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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의 귀향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2. 레비-스트로스와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의 귀향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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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의 귀향

 

 

다른 한편, 과학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이원적입니다. 원주민들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그의 작업은 야성적 사고를 통해 주술과 과학의 대립을 깨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서구적 관점에서 토템이나 주술을 과학의 이름을 빌려 매도하려는 시도를 정열적으로 반박합니다. 그의 입장은 서구적인 과학적 사고보다는 차라리 야성적 사고에 기울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야성적 사고를 보편적 사고로 위치 지으려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와 관련해 데리다는 그의 입장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일종의 루소주의적 향수를 읽어내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반서구적이고 반과학적인 경향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겁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신대륙에 도착하다

그림들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 Vespucci)의 책 이 책이 말하노니에 실려 있는 삽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감히 확언한다. 금과 돈에 대한 탐욕, 식민지에 대한 욕심으로, 이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던 곳에 도달해선 마치 무슨 고상한 것을 찾아낸 과학자처럼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턱 없는 오만과 아집, 몰상식을 증명하는가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안 되는 수의 백인들에게 호의의 친절을 베푼 인디언 들은 북미에서도, 남미에서도 모두 배신과 협잡, 사기와 강탈, 살인과거형에 의해 거의 멸종 당했기 때문이다. 동물기의 작가 시튼이 보여주듯이 평화로운 삶과 하나가 된 위대한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혹은 마야나 아즈텍 등의 거대한 문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유럽인이 가져온 탐욕과 아짐, 무기와 병균, 그리고 다른 신을 참지 못하는 질투심 많은 그들 신의 끔찍한 거주에 의해 때론 노예적 삶으로, 때론 전쟁으로, 때론 사기와 강탈로 몰살당했던 것이다. 90퍼센트에 가까운 원주민들이 죽었고(이 숫자의 의미를 아는가!), 살아남은 자들은 한 구석의 보호구역에 갇혀 코끼리나 코뿔소처럼 간신히 생물학적 명맥을 보존하고 있다. 그 끔찍한 비극을 발견이라고 하는 순간, 모든 진실은 사라지고 유럽 문명을 추동한 과학적 열정, 진리에 대한 열정이 지구를 하나로 연결한 위대한 사건이 된다! 아마도 인류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거짓말이 이 신대륙의 발견혹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신대륙의 강탈” “신대륙의 물살” “신세계의 처형”.

 

 

반면 사르트르의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그가 명시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 과학일 수 없으며,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란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주의 비판은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보편적 기초를 찾겠다는 시도 자체도,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의식적 기초를 찾겠다는 시도 자체도 어떤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주의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가 다른 입론을 비판하며 자신의 입론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정확하게도 근대적인 과학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제설정은 반과학(=반서구)적인 태도를 과학주의적인 방식으로 기초짓고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뜻에서 반과학적 과학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 전체에 방향을 부여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지배적 요소가 분명 과학주의적 동기임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론적 차원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문제설정은 근대적인 것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덧붙이자면, 그가 보여주는 반서구적이고 반문명적인 태도는, 과학적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미개요 야만이며, 따라서 계몽되어야 할 것이라고 간주하던 계몽주의적 사고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이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 공통된 하나의 기초를 찾아내려고 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 공통된 기초의 자리에 야성적 사고를 갖다놓음으로써 야성의 입장, ‘반문명의 입장을 우위에 두게 되고, 결국은 예전의 계몽주의적 도식을 거꾸로 뒤집은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루소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하는 점이 바로 여기일 텐데, 요컨대 계몽주의적 이분법 자체를 깨고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로로족(Bororo)의 마을 배치도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가운데 있는 것은 남자들의 집이고 원을 그리며 배열되어 있는 것은 여성들이 소유한 기혼자들의 집이다. 보로로족은 다양한 반족(半族)들로 나뉘어지는데, 가령 수평으로 보이는 선을 따라 위쪽은 투가레족, 아래쪽은 세라족이고, 417번 집을 잇는 선을 따라 왼쪽은 강의 상류에 사는 족, 오른쪽은 하류에 사는 족 등이다. 투가레족의 남자는 세라족의 여자와 결혼하며, 낳은 아이는 어머니를 따라 세라족이 된다. 투가레족이 죽으면 세라족이 장례식을 해주는데, 부락민의 반이 죽은 자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 반이 산 자의 역할을 한다. 두 명의 상반되는 성격의 주술사도 각각의 반족에 속해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느 한쪽이 상대편의 도움에 의해 즐기고, 다른 한쪽은 상대편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그런 관계를 만들었고, 여기서 주거지의 배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은 물론 우주론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엮이는 지반이 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 들어온 살레지오회 선교사들은 이를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의 주거지 배치를 바꾸어 버리려고 했다. 왜냐하면 보로로족을 개종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의 부락을 포기하도록 만들어, 오두막들이 평행 열을 이루는 다른 주거지로 옮기는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우 그들은 모든 면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사실 그들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빼앗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자들의 배를 타고 다니며 그들의 만행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처럼 선교와 개종을 위해 원주민들의 삶 자체를 직접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마야의 거의 모든 책과 문서를 이단이란 이유로 태워버린 것도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였다). 그런데 이렇게 공동의 삶 전체를 파괴하고 나서야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신, 새로운 종교란 정말 그들의 삶을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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