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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헌문 제십사 - 18. 관중이 환공을 도왔기에 문명을 지킬 수 있었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헌문 제십사 - 18. 관중이 환공을 도왔기에 문명을 지킬 수 있었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1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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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관중이 환공을 도왔기에 문명을 지킬 수 있었다

 

 

14-18.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관중(管仲)은 인자(仁者)가 아닐 것이외다. 환공(桓公)이 자기의 주군 규()를 죽였는데도, 같이 죽기는커녕, 환공 밑에서 재상 노릇을 하다니요.”
14-18.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하여, 천하를 크게 한 번 바로잡으니, 중원의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은혜를 입고 있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상투 없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덮어 매는 좌임(左衽)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필부(匹夫)ㆍ필부(匹婦)들이 조그마한 신의를 위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코자 작은 도랑가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아니 하는 상황에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느뇨?”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자공(子貢)의 질문은 전장의 자로(子路)의 논리와 대차가 없다. 이에 대한 공자의 관중디펜스도 전장과 같은 논리이나 매우 포괄적이고 더 확실하다. 공자는 관중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공자 자신의 관점인지, 헌문이 편집된 시기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자 자신의 관점이 분명히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공자는 쩨쩨한 도덕군자가 아니었다. 현실적인 승자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삶의 자세가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진시황을 나쁜 놈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진시황위대한 성군으로서 다시 둔갑했다. 진시황에 대한 도덕적 가치평가에 앞서, 오늘의 중국이라는 통일체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준 사람으로서 진시황의 은공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시황에 의한 통일적 문명의 창조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오늘날 분명 유럽의 형태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는 대륙이었다. 오늘날 중국인이 진시황을 긍정하듯이, 지금, 공자는 똑같이 중원의 제국(諸國)에 통일적 아이덴티티를 제공해준 관중(管仲)의 패업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적 시각에서 관중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피발(被髮)’은 머리를 상투 형태로 단속하지 아니 하고 풀어놓은 오늘날의 형태이다. 모발고착제나 고데 같은 기술이 없으면 오늘의 머리는 히피 머리처럼 결국 다 피발이다. 서양야만족의 피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한말의 지성인들이 그토록 내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頭可斷, 髻不可斷]’고 반발한 것이다. 그들의 관념 속에서는 관중의 문명건설이래 공자의 긍정을 통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위대한 사문의 전통이 상투에 결집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좌임(左衽)’은 오른쪽 옷깃이 위로 가는 형태이다. 우리가 두루마기를 입는 형태(우임右衽)와 반대인데, 이 좌임은 오늘날에도 여성양복에 적용되고 있다. 역시 서양오랑캐의 풍습이다.

 

미관중(微管仲)’()’는 부정사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는 일부다처가 용인되었던 고대사회에서 재정적으로 일부일처밖에 할 수 없는 고달픈 일반 서민들을 가리킨다. ‘()’소신(小信, 작은 신의)’이라고 희가 주했고, ‘()’(, 목매달다, ‘으로 발음할 수도 있다)‘라 주했다.

 

자경어구독(自經於溝瀆)‘은 좀 이해가 어렵다.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다인데, 꼭 도랑에서 목매달 이유가 없다. 개천 위에 외나무다리 같은 데서 줄 걸고 목맨다는 뜻일까? 황소는 소홀(召忽)이 개천에 몸 던져 죽은 것에서 이런 비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목맨다는 뉘앙스는 없다. 목매달아 죽은 시체가 도랑에 뒹군다는 주석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석연치 않다. 결국 구독(溝瀆)’이란 자살방법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떳떳하게 남들이 보는 십자로나 광장에서 목매다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동네의 도랑이나 냇가에서 목매단다는 뜻이다. 우리 어릴 때도 냇가 곁의 느티나무나 버드나무에 목매달아 죽는 사 람이 많았다. 그런 정황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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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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