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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아마추어 사회학 - 3. 야매와 설국열차 본문

연재/배움과 삶

아마추어 사회학 - 3. 야매와 설국열차

건방진방랑자 2019. 10. 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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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매와 설국열차

 

 

그렇게 야매의 반란이 시작되었지만 아무리 야매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고 절실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자칫 한 눈 파는 순간, ‘당연의 세계에 쉽게 포섭당하고 만다.

 

 

야매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영화 설국열차.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그만큼 당연의 세계는 어느 곳에든,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리하고 있어, 방심하는 찰나 도적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무수한 386세대(강철 김영환, 김문수), 반독재운동에 헌신하다 그 딸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지지선언을 한 김지하 시인의 예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섭쌤은 비고츠키 강의 당시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당연의 세계는 무섭도록 내 몸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다룬 영화가 바로 설국열차. 꼬리칸에 타고 있는 커티스와 몇몇 동료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대와 인권유린을 몸소 겪으며 이 사회는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걸 바꾸기 위해 앞으로 나간다. 치열한 싸움으로 많은 동료를 잃고 나서야 커티스는 엔진칸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절대악이라 생각했던 윌 포트는 아주 태연하게 맞아준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운을 뗀 후에, “저 다리 건너, 구역과 구역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또 그대로 있을 것이네. 이 모든 게 무얼 위해선가? 이 기차일세. 지금 이 순간에 사람 수가 딱 적당하고, 모두 제 위치에 있지. 이 모두는 무얼 위해서인가? 인류를 위해서일세. 이 기차가 곧 세계이고 우리가 곧 인류인 게지. 그리고 지금 자네에겐 이 인류를 지도할 신성한 의무가 있네. 자네가 없으면, 인류는 멸종할 걸세. 지도자 없이 인류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봤잖은가, 서로를 삼켜댈 뿐이지.”라는 말로 당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초대장을 내민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고, 여러 희생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지만, '당연의 세계'가 가로 막는다. 

 

 

영화를 보던 모든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함께 놀랐다. 꼬리칸에서 엔진칸으로 돌진할 명분은 충분했고, ‘이 사회를 바꾸자는 생각도 확실했지만, 그때 마주하는 건 이 사회는 여태껏 이렇게 흘러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라는 회의감 내지는 현실감이니 말이다. 이 순간 커티스는 맞아! 이 세계가 아무리 부조리하고 뭔가 이상하다 해도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누구 할 것 없이 부조리한 사회를 보고 화가 난 나머지 바꾸려하지만 그런 경우 십중팔구 다시 당연의 세계로 포섭된다. 웃음을 상실하여 음울함만 가득해서는, 경쾌하게 리듬을 타지 못하고 군인의 제식처럼 경직되고 무거워져 끌고 나갈 힘이 상실한다. 그래서 암살이란 영화에서 속사포는 항일운동 욱하는 마음에 3~4년 갑디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 더 문제가 되는 건 다시 당연의 세계에 파묻히는 순간 세상은 원래 그러니, 애 쓰지 마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꼰대가 된다는 것이다.

 

 

반란을 꿈꾸다가 꼰대가 되었다. 엔진으로 달려드는 요나를 저지하는 커티스의 모습.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하지만 당연의 세계는 너무도 익숙하여 당연하게 보이는 것일 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코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섭쌤은 물에 사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이 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감적 시좌를 확보해야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관습에 빠져 있는지 알게 되는 거죠라고 말했던 것이다.

 

 

덕진공원에 핀 연꽃. 조감적 시좌를 확보한다는 건, '난 파란 썬그라스를 썼다'는 걸 아는 것이다. 쉽게 그걸 잊어버리니 문제다. 

 

 

그런 조감적 시좌를 확보하면, 윌 포트가 커티스에게 했던 말도 매우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수가 적당하다며 사람 수를 때에 따라 늘리거나 줄이는 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 수가 많다며 자신을 죽이려 할 때, 가만히 있을 것인가? ‘사람에겐 정해진 위치가 있다며 핍박받는 걸 정당화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이 꼬리칸에 있을지라도, 그 체제를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결국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정할 수 있고 맘껏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걸 듣고 있는 커티스조차 꼬리칸에서 느낀 부조리와 폭력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윌 포트에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런 상황에 대해 진중권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면 우리 주위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한 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신체는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고통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법. 적어도 한 번쯤 낯설게 보기를 통해 한국인의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 14

 

 

너무도 당연시 되어 더 이상 어떤 비판이나 낯설게 보기조차 불가능해진 것에 대해, 우린 원래 그래라고 퉁칠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니 바로 그게 문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너무도 익숙해서 고통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고, 그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옥죄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처럼 완벽하게 다른 환경, 그리고 생활, 가치관을 보면서 그걸 당연하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이미 윌 포트의 말에 끌린 커티스는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 한다. 하지만 이때 요나가 커티스에게 기차가 계속 달릴 수 있는 비밀을 폭로한다. 엔진의 힘만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좁디좁은 엔진 속에서 채 10살도 되지 않는 아이가 엔진에 기름칠을 해야만 겨우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보자 커티스는 자신이 당연의 세계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요나에게 성냥을 건네주며 당연의 세계를 깨부수도록 돕는다.

야매가 되려 했지만, 끊임없이 당연의 세계가 들러붙어 한쪽 방향으로 나를 몰아세우고 다시 끌어가려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설게 볼 수 있는 용기. 낯설게 보려면 조감적 시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마추어의 사회학이 그걸 도와준다. 4번의 강의로 진행될 아마추어 사회학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흘러넘치고, 이 강의를 모두 듣게 되었을 땐 어떤 조감적인 시좌를 갖게 될까? 아서라, 원래 모든 배움이 모름이란 사실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이 강의는 애초에 아마추어가 되는 목표이니 그저 신나게 알아가기만 해도 된다.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으며 야매가 되는 방법에 대한 힌트나 찾아볼거나.

 

 

이 착취와 폭력의 기차가 끊임없이 달릴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뭇사람들의 반성 없는 습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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