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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2. 네 분야의 열 명의 뛰어난 이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선진 제십일 - 2. 네 분야의 열 명의 뛰어난 이들

건방진방랑자 2022. 12. 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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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네 분야의 열 명의 뛰어난 이들

 

 

1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라와 채()나라에서 나의 고난에 동참했던 제자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취직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11-2. 子曰: “從我於, 皆不及門也.”
 
덕행(德行)에는 안연ㆍ민자건ㆍ염백우ㆍ중궁이 손꼽히고,
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언어(言語)에는 재아ㆍ자공이 손꼽히고,
言語: 宰我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ㆍ계로가 손꼽히며,
政事: 冉有季路.
 
문학(文學)에는 자유ㆍ자하가 손꼽히노라.
文學: 子游子夏

 

진ㆍ채의 역사를 상세히 논할 필요는 없다. 공자의 의식 속에 그것은, 자기의 괴로운 떠돌이 주유의 생활역정 속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체험으로 남아 있는 에너지 덩어리일 뿐이다. BC489년경 진ㆍ채의 국경 언저리에서 아사(餓死)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거구(巨軀)의 공자로서는 먹지 못하는 고통 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급문(不及門)’의 해석은 나는 신주를 따르지 않고 고주를 따른다.

 

 

이 장의 뜻인즉, 나를 따라 진ㆍ채의 고난에 같이 참여한 제자들이 모두 벼슬에 나아가는 기회에 못 미쳐 마땅한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言弟子之從我而危於陳蔡者, 皆不及仕進之門, 而失其所也.

 

 

덕행(德行)’ 이하의 사과십철(四科十哲)은 원래 공자의 평론이라고 생각되나 공자가 직접 한 말로서 기술되지는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을 이름으로 부르는데 여기는 다 자()로써 호명되어 있다. 이것은 공문에서 노래처럼 암창(暗唱)되어온 유명한 구문이었을 것이다. ()과 공()이 압운이 되고, ()와 하()가 압운이 된다. 로와 하는 상고음 운부가 동일하다. 쉽게 말하면 주요모음이 같아 압운이 된다. 탁월한 제자의 재능 열 사람을 덕행ㆍ언어ㆍ정사ㆍ문학이라는 4카테고리로 분류하여 논평하는 공자의 견식에 우리는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공자 자신의 말이었기에 권위를 가지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노래부르듯이 암창되어 온 것이다.

 

 

()’은 거성이다. 공자가 일찍이 진ㆍ채의 사이 국경지대에서 엄청난 곤액(困厄)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은 제자들이 그와 곤액을 같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그의 문하(門下)에 있지 않은 것이다沃案. 주자의 해석은 어색하다. 다 문하에 있었다. 고주의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대저 환난 가운데서 같이 고생하던 그 의로운 추억을 잊지 아니 하는 것이다.

, 去聲. 孔子嘗厄於陳蔡之間, 弟子多從之者, 此時皆不在門. 故孔子思之, 蓋不忘其相從於患難之中也.

 

()’은 거성이다.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에 의거하여 이 열 사람을 기록한 것이다. 아울러 그 소장(所長: 특출난 분야)을 지목하여 사과(四科)로 분류하였으니, 공자가 사람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각기 학생들이 장끼로 삼는 재능에 따라 가르쳤음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 去聲. 弟子因孔子之言, 記此十人, 而幷目其所長, 分爲四科. 孔子敎人各因其材, 於此可見.

 

정이천이 말하였다: “‘사과(四科)’라는 것은 부자께서 진채에서 곤액을 치르실 때에 같이 있었던 자들이다沃案, 자유ㆍ자하는 그때 같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 자유는 18, 자하는 19세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문인들 중에 어진 자들이 이 열 명에 그치지 않는다. 증자께서는 도()를 전()했는데도 이 열 명에 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십철 운운하는 것은 세속의 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程子曰: “四科乃從夫子於陳蔡者爾, 門人之賢者固不止此. 曾子傳道而不與焉, 故知十哲世俗論也.”

 

 

정이천은 인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어찌 자기의 연역적 전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공자의 말씀까지 왜곡하는가? 여기 우선 전도(傳導)’ 운운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자기 말이며, 자기 편견 속의 도통론이며, ‘전등(傳燈)’이라는 불교용어를 도용한 빈곤한 언설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역사적 사실이다. 증삼은 자장(子張: 최연소자, 48세 연하)을 제외하고는 가장 연소한 사람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최연소자라 할지라도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자장 과는 달리 공문내에서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아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속칭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둔하고 이름이 없었기에 오히려 공자 사후에 공단을 리드하는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정이천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몰랐을 사람도 아닌데, ‘증자가 안 끼어 있다고사과십철을 운운하는 맥락에서 정이천이 중심이라는 어린아이를 증자운운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사과십철 자체를 무가치한 속론(俗論)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정이천의 인격과 학문의 인테그리티(integrity, 무결)를 의심케 하는 것이다. 전도(傳道)를 운운한다면 그것은 모두 공자 사후의 일일 뿐이다. 어떻게 사후(死後)의 일로써 사전(死前)의 사실을 왜곡하려는가? 정이천이 이와 같이 도통론에 미쳐 이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주희가 도통론에 전념하게 되었고, 조선왕조의 유자들이 더욱 그 악폐를 답습하게 되었다. 에도의 유자들은 콧방귀도 안 뀌는 도통론에 이토록 미쳐버렸기에,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도 도통론적 기독교가 된 것이고(정통ㆍ이단만을 광신적으로 이분하는 기독교), 경제발전도 몇 기업의 도통만을 강조하는, 중소기업의 다양한 대중기반을 묵살하는 파행적 경제형태가 된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조선유학에서 주리론과 도통 론이 결합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그 폐해가 크다.

 

여기 1과 제2, 그리고 말미의 2324은 공자가 제자의 취직(就職)에 관해 관심을 표한 주제를 반영하고 있어서 본 편의 성격을 시작과 끝에서 규정하고 마무리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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