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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성공과 실패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성공과 실패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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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

 

 

요약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본 것처럼 인간의 해체’ ‘주체의 해체가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데카르트나 칸트처럼 주체나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거나 그것을 철학적으로 규정하려는 근대적 노력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이후 반인간주의반주체철학이 자리잡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셈입니다.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해 역사주의와 반대되는 과학으로서 구조주의를 정립한 것 역시 이후 반역사주의적 경향의 모태가 됩니다.

 

한편 레비-스트로스는 중요한 것은 인간을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체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적인 인간개념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자연과 문화,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에 공통된 무의식적 기초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위에 서야 할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기획이 칸트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바 있지요. 근친상간 금지에 대한 지적에서 출발하는 그 이론은 의식과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 선험적 기초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야성적 사고라고 했던 거지요.

 

따라서 그의 입론은 주체를 그러한 심층구조의 효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명시적으로 탈근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에 공통된 어떤 보편적이고 선험적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구성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칸트적이며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는 야콥슨에게도 마찬가기로 나타나지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선험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보다는 야성적 주제의 칸트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탈근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해서 근대적인 기획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제창한 구조주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얼굴, 상충되는 요소를 갖고 있는 문제설정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의 출발이 어떠했든간에 그의 이론적 기획이나 문제설정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것은, 스스로도 인정했다시피 칸트주의적인 측면입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 직업이 근대철학의 경계선을 정신분석학과 사회인류학을 통해 넘어보려 한 것이었다면, 그 결과는 오히려 칸트적인 방식으로 근대적 사고로 복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인류학적 성공은 철학적 실패와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아르마딜로를 탄 아메리카 여인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인 코르넬리우스 비쉐르(Cornelius Visscher)가 그린 것이라는데, 1639년 얀스준 비쉐르(J. Visscher)가 만든 세계지도에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여인으로 다시 기입되었다. 아르마딜로라는 기이한 동물 등에 양손에 무기를 든 채 거의 나체로 앉은 여인, 이것이 16세기 중반, 아니 17세기 중반에도 유럽인들이 갖고 있던 아메리카인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사실 이로 인해 이들이 과연 인간인지를 두고 15세기에 유럽 전체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것의 핵심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동물처럼 노예로 사용해도 좋은가를 둘러싼 것이었다. 격하고 오랜 논쟁 끝에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는 결론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 결론이 금광을 찾아나선 인간들의 탐욕에서 이들을 지켜주진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금광으로, 은광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아예 북미 인디언들처럼 노동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들이 인간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일 때에도, 흑인들에 대해서는 한 번의 토론도 없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시대를 산 어떤 휴머니스트도 그들이 인간이란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긴 인간임을 선언하고 해방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여전히 노예적 억압과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 위대한 자본주의의 제국, 그곳이 아니던가!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 그 말에는 항상 하나의 형용사가 숨어 있다. ‘’(White)이라는 말이,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인간에게 봉사해야 마땅하고, 인간의 부림을 받아 마땅하며,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것일까? 정말 지구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동물이나 식물들은 인간이 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인가?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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