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설하는 자도 없고 설되어지는 자도 없다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21-1.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堤!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人言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堤!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하이고? 약인언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진실로 이 후반의 경(經)이 없었더라면, 『금강경』은 오늘의 『금강경』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그 언어가 반복이 아니요, 우리의 폐부(肺腑)를 찌르는 신랄함으로 잠들어 있는 우리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내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곧 너는 나를 비방하는 자라! 그 얼마나 신랄하고 통렬하고 장쾌한 일언(一言)인가! 이 주제는 제6분 마지막에서 뗏목의 비유로 비치었고, 7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던 주제였다. 그러나 이 21분의 어조는 훨씬 더 촛점이 강렬하고 날카롭게 독자를 치고 들어 온다. ‘곧 너는 나를 비방하는 자라(즉위방불卽爲謗佛)!’. 이제 다음의 『성경』 구절을 들어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누구든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이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면 그는 곧 나 예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이른 바를 깨닫지 못한 자라. 나는 길이 아니요, 진리가 아니요, 생명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 얼마나 위대한 성경의 말씀인가? 그런데 이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4복음서에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이 말씀은 바로 『대승복음서』에 쓰여져 있는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 너희에게 이르노니 『대승복음』이 없이는 「마태복음」이 「마태복음」이 아니요, 「마가복음」이 「마가복음」이 아니요, 「누가복음」이 「누가복음」이 아니요, 「요한복음」이 「요한복음」이 아니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다. 재미있게도 이 말씀은 여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공관복음서가 아닌 「요한복음」 특유의 논리 구조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장면,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최후의 만찬 후에 이루어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고별강연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색신(色身)의 무화(無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길을 보여주고, 진리를 설하며, 생명을 얻게 하여 준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길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생명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곧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인간의 언어가 격절(隔絶)된 곳에 서있는 성령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로고스사상이요, 이것이 바로 그노시스사상이다. A가 곧 B라고 하는 것은, A라는 주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지고 길만 남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있고 또 길이 있다면 예수는 영원히 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라는 것은 나의 무화(無化) 즉 무아(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한 것은 예수의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맥락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죽음은 곧 『금강경』이 설(說)하는 ‘무아(無我)’인 것이다. 즉 예수의 아(我)가 죽고, 예수의 말을 듣는 나의 아(我)가 죽을 때만, 길과 진리와 생명은 현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내가 말한 바, 『대승복음』이 없이는, 4복음서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보지 않고 『성경』의 문자만을 보며, 예수의 법신(法身)을 보지 않고 예수의 색신(色身)만을 보고 있다.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를 보지 않고, 복음서 기자의 말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17절의 말씀을 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7).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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