비판의 망치를 휘두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를 따르기를 원치 않을 때, 신이나 국가나 아버지를 따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한다고 합니다. (실천)이성이 바로 이 새로운 복종을 지휘하는 새로운 군주인 셈이지요. 즉 칸트가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외부의 어떤 강력한 권위들이 무너지게 되자 새로이 권위를 내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결국 우리를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설득하는 작용을 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종 속에서만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나타나게 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권력의지를 표현하는 것인 셈입니다.
▲ 섹스의 도덕과 윤리
영어의 good은 두 가지 반대말을 갖는다. 하나는 bad, 다른 하나는 evil. 앞의 경우 ‘좋음’/‘나쁨’이라고 번역된다면, 뒤의 경우는 ‘선’/‘악’으로 번역된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의사가 보기에 몸에 나쁘지만, 그렇다고 ‘악’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보기에 그것은 악이다. 계율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도 그렇다. 기독교는 성욕과 섹스를 악으로 간주했다. 즉 그것은 도덕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섹스를 얼마나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심지어 어떤 욕망과 느낌을 느꼈는지 자세하게 고해하도록 신도들에게 요구했다. 반면 『소녀경』의 중국인에게 섹스는 결코 악이 아니며, 단지 몸의 건강을 위해 적절히 조절해야 할 것이었다. 탄트라 요가를 하던 인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위 그림은 인도 카쥬라호 사원의 미투나 조각상), 그들은 수행을 위해, 득도를 위해 섹스와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려 했고, 그래서 저렇게 치밀하고 정교한 기술로 만들어냈다.
니체에 따르면 선/악에서는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인 금지로 정의되는 계율이 먼저 있고, 그 금지를 어기지 않는 것이 ‘선’이 된다. 따라서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권력의지가 작동하며, 항상 힘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좋음/나쁨’은 다르다. 도덕의 계보학, 니체처럼 스피노자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한다. 스피노자는 선/악에서 도덕(moral)이 발생한다면, 좋음/나쁨에서는 윤리(ethic)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좋음이란 어떤 것과의 만남이 나에게 능력의 증가를 야기하는 것인데, 이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윤리학의 목표는 ‘좋은’ 관계에서 야기되는 기쁨을 극대화하고, 나쁜 관계에서 야기되는 슬픔을 극소화하는 것이다.
4. 근대철학 해체의 양상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합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니체는 의미와 가치, 힘과 권력의지란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해체시킵니다. 근대적 문제설정의 지반이었던 주체와 진리를, 그리고 그에 기반한 윤리학을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 니체는 그 결과 새로운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체 작업은 맑스나 프로이트의 그것과 달리 지극히 공격적이었습니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이어바흐나 헤겔에 대한 비판은 그런 한에서 필요한 최소한으로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근대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근대사회에 대한 이론으로서, 또한 이데올로기로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근대사회 자체에 대한 실천적 비판(혁명)이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 대한 맑스의 철학적 비판은 근본적이지만, 광범하거나 전면적이진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근대적 문제설정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매우 조용하고 ‘절약적’입니다.
프로이트의 ‘비판’ 역시 근대철학에 대한 비판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성실하고 탁월한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작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가 던진 돌멩이가 바로 근대철학의 머리에 떨어졌던 것뿐이지요.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자기가 해체한 게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니체의 비판은 극히 명시적일 뿐 아니라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가 겨낭하고 있는 목표는 바로 근대철학 전체, 아니 좀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소크라테스 이래 나타난 서양철학 전체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 타깃을 향해 강력한 포탄을 화려하고 요란스럽게 쏘아댑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자기가 해체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즉 자기의 철학적 작업이 야기하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매우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것이 근대철학 비판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근대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많은 탈근대적 철학자들에게 니체는 가장 유용하고도 훌륭한 벗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근대적 문제설정을 해체시키는 방식에서 볼 수 있는 공통성과 차이를 간략히 일별해 보는 것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군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이들의 공통성은 주체와 진리라는 개념을 기둥으로 삼아 만들어진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를 해체한다는 점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적지 않지만 거기 내재된 근대적 사고방식으로서의 주체철학과 과학주의, 그리고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 역시 이들의 공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의 개념과 관련해서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성은 별도로 지적될 만한데, 그것은 주체란 자명한 출발점도 아니며 통일성을 갖는 확고한 중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은 주체 외부의 관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며, 이질적인 복합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통해 이제 주체는, 그리고 그 주체의 사고와 행동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반면 이들의 차이는 한마디로 해체를 수행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며, 그 결과 창출해내는 새로운 문제설정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맑스의 경우 핵심적으로는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대상과 주체, 진리와 정치 문제 전반을 해체하고 다시 정의내리며, 그 결과 역사유물론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형성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통해 특히 주체의 개념을 철저하고 강력하게 해체하고, 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으로서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냅니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 힘과 권력의지란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의 뿌리를 노출시키고 해체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의 사고방식을 좀더 발전시켜 계보학이라는 또 하나의 비판철학을 만들어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성은 이들이 서 있던 근대적 지반의 공통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이 서 있던 지반은 공통된 것이었고, 따라서 해체의 결과는 공통성을 강하게 갖게 됩니다. 반면 이들이 보여주는 차이는 각자가 근대적 지반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태도의 차이에서, 그리고 그것을 해체하는 데 사용한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가 집중적으로 착목하고 있던 지점, 그리고 힘을 모아 돌파해야 할 지점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후 현대철학자나 이론가들에 의해 근대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데 강력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들의 차이는 그 도구의 다양성과 돌파 지점의 다수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근대 철학이라는, 서양철학의 거대한 흐름을 넘어서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