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주하려는 선비는 선비가 아니다
14-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비랍시고 익숙한 생활환경에 안주하기만을 바라는 자는 선비라 할 수 없다.” 14-3.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
‘거(居)’라는 글자에는 12-20에서 설명했듯이, 반드시 사생활(private life)과 일상성(daily life)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책상다리 하고 앉아(공자시대에는 의자생활이 아니었다) 엉덩이를 붙인 사적 공간에서의 안락함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20세기의 우주론을 구축한 대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진ㆍ선ㆍ미라는 문명의 3대 가치에서 선은 미로 환원될 수 있으며 그 대신 모험(Adventure)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는데 ‘회거(懷居)’란 삶의 안락함만을 그리워하고 모험을 거부하는 것이다. ‘회(懷)’는 ‘생각한다’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여기 ‘거(居)’라는 것은 익숙한 삶의 환경의 안락이다. 안락이 고착되면 완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이해에 관한 가장 근원적인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도 완벽의 정적(靜的)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No static maintenance of perfection is possible. Adventures of Idias, 274). 진취냐, 부패냐, 그것만이 우리 삶에 주어진 유일한 선택의 가능성이다. 공자는 『논어』의 모든 파편을 통하여 삶의 정태(靜態)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모험을 감행하여 새로운 가능성에로 자기를 던진다. 그는 인(仁)이나, 예악(禮樂)이나, 문(文)이나, 그 모든 가치를 과정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고정된 실체로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천지의 대미(大美), 그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었고, 따라서 하느님도 과정일 뿐이다.
플라톤은 수학의 심미적 아름다움에 기만당하여, 지성이 생각할 수 있는 모 든 것을 불변하는 완벽(unchanging perfection)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이데아의 초월적 세계를 건설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헤브라이즘의 종교적 초월성이 헬레니즘시대에 네오플라토니즘이나 중기플라토니스트(Middle Platonists)들의 철학과 결합하면서, 바울의 철학과 요한의 철학을 형성시켰고 그것이 중세기의 질곡으로 고착되었다. 이제 우리는 중세기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르네상스를 구가할 것이 아니라, 서양 2500여 년의 관념론 질곡 전체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류의 르네상스를 구가해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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