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형제와 이웃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이웃은 누구일까?
❝이웃사랑이라는 기독교의 큰 계명은 인간에 대한 신적 사랑의 실천이라는 보편주의적 명제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그 원래적 성격에는 유대민족의 종족주의나 예수운동의 당파성이 깔려있었다.❞
제25장
1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2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
1Jesus said, “Love your(sg.) brother like your soul, 2guard that person like the pupil of your eye.”
어려서부터 기독교신앙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뇌리에 박힌 많은 성구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믿음의 정당성을 유지시켜 주는 말씀이 있다면 이러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만약 이러한 명제가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으로써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종국적인 신앙심을 견지하는 데 어려움을 감지할 것이다. 신이라는 추상명사와의 관계 속에서 아무리 절대적 복종의 계율을 성실하게 지킨다 하더라도 인간과의 관계가 배제된다면, 즉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역사(役事)가 실증되는 고통스러운 계기들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공허한 신앙일 뿐이요 무서운 독선의 강요일 뿐이다. 많은 예수의 말씀 중에서도 이토록 가장 핵심적인 파편을 도마복음서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의 감격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도마복음의 원초적 성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마복음의 말씀은 외면적으로는 공관복음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원시 기독교사상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매우 엄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먼저 공관복음서 중 제일 먼저 성립한 마가자료 전체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통째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37).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과 예수와의 변론적 마당이 설정되어 있는 이 단화(短話)는 기존의 신학계에서도 어떤 핵심적 예수의 로기온자료가 선행하였고, 그것이 확대되어 나간 것으로 분석되어왔다. 우리는 도마복음서의 출현으로 그 프로토자료의 성격을 규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선 첫째·둘째 계명이 다 예수 본인의 말씀이 아니고 구약의 인용이라는 사실이 묵과될 수 없다. 첫째는 신명기 6:4~5에서 왔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하나인 야훼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 둘째는 레위기 19:18에서 왔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야훼니라.”
이 단화를 구약의 율법에 대한 유대교 율법사와 예수와의 이성적 합의로 해석한다면 기독교는 설 자리가 없다. 신약이 결국 구약화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야훼의 유일신임을 강조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레위기의 자료는 바빌론유치 이후에 예루살렘의 권위를 확립하고 이스라엘민족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하여 편찬한 사제문서(P)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 동포에 한정된 말이다. 야훼의 유일성도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종족신앙의 합리화일 뿐이다. ‘이웃사랑’이 이스라엘 동족만을 보호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개나 쥐새끼보다도 더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기독교정신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대교의 문제는 보편주의의 결여에 있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을 구약의 출전과 무관한 단절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율법사와의 논쟁적 성격이 깔려있으므로(마태자료), 구약의 출전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아예 이 두 계명을 예수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사가 스스로 토라를 인용하여 토로하고 그것에 대해 예수가 인정하는 것으로 드라마의 구성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율법사의 반문이 이어진다. 여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대답으로서 진술된다. 이 단화에서 ‘이웃’의 개념을 종족적 한계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는 누가복음서 저자의 신념이 그 편집에 드러나있다.
▲ 현재 사마리아인은 700여 명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심산(Mt. Gerizim, 881m) 주변의 피난촌에 모여살고 있다. 사마리아인이 과연 유대인이냐 하는 것도 개념에 따라 복잡한 논의가 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좁은 개념의 유대교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이들은 우선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세5경 이외로는 구약성경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세5경에 야훼가 성소로서 ‘택하신 곳’이라는 구절이 21번이나 나오지만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에 들어와 최초로 증거돌을 세운 곳이 바로 그리심산이므로, 성소는 그리심산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곳이며, 요셉의 유골이 유언대로(창 50:24) 묻힌 곳이며, 신명기 11:29에 나오는 ‘축복의 산’이다.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복수의 저주를 외친 곳도 그리심산이다(사사기 9:7).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이후에나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분쟁 지역이래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그리심산을 어렵게 찾아갔다. 그들은 고대 히브리어로 기도를 하지만 아랍어를 쓴다. 혈통이 섞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번 유전병이 생기면 종족이 멸망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진 찍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소녀가 내 요청에 응해주었다. 야곱의 우물(Jacob's Well)곁에서 예수가 만난 저돌적인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강렬한 빛을 발했다. 요한복음 4장의 일화는 예수시대에 이미 유대교를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고립 촌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예수가 사마리아인을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대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공포스러운 파격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에는 이웃의 사랑에 앞선 신에 대한 사랑의 전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도 ‘형제’라는 말로 그 외연이 더 축소되어 있다. 즉 예수운동에 참가하는 ‘형제’들간의 단합을 호소하는 당파적 성격(sectarian unity)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2세기 전반에 성립한 희랍어문화권의 유대인들의 복음서인 『히브리인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에도 이런 예수의 말씀이 있다: “너의 형제를 사랑으로 돌볼 때만이 너는 기뻐할 자격이 있다.”
‘네 영혼과 같이’라는 표현은 ‘네 몸과 같이’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람어나 시리아어에서는 ‘자기자신’을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은 예수 말씀의 소박한 원형을 담지하고 있다. 누구를 내 몸과 같이, 내 눈동자처럼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판단이 개재되지 않는다. 눈동자에 위험물이 닥칠 때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눈꺼풀은 닫힌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이와 같이 절대적일 때만이 의미를 갖는다. 논리적 판단에 의한 감정의 축적이 아니다.
▲ 그리심산의 꼭대기 전경, 뒤로 보이는 산은 ‘저주의 산’ 에발(Mt. Ebal, 940m)이다. 그 사이 골짜기에 세겜(Shechem)지역의 수가(Sychar) 동네가 있다.
그러나 예수운동의 당파적 성격을 초대교회의 유대인 커뮤니티의 공동체적 성격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신명기와 레위기의 율법적 명제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또다시 유대인 커뮤니티의 당파적 성격을 타파하기 위하여 사마리아인의 무조건적 베풂이 이웃사랑의 전범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 계명이 이방선교의 보편주의적 명제로 해석되면서, 이웃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정언명령으로서 재해석된 것이다. 사랑은 용서이며 베풂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형량이나 특수한 감정적 사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웃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보편주의적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확대과정은 기독교발전사의 가장 긍정적인 한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인간 그 자체에 신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의 점진적 확대가 그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공관복음서의 한 원형인 도마의 명제는 뜻을 같이 하는 가까운 형제에 대한 소박한 사랑을 말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유가적일 수도 있다.
▲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제사장, 아론의 135대 직손인 아세르(Asher) 제사장이 사마리아 오경의 신명기 부분(6:4~9)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마리아 5경은 유대인 토라와도 다른 또 하나의 판본이다. 최초의 판본은 고대 페니키아어로 쓰여졌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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