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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4장 - 빛과 어둠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24장 - 빛과 어둠

건방진방랑자 2023. 3. 20.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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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빛과 어둠

평범한 너 자신 속의 빛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성악(性惡)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빛의 존재임을 말할 뿐이다. 빛과 어둠의 실체적 대비도 없다. 빛이 빛을 잃어가면 어둠이 찾아올 뿐이다. 예수의 원래적 사상의 내면에는 예수와 인간과 하나님의 동일성이 자리잡고 있다.

 

 

24

1그의 따르는 자들이 가로되, “당신이 계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우리가 그곳을 찾아야 하겠나이다.” 2예수께서 저희에게 가라사대,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3빛의 사람 속에는 반드시 빛이 있나니,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나니라. 그것이 빛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

1His followers said, “Show us the place where you are, for we must seek it.” 2He said to them, “Whoever has ears, let him hear. 3There is light within a person of light, and it shines on the whole world. If it does not shine, it is dark.”

 

 

1절의 제자질문과 제2~3절의 예수대답 사이에 표면적으로는 정확한 논리적 연결이 없는 듯이 보인다. 제자들은 예수가 있는 장소, 즉 물리적 공간을 물었고, 예수의 대답은 그러한 로칼리티(locality)와 무관하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그 기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제자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사이에는 참으로 절묘한 인과성이 성립하고 있다.

 

제자들의 추구는 예수가 있는 곳으로의 여행이다. 이것은 곧 그들 자신의 본래적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영적 여행인 것이다. 이러한 여행에 대한 예수의 화두는 곧 너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 속에 곧 내가 있다고 하는 선포이다. 나의 존재의 자리는 곧 너희들 인간 속에 내재하는 빛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기독교는 성악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원죄론(Original Sin)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예수는 원죄를 말한 적이 없다.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으로 규정하려는 생각이 근원적으로 없다. 기독교를 원죄론과 관련시키는 것은 대체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틀에서 유래한 것이며, 예수의 원래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아담의 원죄와 그 죄의 삯으로서의 사망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전제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로마서 5~7 참조).

 

여기 빛의 사람이라는 예수의 말은 인간 그 자체를 빛으로 규정하는 표현이다. 맹자(孟子)가 인간의 본래적 성품이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면, 예수 또한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 빛(포스)이라는 것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라는 희랍어는 빛과 사람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다. 이제 마태복음 5:14~16의 말씀이 새롭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뒷박으로 덮어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얹어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현행 공관복음서에도 인간 존재가 빛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제1장은 예수를 태초부터 존재한 말씀(로고스)으로 규정하고, 그 말씀을 다시 빛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빛을 어둠인 세상(코스모스)과 대비시킨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9). 이러한 논리의 문제점은 빛을 빛으로서만, 어둠을 어둠으로써만 실체화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빛은 빛일 뿐이며, 어둠은 어둠일 뿐이다. 예수는 전적으로 빛이며, 세상은 전적으로 어둠이다. 이 어두운 세상에 갇혀 사는 인간은 오직 자그마한 빛의 파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작은 빛의 파편을 어둠의 세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는 오직 전적인 빛인 예수일 뿐이다.

 

 

앞 편에서 안티옥 주행승의 고행(stylism)을 소개했지만 그 원조에 해당되는 인물은 같은 안티옥 부근이지만 현재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는 대형교회에 모셔져 있는 성 시므온(Saint Simeon)이다. 앞 편에서 소개된, 안티옥근교 사만다그에서 수행한 사람은 후대의 인물이므로 어린 성 시므온이라고 불리운다. 원조 시므온은 AD 392년 시골 양치기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수도원의 생활이 고행이 부족하다고 느껴 자꾸 고독한 동굴로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산꼭대기에 3m 정도의 바위기둥을 세우고 그곳에서 쇠사슬을 감고 고행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가 용한 것을 알고 자꾸 모여 드니까 방해받는 것이 싫어 점점 기둥을 높였는데 결국 18m 정도로 높아졌다. 40년 고행 끝에 그 기둥꼭대기에서 티베트승려가 좌탈하듯이 숨을 거두었다(459724), 죽었을 때 시므온은 전 로마제국의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로마의 황제 제노(Zeno, AD 474~91 재위)는 그가 죽은 바로 그 기둥을 중심으로 십자가형의 대성당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성당보다도 크다. 십자가형의 사방에 네 개의 바실리카(교회)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형교회의 원조에 해당되는 모습을 여기서 본다. 대형교회의 창립목사처럼 시므온은 용하다고 소문났고 매일 기둥꼭대기 위에서 영적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먼 섬나라 영국에서까지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 시리아 알렙포 부근이지만 크게 보면 안티옥 근교이다. 시므온의 기둥은 전세계 광신도들이 부처님 코갉아먹듯이 쪼아가서 그루터기만 남았다.

 

 

그러나 여기 도마의 예수는 자기만을 빛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 자기와 주변의 예수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빛일 뿐이다. 그런데 빛이란 반드시 이 세상을 비추어야 한다. 온 세상을 다 비추어야 한다. 어둠이란 세상에 대한 고정적 규정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면으로부터 발하는 빛이 빛나기를 멈추는 상태일 뿐이다. 마지막 문장,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의 주어인 그것빛의 사람이다.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두운 것이다. 빛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은 곧 빛나는 세상이고, 어두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곧 어두운 세상이다. 신약에 쓰인 죄에 해당되는 단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그것은 궁술에서 쓰이는 스포츠용어이며,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이다. 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신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세운 도덕적 목적에 미달하거나 어긋나는 상태일 뿐이다.

 

이제 마태복음 6:22~23의 언어가 새롭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뇨!

 

 

상기의 마태 두 자료는 누가 11:33~36과 함께 큐복음서에 속한다. 큐와 도마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우리는 여기서 재인식하게 된다.

 

1절의 제자질문은 요한복음 14의 도마의 질문을 연상시킨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말한다. 아버지 집에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해놓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도마가 질문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우리가 알겠삽나이까?” 예수가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빌립이 또 아버지를 직접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예수가 말한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피스티스 소피아는 요한복음의 상호내주(相互內住)와 같은 애매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너희 사람이며, 너희가 곧 나다. 너희가 곧 천사며, 대천사며, 신이며, 주이며, 왕이다.”

 

예수의 원래 사상은 예수 자신만을 인간의 길, 진리, 생명으로서 소외시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 진리, 생명이 바로 우리 인간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빛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 선포가 로고스기독론적으로 왜곡된 것이 요한복음의 언어다. 그 원형은 이러한 것이다. ‘너 자신에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나니라.’ 다석 유영모 선생(1890~1981)은 말씀하신다: “예수의 는 개별적 나일 수 없다. 하나님의 이며 온 인류의 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참 나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제노황제의 금화. ‘우리의 주 제노 황제시여 영원하시라(DN ZENO PERP AVC)’라고 써있다. 서로마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도 산 꼭대기에 무지막지한 대형교회를 짓고 있었으니 참 한심한 인물이라 말할 수밖에. 필자의 소장품이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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