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리대로 참 모습을 보라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5-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須菩堤!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견여래불?”
‘여리(如理)’는 ‘리와 같이’ ‘리대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그리고 물론 이것은 한역불교에서 더 뚜렷이 발전된 개념이지만, ‘리(理)’라고 하는 것은 ‘사(事)’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사(事)는 인연의 사실들이다. 리(理)는 그 인연의 사실들을 일으키고 있는 연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본체론과는 다르지만 본체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리(理)는 진여(眞如)의 세계며 그것은 생멸(生滅)의 세계가 아닌 생멸을 일으키고 있는 그 자체의 세계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언어는 오로지 생멸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며 진여의 세계에서는 언어가 격절된다. 본 분(分)에서 말하는 ‘상(相)’은 바로 언어와 관련되는 것이다. ‘여리(如理)’는 곧 언어를 격절시킨다는 뜻이다.
‘실견(實見)’에서의 ‘실(實)’은 역시 부사적 용법으로 ‘여실히’의 뜻이다. 그러니까 ‘여실하게 본다’의 뜻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참 모습을 보라!’라고 번역하였다. 언어가 격절된 그 자리에서 그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이 분을 시작하기 전에 이 분의 내용과 관련하여 또 불교의 중요한 이론체계 하나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위 ‘삼신설(三身說, trayaḥ kāyā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붓다라는 존재(存在)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 즉 우리의 붓다에 대한 인식의 구조를 밝힌 이론이다. 삼신(三身)이란 보통, 1) 법신(法身, dharma-kāya) 2) 응신(應身, nirmāṇa-kāya) 3) 보신(報身, saṃbhoga-kāya)을 말하는데, 이외로도 화신(化身, nirmāṇa-kāya)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이외로도 또 수없는 신(身)들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의미의 해석도 모든 경전이 제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그래서 불교학도들이 이것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보면 때로 심하게 혼효(混淆)되어 있다. 그러나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대체로 합의(合意)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법신(法身)은 ‘진리의 신체’를 의미하며 영원불변의 진리의 당체를 가리킨다. 법불(法佛)이니 법신불(法身佛)이니 법성신(法性身)이니 자성신(自性身)이니 여여불(如如佛)이니 여여신(如如身)이니 실불(實佛)이니 제일신(第一身)이니 진신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이의 다른 이름들이다.
둘째로, 응신(應身)이란 온갖 중생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간(世間)의 사람들의 부름에 향응(響應)하여 나타나는 신체라는 의미로서 응신(應身), 응신불(應身佛), 응화신(應化身) 등으로도 불리운다. 응신은 크게 보면 결국 색신이다.
셋째로 보신(報身)이란 우리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으로서 행업(行業)을 쌓아 그 행업(行業)의 보(報)로서 완전한 공덕(功德)을 구비한 불신(佛身)이 되는 것을 말한다.
법신(法身) | dharma-kāya | 진리의 신체 |
응신(應身) | nirmāṇa-kāya | 사람들의 부름에 향응하여 나타나는 신체 |
보신(報身) | saṃbhoga-kāya | 행업(行業)의 보(報)로서 완전한 공덕을 구비한 불신이 되는 것 |
그런데 이렇게 해설을 하면 뭔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나 도올은 현재 역사적으로 살아 있다. 이 도올은 색신(色身)을 구비한 자(者)로서 매일매일 밥먹고 똥싸고 울고 불고 애들하고도 다투고 살고 있다. 아마도 나의 아내 같은 사람이 내 옆에서 바라보는 나는 분명히 살아있는 역사적인 실존적 인물이다. 내가 방귀라도 뀌면 아내는 옆에서 실제로 쿠린내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책으로 나를 접하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나를 접하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책 속에서 지금 방귀를 꾸었다고 해도 그 냄새를 맡을 리가 없다. 그들은 오직 내가 설하는 진리만을 이 책을 통해 접하고 그 진리의 주체로서의 도올 김용옥이라는 존재를 그냥 상정할 뿐이다. 내가 죽고난 다음에 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 인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이 두가지로 나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첫째방식을 색신(色身)이라 하고 그 둘째방식을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색신이란 역사적 실존인물을 가리키는 것이요, 법신이란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색신(色身) | Historical Buddha 역사적 붓다. |
Historical Jesus 역사적 예수 |
법신(法身) | Buddha as Spiritual Principle 정신원리로서의 붓다 |
Jesus of Faith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즉 그리스도 |
역사적 붓다나 역사적 예수는 모두 색신(色身)을 이름이요, 정신적 원리로서의 붓다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모두 이 법신(法身)을 가리킨 것이다. 오늘 나 밥먹고 똥싸는 김용옥은 색신(色身)이요, 먼 훗날 도올서원의 강의자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추상적 김용옥은 법신(法身)이다. 붓다의 사후부터 대승불교 중기(中期) 즉 4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이 색신(色身, rūpa-kāya)과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고 하는 명료한 이신(二身)의 개념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 이신(二身)이, 잡소리를 좋아하는 많은 이론가들에 의하여 복잡한 개념으로 발전케 된 것이다. 삼신(三身)사상에서 응신(應身)이니 화신(化身)【중생(衆生)의 교화(敎化)를 위하여 종종(種種)의 형체를 취(取)하여 화현(化現)하는 불(佛)】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 색신(色身)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보신(報身)이란 이 응신(應身,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의 개념의 중간자적 통합으로서 후대에 제시된 것이다.
色身(역사적 붓다) 색신 |
應身(化身) 응신(화신) |
報身 보신 |
法身(진리체로서의 붓다) 법신 |
그런데 삼신(三身)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색신(色身, 응신應身)과 법신(法身)의 두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인류의 종교사에 모두 공통된 문제의식의 아키타입(원형)인 것이다.
기독교의 문제점은 법신(法身) 예수를 모르고 색신(色身) 예수에게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점은 색신(色身) 붓다를 너무 무시해 버리고 법신(法身)붓다만을 진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종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구분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색신(色身)의 신화화(mythologization)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심각하게 봉착한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에 못박혀 있던 인간이 무덤 속에 가사상태로 사흘 정도 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현대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 해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얼마든지 초대교회의 제자들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날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픽션이 순식간에 퍼져 당대의 사실로 확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쉽사리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상식적이고도 건강한 논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입에 담지 못할 이단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사실적 가능성에 대한 논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초대교회의 성립이 선행하고 부활이 날조되었다기보다는, 초대교회의 성립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인하여 성립한 것이고, 사도 바울의 개종 자체가 ‘부활의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기에, 만약 예수부활을 이렇게 사실적 가능성으로 기술하게 되면 기독교사가 성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신학이 성립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살아났다!
그런데 우리의 해결은 바로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는 색신(色身)의 사실이 아니라 법신의 사실인 것이다. 예수의 법신(法身)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 논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사실이요, 소망의 사실이요, 대망의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적 진리의 사실이다. 기독교가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애초부터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혼동이 생기고 오히려 색신(色身)의 신화화라는 미신만을 낳게 된 것이다. 예수의 색신(色身)에 집착하고 있는 뭇 중생들에게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상식에 어긋나는 쌩거짓말들만 내뱉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분리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미륵불의 하왕생’보다도 더 리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20세기 기독교신학이 ‘역사적 예수’에 집착하고, 또 그 역사적 예수의 논의가 과거의 신화화에 대한 비신화화를 추구하며, 양식사학(Form Criticism, Formgeschichte)이라고 하는 매우 정교하고 존경스러운 문헌비평의 학문방법까지 탄생시켰지만, 그 모든 논의의 근본 오류는 예수의 색신(色身)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불트만신학을 읽을 만큼은 읽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웁게도 치밀한 지식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아주 단순한 지혜를 결여하고 있었다. 종교현상은 그것을 비신화화하기에 앞서 그 자체의 법, 다르마로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예수의 색신에 대한 집착에서 근원적으로 떠나야 한다! 카톨릭신학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Trinitarianism)도 오로지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신비적 이동(異同)의 문제만 집착하고 있을 뿐, 내가 말하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명료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 쓸모도 없는 복잡한 교리가 되고 만다. 그것은 후대교회의 성찬제식론의 일부로 등장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한 말엽적 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근원적으로 기독교의 테마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에 비하면 불교는 역사적 붓다를 너무 초기부터 법신화(法身化)시켜 버렸다. 붓다의 생애 자체가 신비적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러니칼하게도 더 추상화되고, 예수의 생애는 너무도 신비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구체화된 것이다. 불교의 삼신론(三身論)의 주체는 법신(法身)이다. 싯달타라는 카필라성의 왕자, 그 색신(色身)은 법신(法身) 위에 잠깐 걸쳐진 지푸라기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불교가 색신(色身)을 무시하고 법신(法身)에 집착한 것은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나 도올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와 우주 전체의 이법을 논하는 웅대한 정신에 접한다. 그러나 사실 나 도올은 출판사에 다녀오다가 경찰한테 티켓이라도 뜯기는 판에는 애승이 전경아저씨한테 살살 빌고있는 초라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치주염으로 몹시 고생하고 있는데, 치과에 가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은 그 끔찍하도록 짜릿한 큐렐의 공포 이외에는, 우주고 인간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냘픈 서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색신(色身)이 이렇게 초라하다 해서, 감히 이 도올의 우주적 정신을 얕봐서야 되겠는가? 붓다의 본질은 색신(色身)에 있지 않고 법신(法身)에 있다. 나 도올의 가치는 김용옥의 색신(色身)에 있지 아니하고 법신(法身)에 있다. 그것은 나 색신(色身)의 더러움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그 인간이 설(說)하는 법(法, 진리)에 있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철칙을 논구하고자 함이다. 나 색신을 괴롭히지 말라! 길거리에 걸어가는 나 도올을 놓고 쑥떡꿍 쏙딱꿍거리지 말라! 나는 매일 매일 울고 웃는 초라한 인간이니까. 붓다도 예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 1절에서 ‘신상(身相)으로 여래(如來)를 보지말라’는 뜻은 바로 붓다를 색신(色身)으로 바라보지 말고 진리의 구현체인 법신(法身)으로서 바라보라는 대승(大乘)의 명령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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