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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이는 속이 좁고 유하혜는 불공하다
2a-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伯夷)【은나라 말기, 혁명의 시기를 산 작은 제후국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는 임금다운 임금이 아니면 아예 섬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친구다운 친구가 아니면 아예 친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악인(惡人)의 조정에는 서지 않았으며, 악인(惡人)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않았다. 악인의 조정에 서며, 악인과 더불어 말한다는 것은 엄숙하고 화려한 조의(朝衣)ㆍ조관(朝冠)을 잘 차려입고 진흙길이나 석탄구덩이에서 뒹구는 것과도 같이 끔찍하도록 더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백이가 악을 미워하는 그 심정을 미루어 살펴보건대, 동네 사람들과 같이 서있을 때에도 옆에 있는 사람이 관(冠)이라도 삐딱하게 쓰고 있으면 창피하게 생각하여 지체 없이 떠나버렸으며, 이는 오래 머물다보면 자신이 물들어버리고 만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제후들이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정중한 초빙장을 보내어도 그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왜 거절했을까? 그는 단지 섬길 만하지 않은 군주를 섬기는 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뿐이다. 2a-9. 孟子曰: “伯夷, 非其君不事, 非其友不友. 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 立於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坐於塗炭. 推惡惡之心, 思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 是故諸侯雖有善其辭命而至者, 不受也. 不受也者, 是亦不屑就已. 노나라의 가로(家老)인 유하혜(柳下惠)【노나라의 대부인 전무해(展無駭)의 아들. 명이 획(獲)이고 자가 금(禽), 혹은 계(季)라고도 한다. 그가 사는 집에 거대한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의 은혜를 입어 훌륭하게 되었다고 해서 유하혜라는 별명이 붙었다고도 하고, 그가 받은 채읍(采邑)이 유하(柳下)였고 혜(惠)는 시호라는 설도 있다. 『열녀전』에는 유하혜의 부인이 혜(惠)라는 시호를 내렸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보통 전금(展禽)이라 부른다】는 백이와는 아주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유하혜는 오명이 있는 군주라도 부끄럽게 생각치 아니 하고 섬겼으며, 비천한 관직이라도 비천한 관직이라 생각치 아니 하고 받아들였다. 조정에 나아가면 자기의 재능과 덕성을 숨기지 않고 발휘하였으며, 반드시 사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도를 행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임금이 자기를 버리면 버리는 대로 자리를 떠나 원망하지 않았으며, 곤궁한 생활에 처해도 걱정근심이 없었다. 이러한 기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이렇게 뇌까리곤 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내 곁에서 발가벗고 개지랄을 한들, 그것은 너의 무례일 뿐, 그것이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으랴!’ 그러면서 그런 인간들과도 즐겁게 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자신의 정도(正道)를 조금도 잃지 않았다. 자기를 붙들어 주는 군주가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붙들면 그 자리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그가 떠나는 것만이 깨끗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柳下惠, 不羞汙君, 不卑小官. 進不隱賢, 必以其道. 遺佚而不怨, 阨窮而不憫. 故曰: ‘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故由由然與之偕而不自失焉, 援而止之而止. 援而止之而止者, 是亦不屑去已.” 맹자께서는 이 말씀에 총평을 다음과 같이 가하셨다: “백이는 너 무 좁고, 유하혜는 너무 공손치 못하다. 좁음과 공손치 못함, 이 두 가지 덕성은 다 군자가 배울 바가 아니다.” 孟子曰: “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 |
참으로 그 대비가 리얼하고 맹자의 총평 속에도 그 확고한 입장이 드러나 있다. ‘백이’는 우리나라 조선조의 향유들의 협애함을 잘 나타내고 ‘유하혜’는 도가적 인생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맹자는 이 양극단을 다 배제하고 있으나, 나는 이 양 측면이 모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양면을 포섭해야만 참으로 폭넓은 인격이 형성될 수 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양극단의 포섭이라는 자사의 논리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논어(論語)』에는 백이와 숙제가 항상 같이 나오는데, 『맹자』에는 백이를 말할 때 숙제가 수반되지 않는다. 그리고 맹자는 백이의 결벽만을 강조하고 그가 수양산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다(『논어』16-12), 설화전승의 복잡한 양식의 갈래들을 시사하고 있다.
맹자의 논리는 공자야말로 ‘성인다움의 시중을 얻은 분[聖之時者]’(「만장」 하1)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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