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속의 불교, 불교 속의 유교
방편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선악을 확연히 구분하여 한 개체 내에 이미 그런 속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던지, 능력 여부 또한 한 개체 내에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어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본다던지, 조선은 유교의 나라로 불교는 아예 배척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편적인 사고는 복잡다단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은 있을지언정, 실제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린 티비에 범죄자로 나오는 사람을 보며 우리와는 다른 ‘악이 화신’이라도 된 양 생각하며 모든 걸 까발리고 사회에서 완벽하게 배제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여대며, 조선을 생각하면 모든 사회의 악이 가득 찬 시대로 그리며 그런 부조리한 사회가 500년이 넘게 지속되었기에 그 시대는 배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안에서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수시로 뒤바뀌며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모습을 드러내듯이 사회 또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한계도 분명히 있지만, 그 안에 지금은 미처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좋은 점도 있는 것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사회 체제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무작정 좋은 점들로만 덧씌워 우상화할 것도 아니고, 무작정 나쁜 점들로만 재구성하여 악인화할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을 하나하나 퍼즐 맞추듯 맞춰가며 구축하려는 마음의 정성이 필요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럴 때 조금이나마 본래면목을 엿볼 수 있게 되고, 이해하게 되니 말이다.
追惟旣往眞爲惑 | 이미 지난 걸 집착하는 것은 참으로 미혹한 짓이요, |
逆料將來亦是愚 | 장차 올 걸 미리 헤아리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짓이네. |
萬事當頭須放下 | 모든 일이 닥쳐오면 그대로 놓아둔 채 |
儘敎心地淨無虞 | 심지로 하여금 깨끗하게 해서 근심이 없게 하리라. 『靜虛堂』 |
『소화시평』 권하 81번에서 나오는 홍만종의 아버지인 홍주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유교보단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1구에선 ‘지나간 일에 휘둘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 일이기에 거기에 얽매일 경우 현재 또한 망가뜨리게 되며 미래의 가능성 또한 무너뜨리게 되니 말이다. 과거에 집착하는 걸 심리학적으론 트라우마라고 한다. 트라우마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불안증과 걱정으로 현재를 좀 먹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인연을 만나더라도 거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과거의 망령을 현재로 끌고 와 모든 것들을 무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상황에 쉽게 빠진다. 그나마 합격점수에 거의 다다르지 못한 경우라면 낫겠지만 합격점수 근방이거나 아예 1차에 합격했다가 최종에서 떨어진 경우면 그 다음 해에 공부를 하면서도 ‘그때 조금만 더 해서 합격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현재마저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2구에선 시점을 ‘미래로 옮겨 오지 않은 상황에 대한 걱정일랑 하덜 마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구에선 과거를 향하던 마음을 이야기했다면 2구에선 미래를 향하는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미래에 대한 낙관이랄지 희망이 아닌, 불안과 걱정에 대한 것이다. 그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해나갈 텐데도 알 수 없는 미래가 불안한 나머지 벌벌 떨며 현재를 좀 먹는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화두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더 불리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하고 돈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각종 보험을 들어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하려 한다. 다가올 미래가 엄청 불안하니 이런 식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이건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임용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가 된다’는 확신보단 마지못해 한다는 심정이 강해지고 ‘올해도 떨어지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수시로 닥쳐온다. 결국 이런 불안증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과거-현재-미래를 포괄하는 개념은 불교의 유입과 함께 대두되었다. 그로 인해 한 생애를 세 단계로 나누어 사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선 불교 서적에 재밌는 구절이 있다.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금강경金剛經』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은 없다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 아니하고 구하지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 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하느니라.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12절
이 두 개의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이미 홍주세가 시에서 얘기한 것과 얼마나 유사점이 많은 지를 알게 됐을 것이다. 그건 곧 성리학 자체가 송나라에 불어 닥친 불교의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불교의 이론과 심성을 채용하여 논리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성리학 속엔 불교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이다.
3구에선 그렇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끊어버리고 난 후에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닥쳐왔을 땐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내려놓아야 그 상황에 휩쓸리지 않게 되고 그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져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기에 4구에선 마음을 청정한 상태로 만들어 근심하지 않게 하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누가 봐도 불교적인 색채가 물씬 느껴지지만 홍만종은 이 글의 서두에서 아버지의 글은 성리학에 뿌리를 뒀다고 말했고 그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결론에선 신익성의 비평을 인용하며 “참된 선비의 말[眞儒者語]”이라 확실히 마무리 지었다. 이런 게 바로 한 편의 글에 담긴 수미상관이라 할 수 있다. 홍만종의 수미상관을 따라 나도 이 글을 수미상관 기법으로 마무리 지어야겠다. 이 글의 서두에선 분명히 방편적인 이해보다 전체적으로 보면서 이해하는 게 좋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대로 이 시를 본다면 이게 불교적인 색채가 많은지, 유교적인 색채가 많은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깨달음이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논의를 전개한 것이니, 거기서 굳이 종교를 나눈다는 건 너무 지엽적인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를 볼 땐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 그 말에 귀 기울이며 맘에 담아놓기만 하면 된다. 이 시의 주제에 따라 과거와 미래에 휘둘리지 말고 현재 닥쳐온 상황을 받아들인 채 벌벌 떨기보다 인정하고 서서히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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