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사람은 어린 시절에 많은 꿈을 꾼다. 그러다 성장하면서 하고 싶은 일은 점점 많아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줄어드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삶은 반대인 것 같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할 때 내 수업을 들었던 김지훈 군이 어느 날 사회인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손자병법』 주석본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손자병법』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대학에서 전쟁사를 강의할 때 문득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세상에 선보인 『손자병법』 해설서가 대체로 경영이나 처세서로 주목받는 것을 볼 때 드는 아쉬움과 함께, 손자의 본의와는 동떨어져 형식적이고 현학적으로 해석된 내용을 접했을 때 드는 학자로서의 불만이었지 정말로 쓰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부탁을 받자 욕심이 생겼다. 한창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열중할 때여서 더 그랬던 듯하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전쟁의 현실과 동떨어진 해석, 이런저런 사례에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이는 해석이 눈에 밝혔다. 그래서 손자 시대의 전쟁을 연구하고, 손자의 문제의식을 재현하고, 이것을 실제 전쟁사에 한 획을 그은 전투, 그 전투에서 활약한 명장들의 전술과 직접 비교 분석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끼리는 통한다는 말이 있다. 기원전 4세기에 서양과 중동 지역에서 활약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술이나 그보다 약 200년 앞선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에서 활약한 손자의 생각이나, 알고 보면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오랫동안 나폴레옹이 『손자병법』을 통독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돌았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지만, 나폴레옹의 전쟁을 보면 손자의 이론과 유사한 부분이 정말 많다. 한때는 아예 손자와 나폴레옹을 붙여서 해설서를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이런 건 우연이 아니다.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천재들의 발상이어서 비슷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생리와 조직의 원리, 전쟁에 임하는 인간의 심리, 투지, 공포, 생존본능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란, 전체를 보는 시각과 분석력, 통찰력,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와 결단력에서 앞서며, 병사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예리하고 정확한 사람들이다. 손자도, 전쟁의 역사에서 활약한 수많은 리더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춘추시대 말기에 쓰인 손자의 전쟁 원론이 첨단 무기가 횡행하는 현대의 전쟁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손자병법』은 처세서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 말은 처세술에 맞춰 끼워 넣은 해석이 옳지 않다는 뜻이다. 전쟁의 원리, 군 조직과 장수의 리더십, 분석과 통찰은 사회와 조직, 개인에게도 무수한 영감을 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손자병법』의 주석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손자의 해석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전쟁 방식에 맞추어 손자의 진의를 찾고, 그것을 응용한 사례는 철저하게 전쟁사 속에서 찾아 비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뭐든 처음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부족한 게 아니라 오히려 과유불급이었다. 『손자병법』이라는 특별함으로 인해 의욕이 과했던 듯하다. 올재에서 발간한 첫 책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담았다. 잘못 이해하고 오용되는 부분을 교정하려는 의욕도 지나치게 강했던 것 같다. 이를 깨닫고 나서 전체적으로 수정해서 개정판을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집중해서 다시 손봤다. 사고를 복잡하게 하는 부분을 잘라내고, 좀더 명확하고 직관적인 해설서가 되도록 다듬었다. 책을 내고 나서 지금까지 『손자병법』을 강의하면서 추가로 연은 깨달음도 더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손자병법』의 해설서가 있다. 송나라 이후로 명청 대에 쓰인 손자의 해설서와 응용서는 수천 권이 넘을 것이다. 그러나 손자의 본의를 역사에서 찾고, 전쟁사의 사례와 정밀하게 대조한 해설서는 극히 드물다고 자신한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기에 여전히 조바심이 나지만, 그렇더라도 어느덧 10년 이상 노력을 더하고 더한 책이 되었다.
이 책의 출간을 함께해준 교보문고에 감사하고, 꼼꼼하게 검수해준 담당 편집자에게도 감사드린다. 늘 서재에 처박혀 수십 년째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되어주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아내와 아들과 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24년 12월
임용한
손자병법의 편명에 대한 설명
『손자병법』은 모두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나라 시대에 간행되고 1972년 중국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 고분에서 출토된 『손자병법』에는편명의 일부가 「계(計)」 「형(形)」과 같이 한 글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한 글자제목이 이해가 잘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송나라 때에 역대의 대표적인 병서를 모은 『무경칠서(武經七書)』가 편찬되는데 여기 수록한 『손자병법』은 편명이 「시계(始計)」 「군형(軍形)」 「병세(兵勢)」와 같이 두 글자로 되어 있다.
두글자 편명은 뜻을 명확하게 해주지만 손자의 심오한 사고를 제약하는 단점도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본래의 편명을 사용했다.
제1편
계(計)
‘계’는 전쟁을 결정하기 전에 양측의 전력을 분석하고 승패와 승산을 예측하며, 전쟁의 목적을 구상하는 단계다. 손자는 훌륭한 리더라면 정확한 분석을 통해 “싸우기도 전에 이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1. 전쟁은 국가의 대사다
전쟁【병(兵)은 전쟁, 병사, 군사(軍事), 용병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군사, 용병도 현대의 개념과는 좀 다른 의미가 있어서 본문에서는 문맥에 따라 적절하게 번역했다.】은 국가의 대사다.
그러므로 사지와 생지, 생존과 멸망의 원리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孫子曰: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그간 수많은 해설서들이 손자【손자(孫子)는 기원전 6세기경의 인물로, 본명은 손무(孫武)다. ‘손자’는존칭.】의 첫마디가 지닌 각오와 자세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 말이 내포한 치열한 현실감과 긴장감을 놓치니 거의 모든 해석이 현학(玄學)으로 갔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다.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전쟁의 잔혹함을 경고하고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려고 하신 말씀이다.”
나는 손자가 전쟁광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병서다. 손자가 하고 싶은 말은 애먼 평화 타령이 아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쟁을 경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손자의 진의는 다음과 같다고 본다.
첫째,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패하면 멸망하거나 소멸할 수도 있다. 루이 11세(Louis XI, 1423~1483)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만큼 위험한 수단은 없다. … 다른 일은 잘못되어도 나중에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면 그것을 보상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승자는 모든 것을 얻는가? 그렇지도 않다. 승자도 전쟁의 후유증을 겪는다. 유럽 국가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ⅠㆍⅡ) 후유증으로 경제력에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다음 순위로 밀려났다. 전쟁을 시작하려면 승리의 가능성, 전쟁으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냉정하고 명확하게 계산하고 전쟁에 임해야 한다.
둘째, 전쟁에는 모두의 생명, 운명, 재산과 삶이 걸려 있다. 전쟁터의 법칙과 일상의 법칙은 완전히 다르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각오한 뒤 시작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의외로 수많은 장수와 경영자를 포함한 리더들이 이 단계에서 소홀하거나 실패한다. 부담감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냉철한 분석보다 “하면 된다” “사람이 한번 칼을 뽑으면…” 같은 피상적인 문구로 자신을 격려하며 전장으로 뛰어든다.
계획을 세우고 실현 방법을 구상하는 작전회의 과정에서도 상대와 현장의 상황을 배제한 채, 자기만의 당위성으로 밀어붙이고 긍정의 힘으로 결과를 확신한다.
손자가 첫 줄에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규칙을 수긍하고 시작해야 한다. 기술자가 되려는 사람은 손에 기름 묻히는 것에 동의해야 하고, 해양학교 학생은 뱃멀미와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병법은 파괴와 죽음의 현장에 뛰어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병법은 전쟁을 회피하는 법, 진흙탕에 뛰어들지 않고 이기는 요령을 가르치는 요술이 아니다.
또하나의 적 - 타성
“전쟁에는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생존이 달려 있다. 긴장하고 각성해 전쟁의 원리와 승패의 원인 및 방법을 탐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맞는 말이지만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닐까? 생명이 걸린 전쟁터라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누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 가면 누구나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흔한 오류이자 위험한 생각이다. 실상은 정반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로멜(Erwin Rommel,1891~1944)은 이런 발언을 남겼다.
“장병들이 전쟁터에 오면 긴장한다. 그러나 전선에서 8킬로미터만 떨어진 사령부에 근무하기 시작하면 포성이 매일같이 들려오는데도 그곳이 전쟁터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잊는다. 그리고 마치 평소에 근무하듯이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을 시작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자신을 바꾸는 적응은 참 힘들지만, 타성에 물들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교육도 훈련도 필요 없다. 그래서 명장들에게는 병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쓸데없이 병사를 괴롭힌다는 뜻이 아니다. 쓸 데 있는 일로 일정표를 가득 채우고, 새로운 목표와 진일보한 능력을 요구한다.
인간은 대부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안주하고 싶어 한다. 승부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허용된 천성이거나 강하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는 품성이다. 손자는 첫마디에서 이런 자세에 대한 각성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이 병법이라고 하면 기발한 속임수나 요령을 기대한다. 이는
세상을 쉽게 살아보려는 얄팍한 욕구의 발로일 뿐이다. 『손자병법』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손자는 강연장에서 그런 안이한 자세로 온 사람이 있다면 당장 이 자리를 떠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병법이 가르치는 것은 이기는 법이지, 쉬운 길을 찾는 요령이 아니다. 세계 챔피언을 키워낸 어떤 복싱 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맞지 않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은 절대 챔피언이 될 수 없다.”
손자를 따라 병법과 승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승자와 패자,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을 가르는 인류사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손자가 던져주는 메시지와 영감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긴장하고 헌신하고 몰두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만이 그의 교훈을 활용하고, 성공할 수 있다.
2. 전략을 고안하려면 기본적인 다섯 가지
전략을 고안하려면 기본적인 다섯 가지 요소를 통해 각 요소를 계측해서 비교함으로써 그 실상을 끄집어내야한다. 다섯 가지 요소는 도, 천, 지, 장, 법이다.
故經之以五校之計, 而索其情: 一曰道, 二曰天, 三曰地, 四曰將, 五曰法.
도는 백성으로 하여금 윗사람과 한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백성이 군주와 생사를 같이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道者, 令民與上同意也, 故可與之死, 可與之生, 而民不畏危.
천은 음양의 이치(기후의 변화), 추위와 더위 등 시기에 따른 적절한 대책을 말한다.
天者, 陰陽·寒暑·時制也.
지는 거리의 원근, 지세의 험함과 평탄함, 넓고 좁음, 막다른 곳과 트인 곳 등을 말한다.
地者, 遠近·險易·廣狹·死生也.
장은 장수의 조건이다. 지혜, 신의, 인(仁), 용기, 위엄이다.
將者, 智·信·仁·勇·嚴也.
법은 군의 제도, 관리 규정, 재정과 군수 등이다.
法者, 曲制·官道·主用也.
이 다섯 가지는 장수라면 들어보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이것을 아는 자는 승리하고,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凡此五者, 將莫不聞, 知之者勝, 不知者不勝.
198년, 조조(曹操, 155~220)가 완성의 장수(張繡, ?~207)를 침공했다. 1년 전에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조조가 장수의 형수와 바람을 피우다가 장수의 분노를 샀다. 장수의 급습에서 조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맏아들과 조카, 최강의 장수인 전위(典韋, ?~197)를 잃었다.
복수를 위해 다시 완성에 침공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패했다. 조조가
급하게 후퇴하자 장수는 흥분했다. 조조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침 형주의 유표(劉表, 142~208)가 지원군을 보내 조조의 퇴로를 막았다. 앞길이 막힌 조조군은 속도가 느려졌고, 그 뒤를 장수의 유목 기병대가 덮쳤다.
사지에 들어간 조조, 누가 봐도 장수의 승리가 명확했다. 이때 장수의 모사 가후(賈詡, 147~223)가 장수를 제지했다. “조조군을 추격하면 패합니다.” 세상에 어떤 장수가 이 상황에서 공격을 포기할까? 장수는 가후의 말을 무시하고 조조를 추격했다.
곤경에 처해서도 조조는 당황하지 않고 반격을 모색했다. 육전(陸戰)에 약한 형주군은 조조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차단 역할만 하려고 할 것이다. 장수의 기병은 강하지만 전술이 단순하다. 조조는 절대 불리한 지역, 적들이 자신을 협공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생각하는 지점을 승부처로 골랐다. 장수와 형주군으로 하여금 조조가 사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게 한 뒤에 토굴을 파서 수레를 숨기고 병사를 매복시켰다. 조조군의 병사와 치중(輜重)【말이나 수레에 실은 짐】이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지자 장수는 조조군이 겁을 먹고 야반도주했다고 판단했다. 방심하고 추격에 나선 장수군을 매복했던 조조군이 습격했다. 장수의 병력을 자르고 몰아가면서 여기저기서 보병과 기병이 출몰해 장수군을 포위하고 강타했다. 기병의 역량은 장수의 부대가 한 수 위라고 해도, 보병과 기병, 궁병의 팀플레이, 여기저기 병력을 흩어놓고 연계해서 펼치는 조직력은 장수군이 조조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가후는 조조의 능력과 장수의 능력, 조조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장수가 할수 있는 전투 방식을 정확히 알았다. 여기에 소극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유표 군의 행동을 조합해서 조조군의 승리를 예측했던 것이다.
이것이 실상을 아는 능력이다. 병력, 피로도, 장기, 지형, 이런 것들을 기계적으로 수치화해서 상황판 위에 벌여놓는 것이 분석이 아니다. 이런 데이터를 현장이란 조건에서 조합해서 예측하는 것이 실상을 끄집어내는 행동이다.
손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 요소, 즉 오사는 지표의 사례일 뿐이다. 이런 지표는 일곱 가지가 될 수도 있고, 순서와 내용이 바뀔 수도 있다. 분석의 기준이 되는 지표를 정하는 것부터 실상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실상을 안다는 것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국경지대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습격해서 세기의 테러를 벌였다. 이스라엘은 총동원령을 내렸고, 가자지구를 공격하면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 이스라엘은 예비군 동원 체제라 장기전을 할 수 없다. 과거 전쟁이 속전속결로 진행된 이유가 그것이다. 가장 길었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도 겨우 20일이었다.
* 하마스는 가자지구 전역에 땅굴을 거미줄처럼 파두었다. 그 길이가 500킬로미터가 넘는다. 땅굴 공략에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이스라엘 내부에서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o, 1949~)정권에 대한 불만이 크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정권의 리더십이 약화된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을 위시해서 이스라엘 우방국의 지원 능력이 약화되어 있다. 국제 여론의 압박도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런 예측을 부정했다. 지표는 바로 세웠지만, 실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실상을 안다는 건 과거의 현상을 현재 상황에 녹여서 재조립하는 것이지,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아니다. 과거 중동전쟁의 경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유대인 사회와 이슬람 사회의 발전과 변화, 국제사회의 생리를 고려하는 예측이 실상을 이해하는 예측이다
* 이스라엘이 예비군을 총동원하면 전쟁 수행 기간은 3개월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하마스는 정규군이 아니다. 욤 키푸르 전쟁 즉4차 중동전쟁 때처럼 이스라엘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이스라엘은 초반에 대병력을 동원하겠지만, 어느 정도 군사적 기반을 닦은 후에는 압도적인 공군과 첨단무기, 특수부대와 부분 동원한 예비군을 교대로 이용하면 장기전을 충분히 지속할 수 있다.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대부분의 전투가 시가전, 특수전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정규군은 보조적인 역할만 하면 된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상황에 투입할 특수부대를 무수히 만들었고, 이 대원들은 세계 최고의 장비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도 이스라엘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다만, 나중에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니 공군의 정밀타격 능력과 지하터널 파괴 능력이 상상 이상이어서 특수부대의 활약도 예상처럼 크지 않았다. 폭격이란 방식으로 인해 민간인 희생도 졌지만 정밀타격 능력은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 지하로 파둔 땅굴은 일일이 들어가서 파괴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땅굴은 환기, 붕괴 등,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다. 그통안에 보여준 이스라엘의 정보력, 가자지구와의 오랜 갈등 과정과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을 볼 때, 땅굴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축적했을 것으로 보인다. 땅굴 파괴를 위한 특수부대나 파괴, 공략법을 개발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 점은 전쟁 과정에서 증명되었다.)
*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때의 이스라엘과 지금 이스라엘의 경제력, 생존력은 비교할 수 없다. 그때는 우방국 원조 없이는 전쟁물자를 조달한 수 없었고, 경제적 자립도도 약했다. 지금의 이스라엘의 생존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다. 아무리 국제여론이 악화되어도 전 세계 유대인 사회는 상당한 내구력이 있으며, 이스라엘 경제도 그렇다. 하마스 역시 이슬람 사회가 단합해서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거의 없다. 인접국인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은 1차 중동전쟁 때부터 팔레스타인을 이용만 했지 지원을 한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마스의 자금원은 유엔 지원금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하마스에 대한 유엔의 지원도 반대할 것이다.
*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시위가 발생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국내정치가 유례없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하마스가 테러를 저지른 데는 이스라엘의 내분 상황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위기의식으로 가득한 나라다. 아무리 내적인 불만이 크더라도 외적인 압력에는 단합한다. 불만은 전쟁 후에 터트린다. 세계의 국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외적 압력이 발생하면 더 분열하는 국가와 단합하는 국가다. 이 판단은 모든 전쟁에서 중요하다. 역사와 문화, 현실의 국제 상황을 통해 상대가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실상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실제로 전쟁은 2024년 12월 기준으로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손자가 실상을 파악하라는 지적의 의미이자 위력이다.
실상을 끄집어내는 법
실상을 끄집어낸다고 하면 우리는 당장 숫자를 떠올린다. 숫자로 표현할 수 있어야 실상이다. 오사와 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계수화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컴퓨터 게임을 보면 장군의 지휘력, 지력, 용기, 전차의 장갑, 파괴력, 기동력 등을 모두 숫자로 제시한다.
그런데 지피지기(知彼知己: 적을 알고 나를 안다)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숫자 의존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쟁사를 보면 수많은 지휘관을 파멸시킨 운명의 무기가 숫자다. 전쟁사에 등장하는 명장과 역사적인 전투의 리스트를 뽑아보면 그중에 숫자로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은 하나도 없다. 살수대첩, 알렉산드로스(Alexander the Great, BC356~BC323)와 카이사르(Julius Caear, BC100~BC44)의 모든 전투,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승리와 패배, 역사를 바꾼 전투는 거의 숫자가 제시하는 전황을 역행한 전투다.
반대로 말하면 상대편 지휘관들은 숫자를 믿고 승리를 자신하다가 이들을 전쟁사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도 전쟁과 기업에서 숫자 의존증은 여전히 사라질 줄 모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조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불확실성이다. 계획을 세우고 검토할 때, 계수화할 수 없는 것은 제외하거나 불리한 계수는 무시해버린다.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처럼 경직된 조직일수록 이런 행동을 잘한다. 미드웨이 해전 때 사전에 행한 워게임에서 일본 항공모함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상황에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참모들은 이 결과를 빼버렸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의 워게임이 정확했음이 밝혀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숫자 의존증은 또 하나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숫자에 의존하다 보니 만만한 상대, 쉽게 압도할 수 있는 상대만 찾게 된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로스나 로멜처럼 계수화할 수 없는 항목으로 전투를 계측하고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상대를 만나면 허무하게 무너진다. 그러므로 숫자라는 제한에서 먼저 벗어나야 손자의 계측법, 손자가 그렸던 고도한 병법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손자의 계측법
손자는 “실상을 파악하라”고 말하지 않고 “실상을 끄집어내라”고 말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두 말의 의미는 크게 다르다.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오사를 계량화해서 측정, 비교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측정은 불가능하다고 앞서 말했다. 리더는 계수화 불가능한 변수, 어쩌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까지도 포함해서 전투의 양상과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진짜 명장들은 그렇게 했다. 실상을 끄집어내는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천재성, 직관, 전투감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직관과 천재성도 꾸준한 데이터와 경험의 분석, 자기 훈련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다. 천재성과 직관이 불꽃이라면 데이터는 장작이다. 계수화할 수 없는 젖은 장작까지 늘 분석하고, 태우는 법을 찾아 불꽃을 만드는 능력 자체를 키운다.
실상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전쟁을 승패를 좌우하는 만큼, 그 능력을 배양하려는 노력 역시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어서 한 천재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1805년 울름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맞섰던 오스트리아 사령관 카를 마크(karl Mack von Leiberich, 1752~1828)는 나폴레옹의 미스터리로 고민하다가 정신이상이 되어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나폴레옹의 미스터리란, 나폴레옹군의 불가사의한 이동 능력이었다. 아니, 출몰이라는 표현이 옳겠다. 그전까지의 전쟁은 전투 지역에 투입할 군대를 미리 모아놓고 벌이는 것이 정석이었다. 불확실한 지도, 좁은 도로, 뒤처지는 병참 능력과 보병 중심의 군대라는 특성으로 인해 당시의 지휘관들은 전투 예상 지역에 병력을 모아놓고 전투를 시작했다. 뒤에 숨겨놓은 군대가 있다고 해도 멀리 떨어트려 놓을 수는 없었다. 이런 뻔한 속임수를 탐지하기 위해 양측은 서로 기병을 동원해 보병의 하루 이동 범위를 정찰했다. 그 안에 적군이 없다면 이 전장에 있는 군대가 전부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 범주를 넘어서 심하면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는 군단을 서로 다른 경로로 이동시켜, 정해진 시간에 전투지에 도착하게 했다. 눈앞에 있는 나폴레옹군의 규모만 보고 전투에 돌입한 상대는 전투 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프랑스군에 기겁하고 패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지금의 체코에서 벌어졌는데, 다부(Louls-Nicolas Davout, 1770~1823) 원수가 110킬로미터의 거리를 이틀 만에 강행군으로 돌파해서 전장에 도착했다.
그 누구도 이런 식의 대담한 이동과 타이밍을 전투에 도입해본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기동의 속도와 안정성, 표준화를 위해 군 장비와 숙영(宿營) 방법을 경량화 및 표준화하고, 지휘관과 참모진을 교육함으로써 병사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냈다. 이런 노력이 뒷받침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완전한 변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은 위험하다 못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앞서 말한 문제 외에도 예측 불가능한 기후, 만약의 사고 같은 변수를 어떻게 고려하고 정확한 시간에 군대가 도착하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카를 마크가 이 불가사의를 이해하려다가 미쳐버렸다고 했지만,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도 이런 식의 터무니 없는 작전을 기안하지는 못했다. 이런 작전 계획은 오직 나폴레옹만이 계산하고 세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야전에도 전용 책상을 가지고 다녔는데, 텐트에서 홀로 이동을 계산하고 계획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참모 앙리 조미니(Antoine-Henri Jomini, 1779~1869)는 나폴레옹의 이런 능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폴레옹은 광범위하게 분산된 지점에서 각자 출발한 자신의 부대들을 작전 지역의 결정적 지점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집결시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 오직 나폴레옹만이 너무나 복잡한 각 부대의 이동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앙리 조미니 지음, 이내주 옮김, 『전쟁술』 책세상, 1999, 322쪽.
나폴레옹은 어디에서 이런 능력을 얻었을까? 그가 수학의 천재이기는 했지만 그 능력이 계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비결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형 재능을 가진 앙리 조미니었다. 조미니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늘 컴퍼스를 가지고 행군 중에도 직접 10(30킬로미터)의 거리를 측정하고, 지도상에 자기 군단과 적의 예상 위치를 핀으로 표시하곤 했다고 한다. 다른 측근들은 나폴레옹의 이런 행동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조미니는 천재답게 천재의 행동을 간파했다. 나폴레옹은 평소 끊임없는 관찰과 분석을 통해 지도의 정확성, 지도와 실제 지형과의 차이, 병사들의 행군 속도, 오차 범위 등을 체크했고, 이런 데이터를 조합해 지도만 보고도 병사들의 이동 가능 거리와 속도를 도출해냈던 것이다. 이것이 신의 능력이라고 불리던 나폴레옹의 비결이었다. 바로 이런 노력이 데이터를 관측하고 분석해서 실상을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손자는 오사, 즉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은 장수라면 모두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굳이 제시하고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가 요구하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20?)는 『영웅전』에서 영웅이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카이사르, 한니발(Hannibal Barca, BC247~BC183), 나폴레옹, 세기의 명장들이 『영웅전』을 읽고 추종했던 리더의 길이 이것이었다. 손자가 말한 리더의 길, 오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도(道): 윗사람과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생사를 같이한다
먼저 첫 번째 요소인 ‘도’를 살펴보면, 상하가 하나 되는 것이다. 너무 뻔한 교훈 아닐까? 전선에 처음 도착한 한 개 분대의 병사가 참호에 배치되었다. 분대장 이하 상하가 서로 의지하고 한마음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사가 있을까?
손자의 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춘추시대의 패자는 연맹체의 장이었다. 연맹은 자기 국가와 체제를 보존한 채 패자를 대장으로 받든다. 반면 전국시대의 승자는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 같은 정복자, 통합자다. 이웃한 소국을 정복하면 그들을 융합해서 하나로 만들고 더 큰 나라의 정복에 도전해야 한다. 상하 단합의 필요성은 춘추시대나 전국시대나 같지만, 방식이 다르다. 춘추시대가 물리적 결합이라면 전국시대는 화학적 결합이다.
로마가 성공했던 이유는 시민권 제도를 통해 피정복자들을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끊임없이 흡수한 덕이었다. 중국도 진, 한, 송을 거치면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으로 만드는 노력을 지속했다. 대표적인 노력이 한자다. 한자는 표의문자다. 표음문자와 달리 어렵고, 글자는 너무 많다. 중국 근대화를 추구하던 인사들은 한자를 중국이 서구에 뒤처지고 한 원흉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어느 저명한 중국 사학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한자가 표음문자였다면 중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영속적으로 분열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는 뒤처졌고 현재는 백화문을 사용하지만, 오늘날 세계 인구의 약 17퍼센트를 차지하는 세계의 큰손이 된 데는 한자가 만들어놓은 ‘한족(漢族)’이라는 단일화가 엄청난 역할을 했다.
손자는 이런 화학적 결합을 예측하고 그 시대에 걸맞는 상하 화합의 방법을 찾아내라고 지적한 것이다. 더욱이 전쟁은 분열된 집단에게 공동의 목표와 적을 만들어 이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수백 개의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통일국가와 강력한 국가, 민족주의를 이룬 데는 참혹한 내전이었던 30년 전쟁과 전 유럽을 상대로 싸운 7년 전쟁, 유럽 전체만큼 강했던 나폴레옹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세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독일은 없었다.
상하의 단결, 정복민의 흡수는 국가의 병력을 키우고 더 큰 집단을 정복하는 수단인 동시에 전쟁과 승리의 훌륭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손자는 전쟁과 단합의 이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다가오는 정복 전쟁의 시대를 대비했던 것이다.
목적과 목표의 공유
상하가 하나가 되려면 집단이 목적과 목표를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 목적의 공유가 상하 모두 같은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조직이 이런 실수를 한다.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려니 거창하고 그럴듯하고 추상적인 목적을 내세운다. ‘성전(聖戰)’ ‘1등 기업’ ‘세계 평화’ 이렇게 너무 숭고하거나 보편적인 목적을 내세울수록 수면 밑의 다양한 생태계를 보지 못하고, 착오를 저지르게 된다.
상하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적은 다르더라도 목표와 방법을 공유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 징집군이란 새로운 형태의 군대를 탄생시켰다. 시민군은 유럽의 해방자, 혁명의 전도자란 명칭을 얻었지만, 실상은 침공군에 약탈자였다. 용병부대에 비해 정직하고 선량한 시민병사가 다수 섞여 있었다고 해도, 병력의 규모 자체가 크기 때문에 약탈자, 범죄자의 수 역시 과거 용병군대의 약탈자 수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갑자기 늘어난 병력으로 보급과 보수도 형편없었다.
새로 부임한 젊은 사령관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보수와 장비부터 해결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탈리아로 데려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요한 도시가 너의 발밑에 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기동과 행군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고, 험한 알프스 지형에서도 상대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뛰는 방식으로 대군을 격파했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건전한 사례는 아니지만, 이 단합은 나폴레옹의 야심과 병사들의 다양한 욕구와 욕심이 합쳐서 목적의 공유를 이룬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병사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실현해줄 능력이 있다는 신뢰를 얻음으로써 목적의 공유를 이루고, 이를 에너지화해서 전에 볼 수 없었던 군대를 만들어냈다.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의 전설적인 업적도 이런 방법으로 통합된 군대를 통해 가능했다. 그리고 이 목표와 방법의 공유가 깨졌을 때, 병사들은 인도에서 전쟁을 거부하고 대왕 알렉산드로스에게 철군을 요구했다. 그 병사들이 알렉산드로스를 향한 존경심, 애정 그의 능력에 대한 경외감을 버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병사들은 목적을 초과 달성했고, 이제 얻은 땅과 재산으로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리더의 목표와 병사들의 목표가 달라진 것이다.
한니발의 군대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북아프리카로 돌아온 순간, 그의 군대는 목표를 잃었고, 단지 생존을 위해 혹은 남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마 전투는 극적이고 아슬아슬한 승부였지만, 병사들의 에너지가 떨어지면서 마지막 1부 능선을 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상황의 공유
카메룬은 원래 멕시코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었다. 1863년 4월 30일, 당주(Jean Danjou, 1828~1863) 대위가 지휘하는 제1외인부대 3중대, 65명이 베라크루즈 기지를 떠났다. 이들의 임무는 푸에블로 지역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전달할 보급품 수송이었다. 이들의 짐 속에는 장병의 보수로 지급할 금괴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괴를 운송하는 수송대에 관한 첩보는 즉시 새어나갔다. 2,000명의 멕시코군이 이들을 추격했다. 당주 중대가 노상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할 때 돌연 멕시코군이 나타났다. 당주 중대는 카메룬 마을로 후퇴해서 한 농가로 들어갔다.
탄약은 1인당 60발, 급하게 후퇴하느라 물과 식량도 버렸다. 농가까지 살아서 들어온 사람은 42명뿐이었다. 당주 대위는 역전의 용사로 한쪽 팔이 의수였다.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병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끝까지 싸우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이날 3중대는 저녁까지 버렸다. 탄약이 떨어지자 최후의 생존자 여섯 명은 농가에서 튀어나와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마지막 돌격에서 모두가 죽거나 다쳤다. 이들의 감투(敢鬪) 정신에 감동한 멕시코군 지휘관 밀란 대령은 생존한 부상자 세 명을 살려주었다.
외인부대는 매년 4월 30일을 카메룬 데이로 지정하고 행사를 벌인다. 당주 대위의 의수는 나중에 돈을 주고 회수했는데,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이 의수가 등장해 사열을 받는다.
당주 중대의 전투는 외인부대원의 투지와 불굴의 전투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폄하할 마음은 없지만, 고귀한 투지만이 전부는 아니다. 과거의 전쟁은 거칠었고, 병사들은 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비단 용병이나 제국주의 군대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항복했을 때 더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주 위험한 겉보기 단합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한양을 향해 쾌속 진군하자 선조(宣祖, 1552~1608)는 한양을 버리고 피난했다. 마침 전라도 장수현에 머물던 한양 명문가의 선비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이 소식을 듣자 분노하며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임금이 매일같이 도성 성벽에 나와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격려했더라면 병사들이 감격해서 죽기로 싸웠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선비가 조선 천지에 가득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다시 병자호란을 겪을 때도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의외로 많은 리더가 회식, 단합대회, 복장 통일, 슬로건 등 형식적 단합에 집착하고 그 효과를 과신한다. 물론 이런 노력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仁祖, 1595~1649)는 자주 성벽에 나가 한겨울에 경사가 심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이어지는 성벽을 걸으며 병사들을 위로했다. 이런 행동이 결사항전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포위가 지속되고 청군의 대공세가 코앞에 다가오자 병사들은 강화를 요구하며 반란 직전까지 갔다.
인조의 행동이 오희문의 상상처럼 병사들을 하나로 만들어 돌격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조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병사들이 더 빨리 반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차디찬 성벽에서 고생하는데 높은 분들은 따뜻한 곳에서 쉬고 있구나”라는 불만은 최대한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도전할 때 그가 거느린 군대는 프랑스 군대가 아니라 현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에 필적하는 유럽 연합군이었다. 나폴레옹은 군복과 휘장을 정비하고, 무기를 표준화해서 세상이 본 적이 없는 통합된 유럽 연합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 통합은 겉보기에 불과했다.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 정복욕은 나라와 집단마다 달랐다. 나폴레옹이 선두에 세웠던 부대는 폴란드군이었다. 오늘날에도 대러시아 전선에서 NATO군의 선두에 서 있는 폴란드군은 러시아와는 오랜 앙숙이었고, 정복욕도 대단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 군대는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에 대한 의욕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은 프랑스군 내부에서도 흔들렸다. 정신적 부분에서만 아니라 물리적 부분에서도 외형과 달리 급조한 대군은 수준 차이가 심했다.
단합도 여러 종류가 있고, 단합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목적과 상황,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리더는 겉보기 단합에 취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냉철하게 목표를 정하고 집단의 상태를 분석하고 취할 수 있는 방법과 그 방법으로 이룰 수 있는 일과 한계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이 부분에서 착오를 일으키자 파멸을 피할 수 없었다.
조직이 하나가 되는 법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과 교훈을 정리해보자.
조직이 하나가 되려면 첫째, 궁극적인 목적, 모든 조직원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헌신할 수 있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전쟁이 적이 먼저 침략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쟁은 적의 침략에서 우리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구성원들의 참여와 헌신이 남다른 위대한 기업은 대개 그런 목표나 목표 수준의 자부심이 있다. ‘1등을 하자’ ‘최고의 제품을 만들자’는 막연한 구호나 ‘한 가족이 되자’는 식의 가식적인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걸고 도전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기업’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하고 자발적 실천이 가능한 그런 목표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경험으로 축적된다. 리더는 그런 신뢰 구조가 더 효율적이고 충분하고 건전하게 축적되도록 조직을 설계하고 운영하며, 특별한 이벤트를 구상해야 한다. 노련한 지휘관들은 소규모 기동부대를 운영해 적을 습격하고, 승리를 과장하는 작전을 자주 사용했다. 작은 승리가 동료와 리더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거룩한 명분에 속지 않아야 한다. 리더는 하나가 되는 상황을 감정적이고 추상적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전투에서 병사들이 초인적인 용기로 감동적인 전투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지휘관이 이렇게 말한다. “내 생전에 이렇게 훌륭한 병사들은 본 적이 없다. 오늘처럼 싸운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장군의 격려 연설로는 훌륭하지만,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된다. 구성원이 하나가 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상황이 달라지고 이유가 달라지면 병사들의 행동은 바로 변한다. 리더는 항상 행동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단합으로 가능한 행동과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히 조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리더는 항상 냉철하게 목적과 방법, 단합의 성격, 단합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한계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겉보기 기준을 만들고 스스로 감격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천(天): 날씨를 운으로 여기서는 안 된다
천, 즉 하늘이라고 하면 대부분 천운을 연상한다. 손자가 말한 하늘은 천운이 아니라 기후와 날씨다. 단, 과학적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대에는 일기예보도 절반은 천운에 속했다. 수많은 전쟁에서 예상치 못한 날씨가 국가와 장군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결국 운일까? 아니다. 손자는 운을 거부한다. 날씨 예측이 어렵다고 해도, 세상에 운이 존재한다고 해도, 천운에 전투를 맡겨서는 안 된다.
전쟁사를 강의하다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을 곧잘 만난다. “세상사 결국은 운이군요.” 이건 자기 위안이고 회피다. 미래를 예측할 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운)가 90퍼센트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10퍼센트라고 해도 리더는 결과를 하늘에 맡겨서는 안 된다. 예측이나 통제 불가한 변수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10퍼센트는 절대 적지 않은 변수다. 자기 운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고, 변화에 최대한 근접하고, 통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운은 잊고 현실로 돌아오자. 손자가 기후와 날씨를 언급한 이유는 운과 무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중국처럼 거대한 대륙에서 천하통일을 이루려면 수천 킬로미터의 장거리 원정을 해야 한다. 요동의 기병이 양쯔강을 건너면 물과 진창이 발목을 잡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기후도 한대에서 아열대 기후로 변한다. 이는 단순히 기온이 올라가는 문제를 넘어선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황개(黃蓋, ?-?)의 고육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불러 온 동남풍 때문이 아니라 기후와 풍토, 병균, 새로운 지형 적응에 실패한 탓이었다.
옛날 사람들에게도 날씨는 중요했기에 끊임없이 관측하고 예측했다. 그러나 먼 지역에 도착하면 하늘의 별자리도 달라지고, 주변의 동물과 식물, 생태계도 바뀐다. 지금까지 경험적으로 축적한 기후 예측 방식과 데이터가 달라진다. 더 위험한 건 규모와 양의 차이다.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비가 올 듯한 징조는 어느 지역에서도 똑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퍼붓는 비의 양, 함께 오는 강풍, 급락하는 기온은 고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하던 것이다. 소나기의 정조는 예측할 수 있지만, ‘봄비 정도야’하고 행군을 강행하다가 군이 전투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손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데이터는 모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다. 유통기한과 범주를 넘어서면 새로 데이터를 축적하든지 응용해야 한다. 나를 파멸시키는 것은 천운이 아니라 과거의 나 자신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작전 계획을 짤 때 날씨라는 요소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기후의 중요성은 알지만, 내 지식이 이 땅에서는 쓸모가 없다. 자신의 지식과 판단을 믿을 수 없으니 불안해진다. 불안하니까 배제한다. 이것은 잘못된 예측보다 더 위험하다.
유일한 방법은 이전의 데이터와 현지 상황을 조합해 현장에 응용하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이런 능력이 중요한 이유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 낯선 환경에서 결과에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용기와 지혜를 지닌 군대만이 원정과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상륙작전과 기상장교
1942년 11월, 10만 명의 미군을 태운 함대가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들이 목적지는 ‘사막의 여우’ 로멜 장군이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해안이었다. 미군이 드디어 유럽 전쟁에 참전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미군은 이런 대규모 상륙 작전 정험이 전혀 없었다. 10월에 사전연습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훈련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사령부가 예측한 성공확률은 반반이었다.
막말과 허풍으로 악명 높았던 사령관 조지 S. 패튼(George smith Patton Jr., 1885~1945) 장군은 상륙하면 부대원의 4분의 3이 죽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 말을 들은 장교들은 더 불안해졌다.
모두가 손 놓은 채 터무니없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한 명의 젊은 중위만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정보팀에 속한 기상학자였다. 지금과 달리 위성도 없던 시절이었다. 완전히 낯선 지역에서 그는 매일매일 위도와 자신의 위치, 날씨 기준선을 측정하고, 현지에서 관측한 모든 숫자를 동원해 기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륙부대의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가 제일 걱정하던 요소가 날씨였다. 기상이 조금만 악화되어도 파도가 상륙정을 모두 뒤집어버릴 수도 있었다. 알제리 상륙 전날 기상학자 중위는 해안 고도가 잠잠해질 것이라는 대담한 예보를 제출했다. 이 용감한 기상학자를 믿고, 아이젠하워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날씨는 중위의 예언대로였고, 작전은 성공했다【스탠리 P. 허쉬슨 지음, 전경화 옮김, 『제네털 패튼 1』 2002, 이룸, 423쪽.】.
2년 후 아이젠하워는 다시 한번 하늘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날씨로 번번이 연기되었다. 6월 5일 함대와 병력을 만재(滿載)한 수송선이 바다로 나아갔지만, 날씨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때 연합군에는 두 개의 기상팀이 있었다. 영국과 미국팀이다. 그날 두 팀은 격론은 벌였다. 미국팀은 긍정적인 징후를 포착했고, 영국팀은 반대했다. 영국 기상팀은 화가 났다. 이곳은 영국 땅이다. 홈그라운드의 데이터 분석을 대서양 건너편의 ‘양키’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 책임자 제임스 스태그(James Marin stagg, 1900~1975) 대령은 아이젠하워에게 상륙을 미뤄야 한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했다.
그러나 조금 뒤에 그는 대서양의 두꺼운 구름 사이로 칼로 짼 듯한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작은 징조에 스태그 대령은 자신의 결론을 바꿨다. 물론 확신은 못 하는 작은 가능성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 작은 가능성에 전군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포커의 대가였다. 도박사 기질이 이런 결단을 유도했을까? 최종 보고자는 스태그 대령이었지만, 알제리에서 미군 기상팀의 경험, 아이젠하워의 기상 도박 경험이 이런 불가능한 결정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
이 도박이 디데이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이 된다. 독일군 사령부는 폭풍 경보를 믿고 침공 징후를 알리는 보고들을 무시했다. 노르망디 방어 사령관 로멜은 부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고향집으로 갔다. 이 두 사건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상륙 작전은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지(地): 지형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승패를 가른다
지형, 거리와 관련한 전술 운용에 관해서는 제8편 ‘구변(九變)’ 등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누군가의 경험, 누군가의 전술, 누군가의 성공과 패배 경험담은 모두 당시의 지형과 환경, 또는 홈그라운드에서 유용한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낯선 땅에서 전투를 포기하거나 새로운 땅에서 충분한 경험을 축적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노르망디에서 로멜은 상대의 대담한 기후 예측에 당했지만, 북아프리카에서는 반대로 놀라운 지형 적응력으로 승리했다.
로멜이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모래폭풍이 무엇인지 몰랐을 정도로 사막의 기후와 지형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사막전에는 보통 6개월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운전만 예로 들어도 현대의 한 특수부대원은 사막에서 운전하는 건 그 자체로 ‘아트(art)’라고 했다.
로멜은 현지 장교, 특히 오랫동안 북아프리카에서 싸워온 이탈리아 장교들의 충고도 싹 무시하고 독일 병사들이 상륙하자마자 그들을 전선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계획은 사하라 사막으로 깊이 들어가 영국군 방어선 바깥으로 우회해서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이 교만한 결정에 놀랐고, 현지 경험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로멜은 밀어붙였다. 로멜을 전설로 만든 이 판단력은 맹목적인 고집도 교만도 아니었다.
로멜은 초급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부터 지형 데이터를 철저하게 수집했다.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요새를 만나도 밤마다 직접 포복으로 적진 앞까지 기어가서 지형을 파악하고, 약점을 찾았다.
그렇다고 이 데이터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로멜은 광범위한 데이터를 컴퓨터처럼 분석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담하게 응용하는 메커니즘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어자들보다 늘 앞서고 그들이 생각도 못 한 약점을 찾아내고, 경험해보지 못한 전술로 상대를 압도했다.
그런 경험이 누적된 햇수만 30년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자신의 적응력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독일군 병사들의 적응력까지 예측하고 믿었다.
“사막에 처음 도착한 병사들이 곤경을 겪겠지만, 달려가면서 체득할 것이다. 우리 병사들은 그런 능력이 있다.” 로멜은 이렇게 판단했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독일 병사들은 로멜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에 당황했지만, 막상 사막에 들어서자 자신들도 몰랐던 능력을 발휘해서 사막의 생존 요령을 찾아냈다.
반면 막 도착한 독일군이 공세로 나오려면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영국군은 갑자기 후방에서 출현한 독일군에 당황했고, 무참하게 무너졌다. 사막의 여우 로멜의 전설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장(將) : 지혜, 신의, 인, 용기, 위엄
오사 중 네 번째 항목인 장수의 능력으로 손자는 지혜[智], 신의[信], 인(仁), 용기[勇], 위엄[嚴]을 꼽았다. 이 덕목들은 재능이라기보다는 인품에 가깝다. 이런 기준을 이해할 때, 우리는 모든 덕목은 항상 상대적이며,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적인 재해석이 아니다. 손자가 말한 원래 의미가 그렇다.
예를 들어 인(仁)은 동양사상에서 원칙을 지키고, 비겁하고 비열한 수단을 쓰지 않으면서 상황에 가장 적절한 행동과 마음가짐을 말한다. 이렇게만 보면 성인군자의 마음가짐인데, 과연 전쟁을 치를 수나 있을까?
그래서 인의 개념에는 한가지 단서가 추가된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만큼의 인’이란 개념이다. 신의, 용기, 위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땅, 언어와 풍속이 다른 정복지, 낯선 사람들도 지혜, 신뢰, 용기 등의 가치는 공유한다. 하지만 내용과 표현 방법, 양이 다르다. 산악지대에서는 고지에 올라가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해양에서는 검은 파도에 뛰어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의 내용이 달라지면 리더가 자신의 덕목을 표현하는 방법, 신뢰를 얻는 방법도 달라진다.
명장들의 팔색조 리더십
단일하고 목표가 분명한 조직이라면 리더의 덕목도 선명한 것이 좋을 것이다. 복잡하고 다면적이고 심지어는 다문화적이기도 한 조직이라면어떤 미덕, 어떤 장점도 다른 편에서는 단점이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말과 행동을 바꾸어야 할까? 그렇게 하면 리더는 당장 신뢰를 잃는다. 상황에 따른 적절성과 융통성을 발휘하면서도 신뢰를 잃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거대한 군대를 인솔하고 세계를 발밑에 두었던 사람은 엄청나게 다양한 환경에 대처해야 했다. 세계사에 기억되는 명장들에게 손자의 덕목인 지혜와 신의와 인, 용기, 위엄이라는 항목을 적용해보면, 각각의 항목들이 마치 프리즘처럼 여러 가지 내용으로 분화해 발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비법이다.
이런 프리즘의 리더십이 팔색조 리더십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리더십이 아니다. 원칙과 이미지는 고수하되, 그것이 장소마다 다양한 색으로 나타나는 리더십이다.
프리즘의 마법을 가장 멋지게 사용한 사람이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와 조지 패튼 장군(George Smith Patton Jr, 1885~1945)이다. 이 두 장군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사람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두 장군은 프리즘이나 팔색조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직된 리더십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모두 개성이 너무 강하고 오만하며,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인 리더로 유명하다. 맥아더의 상징은 귀족적인 오만과 안하무인이고, 패튼은 자화자찬에 거칠고 막가는 욕쟁이 장군으로 수많은 일화를 뿌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리더십은 정말로 영악했다. 신의와 지조를 지키는 리더가 다양한 사람의 욕구를 어떻게 다 받아줄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방법은 강력한 단순함으로 다양함을 커버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했지만, 외부에서 보는 만큼 내부의 사기나 분위기가 억압적이지 않았다.
맥아더는 어마어마한 엘리트에 오만하고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평소에도 휘광(輝光)처럼 풍기고 다녔다. 덕분에 그는 부하를 다그치거나 힘든 일을 시킬 때 목소리를 높이거나 과격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서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날 선 위엄은 신의와 용기를 조장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강한 거부감을 유발하고 마음으로의 복종과는 멀어질 우려가 있다. 하지만 맥아더가 정말로 바란 효과는 따로 있었다. 날 선 위엄 덕에 그의 부하들에게는 맥아더가 소리를 지르거나 막말을 하거나 부하를 모욕하는 행동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맥아더와 직접 접촉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맥아더의 인상은 항상 간결하고 따뜻한 말투, 자상합, 부하에 대한 배려,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었다. 그는 다른 자상한 리더들보다 10분의 1, 50분의 1의 말과 행동을 소모해서 이런 감동을 만들어냈다.
거부감도 훌륭한 무기로 활용했다. 그의 적들, 이유 없이 맥아더나 맥아더의 이미지가 싫었던 사람들, 그래서 잔뜩 긴장한 채 혐오감을 품고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의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그의 추종자로 바뀌곤 했다. 맥아더를 만나보기 전에 그에게 아주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던 어떤 장군은 “맥아더가 나를 단 15분 만에 자신의 호주머니에 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패튼은 상대방을 화가 나게 하거나 짜증 나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패튼의 어이없는 행동은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도 늘 버거웠다. 패튼은 전혀 다른 노림수를 가지고 있었다. 무식하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패튼은 뒤에서 엄청나게 공부하고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그는 이슬람 사람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코란을 공부했고, 머리맡에는 적장인 로멜의 자서전을 두고 밤마다 읽었다.
손자의 말처럼 용병은 적을 속이는 것이고, 전술이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치고 적이 나를 예측하지 못하도록 행동하는 것이라면, 패튼은 이 부분에서 완벽했다. 그의 허세와 제멋대로의 언행 덕에 패튼이 상대를 철저히 파악하고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 병사들은 패튼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체 투덜거리면서 그의 의도대로 변해갔고, 작전의 결과를 보고는 욕과 감탄을 반반씩 섞어서 존경심을 나타내곤 했다.
법(法): 군의 제도와 규정, 병참
손자가 말한 법은 조직이 주어진 목표를 실천하는 능력, 또는 실천을 지원하는 능력이다. 인프라, 조직의 효율성, 연구개발(resarch & develoment, R&D) 능력, 조직 간의 협력 등이 모두 포함된다.
보통 전쟁사라고 하면 전투부대의 활약과 작전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면서도 잘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군수, 병참, 회계, 수송, 의료, 행정 분야의 인재들이다. 이들의 활약이 없으면 전투부대원은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다. 야전에서 10만 대군과 1,000대의 탱크가 있다고 해도 연료가 100대분밖에 보급되지 않는다거나 수송팀이 하루에 조달할 수 있는 양이 10킬로미터 분량이라면 탱크의 작전 반경과 전술도 여기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삼국지연의』에서 신의 지혜를 가진 것처럼 묘사된 제갈량(諸葛亮)은 사실 군사 전략가가 아니었다. 제갈량 스스로 자신은 군사를 모른다고 했다.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陳壽, 233~297)는 제갈량이 군사 부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정 전문가였다고 평가했다. 제갈량은 유비(劉備, 161~223), 관우(關羽, ?~219), 장비(張飛, ?~221)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소설과 달리 전쟁과 작전에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촉나라가 2세대 인재의 조달에 실패하고, 유비와 1세대 인재들이 죽거나 늙어가자 할 수 없이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다.
현재의 쓰촨성에 자리 잡은 촉의 장점이자 약점은 쓰촨 분지를 형성하는 험한 촉산이었다. 촉산은 적의 침공을 어렵게 했지만, 안에서 밖으로 치고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제갈량은 탁월한 조직력과 행정력으로 군의 보급 체제를 해결하고, 군의 제도와 관리, 이동, 행군, 숙영에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제갈량이 군수물자의 수송을 위해 목우유마(木牛流馬)【식량을 운반하기 위해 말과 소 모양으로 만든 수레로, 기계장치로움직였다고 한다】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촉군의 군수와 병참제도의 위력을 신비화한 것이다. 제갈량이 설계한 촉의 진영을 본 적장 사마의가 제갈량은 천재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제갈량의 마법 같은 전술이 아니라 그의 조직력과 행정 능력에 대한 감탄이었다.
전투력에서 압도적 우세인 군대를 보유했는데도 위나라는 제갈량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가능한 한 방어전으로 일관했다. 촉군의 사령관은백면서생 출신이고 촉에는 이제 관우나 장비 같은 명장도 없었지만, 촉나라의 무기는 손자가 말한 ‘법’, 즉 누구보다 탄탄한 군의 운영과 지원 능력이었다.
3. 실상을 끄집어내는 능력
실상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이처럼 중요하므로 우리는 오사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비교해서 그 정황을 끌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와 적국 중 누가 바른 도를 지니고 있는가, 장수는 어느 쪽이 더 유능한가, 자연과 지형은 어느 쪽이 유리한가, 법령은 어느 쪽이 공정하게 시행되고 있는가,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강한가, 장교와 병사는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는가, 상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한가 등이다.
故校之以計, 而索其情. 曰: 主孰有道? 將孰有能? 天地孰得? 法令孰行? 兵衆孰强? 士卒孰鍊? 賞罰孰明?
오사를 비교하고 판단할 때는 절대 평가가 아닌 상대 평가로 비교해야 한다. ‘어떤 장수가 더 유능한가’라는 질문을 예로 들어보자. 장수를 비교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사관학교 성적, 과거의 전적, 인간성, 가정생활 등의 항목을 늘어세운다. 이것이 객관적인 평가일까? 아니다. 이런 기계적인 분석이 오히려 실패를 낳을 수 있다. 장수의 유능함을 판정할 지표는 무수히 많다. 주어진 상황과 과제에 적합한 항목을 선정하고, 적과의 상대 비교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1807~1870) 장군과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 1822~1885) 장군을 비교해보자.
리와 그랜트, 누가 더 뛰어난 지휘관일까
사관학교 시절 성적부터 장교 경력, 전술가적 자질로 보면 그랜트는 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리는 패전한 남부의 총사령관이었지만,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람)가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 육군 사관생도가 선정하는 최고의 장군에 한 해도 빠짐없이 선정되었던, 명실공히 미 역사상 최고의 장군이다.
리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최고의 생도였다. 리의 성적은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장교 시절에는 판단력, 전술, 인격, 리더십, 포용력, 용기와 고집, 모든 것을 갖춘 지휘관이었다. 멕시코전쟁 때 리는 소령으로 참전해 정찰장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 리 소령은 사령관보다 뛰어난 통찰력과 전술감각, 열정과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미군은 리가 선정한 장소에서 싸우고 그가 발굴한 산악로로 진격해 멕시코군의 뒤를 쳤다. 그의 활약에 반한 사령관 스콧(Winfield scott, 1786~1866) 장군은 일개 소령이었던 리를 일찌감치 자신의 뒤를 이을 미군 총사령관으로 낙점했다.
그랜트도 멕시코전쟁에 중위로 참전했다. 그랜트는 전투에서 특유의 뚝심을 한번 보여주기는 했지만 일회성 공로가 전부였다. 그 뒤 그랜트의 인생 역정은 리의 빛나는 길과는 정반대였다.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무료한 군생활에 지쳐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결국 반강제로 퇴역했다. 제대 후에는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았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게으르며 무뚝뚝하고 비사교적인 인간성에 생도 시절 성적표까지 더하면 리와는 비교 불가 수준으로 추락한다.
그랬던 그랜트가 북군 사령관이 되어 리와 대결하게 되었다. 북군은 병력, 무기, 보급 등 객관적인 전력에서 모두 남군보다 우세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북군의 장점을 살려 과감하게 소모전을 벌일 수 있는 뚝심과 추진력이었다. 그랜트가 리를 앞서거나, 적어도 맞먹을 수 있는 장점은 이것 딱 하나였는데, 북군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뿐이었다. 그랜트는 대담한 소모전으로 밀어붙이며, 리가 숨을 돌리고 자신의 전술 능력을 발휘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끔찍한 전술이었지만 북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백지상태에서 리와 그랜트를 두고 어느 장군이 더 유능하냐고 물으면 분명 리가 더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전장에 던져놓고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역사는 그랜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4. 나는 이 분석을 통해 승부의 결과를 안다
나는 이 분석을 통해 승부의 결과를 안다. 나의 계획을 듣고 따라서 사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나는 머무를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반드시 패배한 것이며, 나는 떠나갈 것이다.
吾以此知勝負矣. 將聽吾計, 用之必勝, 留之; 將不聽吾計, 用之必敗, 去之.
‘계(計)’ 편의 마지막 구절은 손자의 대담한 자기 자랑으로 끝난다. 손자의 본래 의도는 ‘계’의 단계, 손자식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많은 군대와 조직이 이 단계를 경시하거나 입맛대로 짜 맞추고 전쟁에 나섰다가 패망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정렬할 수는 있다.
이 구절에는 손자의 자기 홍보와 각오도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철륜(鐵輪) 천하였다. 많은 인재가 자신을 등용해줄 제후를 찾아 쇠바퀴를 단 수레가 필요할 정도로 무수히 돌아다녔다. 그들의 채용 시험은 대개 면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면접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 밑천을 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과시하고 제후가 흥미를 느낄 만한 심오한 인상을 주어야 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순간에 흥분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겸손을 보이다가 실패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손자처럼 촌철살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능력 못지않게 본인의 확고한 자신감을 과시할 필요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능력과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논리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를 두려워하고 긴장하고, 흥분해서는 자신감을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남을 설득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충분히 설득해야 한다.
이 면접은 쌍방 면접이다. 손자 입장에서는 상대가 신뢰할 수 있는 제후인지, 인재를 이용하다가 버리는 제후인지도 판단해야 했다. 어떤 경우든 인간관계는 일방적인 계약이 아니다. 부하,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리더를 만날 때는 상대방의 목적 의도, 도량, 자신과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 자신이 양보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설정해야 한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당장의 필요나 유혹에 의해 판단을 보류하고 나머지는 천운과 낙관에 맡기는 사람이 많다.
손자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주군을 잘못 만나 이용만 당하거나 마지막에 배신당하는 인재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선한 리더를 찾아 무한정 방황할 수도 없다.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손자는 전술가였고, 자신을 표현하고 관리하는 전술에서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5. 전쟁의 분석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어 실행하기로 하면
전쟁의 분석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어 실행하기로 하면 그것을 세(勢)로 만들어서 현실에서 그 계획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 세라는 것은 내게 유리한 조건을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하는 것이다.
計利以聽, 乃爲之勢, 以佐其外. 勢者, 因利而制權也.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의 파르살루스 평원은 로마 군단으로 뒤덮였다. 지난 세기 동안 로마가 배출한 최고의 명장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BC106~BC48)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100~BC44)가 마주쳤다. 한니발과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BC236~BC184)의 자마 전투 이후 이 정도의 명장이 이런 대병력을 거느리고 맞붙은 빅매치는 없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병력은 중장보병 4만 5,000명과 기병 7,000명, 카이사르의 전력은 중장보병 2만 2,000명과 기병 1,000명이었다. 장비와 훈련 수준은 양측 모두가 로마의 정예 군단이라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단지 카이사르의 군단은 얼마 전까지 갈리아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르다가 돌아온 역전의 용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도 갈리아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갈리아 원정에 참전했던 카이사르의 두 개 군단(1군단, 3군단)이 폼페이우스 편에 가세했다. 기병 전력은 수치상으로도 7배인 데다가 기병 사령관은 갈리아 전역 내내 카이사르의 부사령관이었던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BC100?~BC45)였다. 폼페이우스를 찾아온 라비에누스는 기병 지휘관 자리를 자청했다.
폼페이우스의 전술은 로마군 양측에 익숙한 방식이었다. 압도적인 기병이 카이사르의 우익을 강타하고 보병의 뒤로 돌아간다. 그러면 보병이 전진해서 적을 밀어붙인다. 전형적인 이중 포위,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피차간에 뻔한 전술이지만, 7배의 기병 전력, 2배의 보병 전력이 승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 대등한 전투를 한다고 해도 카이사르군은 보급품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결전을 회피하며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보급품이 바닥나는 바람에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 로마의 기병. 기병 전력에서는 카이사르보다 폼페이우스가 유리했다.
폼페이우스의 안주와 몰락
전투 며칠 폼페이우스는 작전회의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2열의 병사들이 맞붙기도 전에 카이사르는 패주한다.” 로마군은 3열 홍대로 포진하는데, 1열의 병사들이 싸우는 중에 카이사르군이 패주한다는 말이다.
폼페이우스는 손자의 말처럼 나와 상대의 전력을 분석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양측 전력에 관한 계산은 정확했고, 전술은 모두에게 익숙한 방법이었다. 정석대로 움직일 때 폼페이우스는 절대 패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는 카이사르의 승리였다. 패전의 원인을 폼페이우스족에서 찾아보면 폼페이우스의 안주와 임기응변의 부재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못지않은 명장이었다. 그의 병사들의 충성도는 카이사르 병사들의 충성도보다도 훨씬 높았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군단 장교와 병사 3분의 1이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래전 폼페이우스가 인기 절정이었던 시절, 그는 집정관이 되자 자기 군단을 해산시키고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에도 폼페이우스에 대한 예비역들의 충성도는 여전히 높았지만, 폼페이우스는 그 사실에 만족하고 병사들이 고향에서 편히 지내도록 배려했다. 자기 자신도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면서 여행으로 소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우스의 이런 생활을 부추긴 사람은 그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전투를 벌이고, 이제 그 강철 군단을 이탈리아로 돌리려고 할 때도 폼페이우스는 머뭇거리며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한 뒤에 폼페이우스에게 몰려든 병력을 보면 자신의 명성과 인기에 대한 폼페이우스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카이사르의 2배가 넘는 병력을 모았다. 파르살루스에 오지 않은 해군 병력까지 합하면 3배가 넘는다. 그가 좀 더 일찍 병사들을 모으고 대비했더라면,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잠재력을 폼페이우스는 제때 사용하지 못했다.
뒤늦게 병사들을 모아 대회전을 펼치게 되었지만, 이날 전투에서도 폼페이우스는 내내 안전제일주의로 나갔다. 기병과 보병을 동시에 진격시키지 않고,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기병이 먼저 출진하도록 기다렸다. 이 꾸물거림으로 기세를 놓쳤다.
전투 신호가 떨어지자 폼페이우스군 우익의 기병이 돌진했다.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고참병들로 구성된 보병진이 기병의 돌진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말은 겁이 많아 보병이 창과 방패의 숲을 치면 주춤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기병의 돌진 앞에 버틸 줄 아는 보병도 없다. 기병과 보병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모순과 같은 전쟁사의 오랜 격언이었는데,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뒤에 투석병을 태우는 절묘한 아이디어로 무장하고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습격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혼란에 빠졌고, 전장에서 탈락했다.
카이사르는 상대의 기병이 빠진 공간에 자신의 보병을 진격시켰다. 보병전에서도 폼페이우스는 기세를 놓치고 선공을 양보하는 큰 실수를 했다. 병력에서 자신이 절대 유리하고 우익의 승리를 자신했으므로 그냥 기다렸다. 카이사르군이 먼저 치고 나왔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카이사르군은 걸어오는 동안 체력을 소모한다. 그러면 기다리는 우리가 더 유리해진다.
하지만 전투로 단련된 부대, 결사적인 의지로 무장한 부대는 그 정도 기동으로 체력도, 사기도 저하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정예병이 움직이지 않는 폼페이우스 보병진의 약한 곳을 골라서 쳤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패하면서 보병진의 주도권도 카이사르가 쥐었다. 비록 병력은 절반이지만 카이사르의 보병이 정면과 폼페이우스의 좌측면을 동시에 공격하는 양상이 되었다.
이때까지도 보병 전력이 충분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예비대를 동원해 카이사르군을 역포위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무너지는 전선을 방치했다. 폼페이우스는 전황을 보고 우울해하면서도 아직 보병 전력이 충분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카이사르군이 정면과 좌측에서 압박해 오자 폼페이우스 군단은 공황에 빠졌다. 먼저 움직였더라면 카이사르군을 절단하고 공격부대를 포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바람에 여기저기 구멍이 생겼고, 균열이 확대되었다. 마침내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의 사령부 막사까지 밀려 들었다.
갈리아 전역의 참전용사들인 1, 3군단도 이 순간에 힘을 쓰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병력 우위를 믿고 정예병을 집중 운영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공황에 빠지자 정예병들도 휩쓸려 나갔다. 전투는 카이사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카이사르군의 전사자는 200명 미만, 폼페이우스군은 6,000에서 1만 5,000여 명이 전사하고 2만 4,000명이 항복했다. 로마 군단과 로마 군단의 전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부족민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 못지않은 일방적인 승리였다.

▲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2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소극적 전투로 대응하다가 패했다. 카이사르는 기병 뒤에 특별히 고참 보병 2,000명을 숨겨두고 이들로 라비에누스의 기병을 막는 데 성공한다.
분석의 실행과 임기응변
사전 분석, 객관적 분석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폼페이우스는 분석 과정에서도 실수했고, 결과를 ‘세’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큰 실수를 했다.
손자는 분석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에 적용해서 현실에서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작전에는 내게 유리한 조건을 상황에 맞춰 더 유리하게 만드는 임기응변의 과정이 없었다. 분석도 잘못 되었다. 카이사르의 생각과 능력, 구상을 분석 과정에서 빼버리고, 정형화된 틀 속에서 전력을 계산하고 그대로 병사를 밀어 넣었다.
폼페이우스 편에도 라비에누스와 1, 3군단의 백부장【로마 군대 중 100명으로 조직원 단위의 우두머리】, 베테랑 병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손자의 말처럼 상황을 읽고 대처할 수 있는 지모를 갖춘 인재가 있어도 이미 나태해진 조직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반면 카이사르는 열세인 상황에서 적은 보병 전력으로 적의 기병 돌진을 막는 법, 약한 기병 전력으로 적의 전선을 돌파하는 법을 구상했다. 카이사르는 정석대로 병력을 운용하는 뻔한 수를 두지 않았다. 백부장과 정예를 뽑아 적의 예상을 깨고 먼저 공격하고, 적의 약한 곳을 찌르고, 기세를 몰아 적을 밀어붙이고 절단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폼페이우스는 전력 분석을 현장에 적용해 ‘세’로 옮기는 과정이 잘못되었거나 아예 없었다. 수치상으로는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만 믿고, 카이사르라는 변수를 제외한 채 표준 전술대로 강행했다.
반대로 카이사르는 분석을 토대로 ‘세’를 만들었다. 절대 열세의 상황이었지만, 상대의 약점을 찾고, 자신의 약점을 극복할 대담한 방법을 시도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폼페이우스는 패했고, 이집트로 도주했다가 살해되었다.
6. 용병은 적을 속이는 일이다
용병은 적을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사용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고,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적에게 이익이 되는 듯 보이는 것으로 유인하고, 적을 혼란하게 만들어 격파한다.
兵者, 詭道也.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示之近. 利而誘之, 亂而取之,
적이 견실하면 대비하고, 적이 강하면 회피한다. 적을 화나게 해서 교란하고 비굴하게 보여 적이 아군을 깔보게 한다. 적이 편안하면 피곤하게 만들고, 적이 잘 단합되어 있으면 이간한다. 적의 대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비하지 못한 곳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다. 적이 미리 알게 해서는 안 된다.
實而備之, 强而避之, 怒而撓之, 卑而驕之, 佚而勞之, 親而離之, 攻其無備, 出其不意. 此兵家之勝, 不可先傳也.
‘용병(병법)은 적을 속이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 매력적이고 사용할 곳이 많은 말이다.
“전쟁은 거짓말과 도둑질이 칭찬을 받는 유일한 분야다.” 이 말을 하면 냉소적인 지성인이거나 도덕적인 반전론자처럼 보인다. 이런 발언은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거룩한 권유와 도덕적인 설교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가식 없는 말이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역설의 카타르시스를 너무 즐기면 그 자체가 샛길로 빠지는 함정이 된다. “속여도 된다”가 결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손자의 본의를 이해하려면 손자가 살았던 시대의 국가와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그 시대는 청동기 시대였다. 철기가 등장하고는 있었지만, 강철 제조법을 잘 몰라서 무기로 쓰기에는 아직 약했다. 무쇠나 석기로 짓는 농사는 한계가 분명해서 생산력이 현저하게 낮았다. 생산력이 낮으니 인구에 비해 땅은 넓었다. 기병도 없어서 전차가 기병을 대신했다. 물자 부족, 이동력 부족, 인구 부족으로 전쟁에 동원할 물자와 인구가 적으니, 전쟁은 가능하면 빨리 끝내야 했다.
정복에 겨우 성공했다고 해도 병력이 적으니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국내를 수비할 병력이 부족해졌다. 침공을 당한 나라는 이웃 나라에 부탁해 텅 빈 적국을 침공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이웃에 야심가 국왕이 있다면 거저 떨어진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복과 통합이 쉽지 않았다. 정복에 성공하더라도 아군 병력 손실이 크거나 원정으로 국내가 비어 있으면, 다른 나라가 빈틈을 노리고 쳐들어온다.
승자는 승리의 과실을 수확하지도 못하고 철수한다. 손자의 오나라도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무엇을 위해 속일 것인가
『손자병법』은 바로 이런 시대의 한계와 전쟁의 고민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편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면에서도 손자는 제한된 병력과 물자로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한나라의 군대로 어떻게 두 나라를 정복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를 강구했다. 이것이 『손자병법』을 일관하는 문제의식이다.
오늘날로 치면 동일한 자금과 물자를 주고, 성과는 2배로 올리라고요구하는 격이다. 결국 손자는 최소의 투자와 희생으로 2배의 성과를 올리는 전술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각된 방법이 속임수다.
손자는 속임수를 사용해 적을 혼란하게 만들어 격파하고, 적의 방비가 없는 곳을 치고, 적을 지치게 만들거나 분열시켜서 조직력과 사기를 떨어트린 뒤에 공격하라고 말한다. 제한된 병력으로 최대 효율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몇 개 나라는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물자와 전력이 풍부한 국가라면 전쟁에서 굳이 속임수는 필요 없을까? 아니다. 전투는 병사들의 생명과 국가 자산의 손실을 요구한다. 기업의 목표가 최대 이윤이듯,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최대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
속임수와 계략이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세라고 이해하면 전쟁에서만 통용하는 교훈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사회 모든 분야에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라면 언제나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리더가 항상 효율을 추구하는 자세를 지니고, 노력을 계속해야 자신이 지닌 힘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10대 1의 싸움에도 도전하고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소수로 다수를 제압한 명장들의 일대기를 보면 그들이 이런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속임수라는 것은 아무래도 그 자체에 범죄적인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 부작용이 있다. 몰래 먹는 빵이 맛있다고, 거짓말로 얻은 수익은 양심의 가책 못지않게 더 짜릿한 쾌감을 함께 던져준다. 악마의 유혹, 악마의 쾌감이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고, 용병은 속임수라는 말에 현혹되면 속임수를 위한 속임수가 탄생한다.
속임수를 위한 속임수 : 일본 해군의 알류샨 침공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향방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통한의 패배였다. 객관적 지표로 보면 미군이 승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에게는 제2의 진주만, 아니 진주만보다 더 충격적인 참패가 될 해전이었다. 이 해전의 승패가 바뀐 것은 미군의 암호 해독이 결정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군 측의 해석이다. 미군이야 상대의 실수 덕분에 이겼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승리의 요인이라고 강조하고 싶을 것이다.
일본군이 패하게 만든 결정타는 일본군의 쓸데없는 양동 작전이었다. 일본군의 항공모함은 아홉 척, 미군은 두 척뿐이었다. 미군은 심하게 파괴된 요크타운 호를 급하게 수리해서 세 척이 되었지만 그래도 9 대 3의 열세였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 일곱 척을 투입했는데,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킨다고 쓸데없이 양동 작전을 펼쳐 항모 두 척을 알류샨 열도(Aleutian Islands)로 보냈다. 미드웨이 공격함대도 둘로 나누어서 전력을 또 분산시켰다. 반면 미군은 일본군의 주력 함대에 전력을 집중했다. 7 대 3이었어야 마땅했을 전투가 4 대 3의 전투가 되었다. 양동 작전의 목적은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킨다는 것이었는데, 자신들의 전력만 분산시킨 결과가 되었다.
전력 분산이 없었다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했어도 절대 승리하지 못했다. 일본 항공모함 다섯 척이 침몰하고, 미군 항공모함 세 척이 침몰했더라도 일본군의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일본 항공모함 세 척이 침몰하고 미군은 한 척이 침몰했다.
일본군의 양동 작전이야말로 전력이 유리하더라도 최대 효율을 추구하라는 『손자병법』의 교훈을 따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 최대 효율을 추구하는 태도는 옳지만, 속임수가 최대 효율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일본군은 속임수가 주는 쾌감,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다.
미드웨이 해전뿐 아니라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군의 작전은 쓸데없이 복잡했으며, 기만 행동과 양동을 너무 좋아하고, 여기에 많은 체력과 시간을 소모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미국의 압도적 산업력에 대한 잠재적 공포감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루자는 강박증을 낳았고, 이것이 속임수와 복잡한 작전을 습관처럼 반복하게 했다는 해석도 있다. 탁상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관료주의적 속성, 참모진의 능력에 대한 과신, 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 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지적이 옳든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속임수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속임수를 위한 속임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속임수는 ‘최대 효율’이라는 명제에 종속한다. 적군에게 아군의 공격지점을 속이고, 텅 빈 방어선을 돌파한다면 이보다 멋진 승리, 이보다 효율적인 승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쾌감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전투를 회피하는 수단이 되기 쉽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소모전이고 전투는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속임수와 효율을 잘못 적용하면 온갖 소심하고 비겁한 행위를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할 것이다. 인간은 강한 듯하면서도 나약하고, 진취적인 듯하지만 보수적이다. 특히 미지의 세계, 해보지 않은 일, 새로운 도전 앞에서는 극도로 수동적인 반응을 보인다. 전쟁터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다 보니 이런 태도가 10배 이상 증폭된다. 손자가 말한 속임수의 본의를 놓치고, ‘두려움’과 ‘희생’을 피하기 위해 속임수에 의존하다 보면 용기와 진취성을 상실할 수가 있다.
7.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적군과 아군의 전력을 비교 계산해야 한다. 승리하는 자는 승산이 많은 쪽이다. 사전에 비교 계산해서 승리할 수 없다고 나오면 승산이 적은 것이다. 승산이 많은 자는 승리하고 승산이 적은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하물며 승산이 전혀 없는 자야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런 계산을 통해 전쟁의 승부를 미리 알 수 있다.
夫未戰而廟算勝者, 得算多也; 未戰而廟算不勝者, 得算少也. 多算勝, 少算不勝, 而况於無算乎! 吾以此觀之, 勝負見矣.
손자를 알든 모르든, 세기의 명장들은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조성하고, 전투를 벌였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일본 수군에 대해 절대적인 승률을 가져갔던 이유는 이길 수 있는 환경에서 싸운다는 원칙을 고수했던 덕분이다.
하지만 때때로 이 말이 기회주의적으로 해석되곤 한다. 명장과 패장, 졸장의 차이는 바로 이 ‘이길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의 차이이자. 이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능력의 차이다.
기원전 327년 혹은 328년에 알렉산드로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 중이었다. 현지의 유력 지도자인 옥시아르테스(Oxyartes)는 아프가니스탄의 자랑인 요새화된 높은 바위산 위에 웅거해 있었다. 그는 ‘이 도시를 함락하려면 날개 달린 병사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알렉산드로스는 ‘날개 달린 병사’ 대신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병사’를 찾았다. 그들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해 거액의 보상을 내걸었다. 그는 도시 위에 솟아 있는 바위산 정상으로 오르는 자에게 12달란톤(1등)에서 300다릭(골찌)【다릭은 페르시아의 금화로, 1다릭은 약 8.4g에 해당한다. 300다릭이면 대략 0.1 달란톤 정도】의 포상을 주겠다고 했다. 300명의 병사가 자원했고 살아서 정상에 오른 자는 270명이었다. 겨우 한 개 중대 병력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군이 날개 없이도 산 위에 올라 아래로 공격할 수 있다는 충격에 수비대는 항복했다.
이기는 상황을 만들다
로마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꺾은 자마 전투는 객관적인 상황에서 보면 스키피오의 절대 우세였다. 전략적 상황과 병력에서 우위였고, 지금껏 늘 한니발의 우세를 만들어주던 누미디아 기병이 한니발을 배신하고 로마 편에 붙었다.
그럼에도 승부는 박빙이었다. 로마군의 마지막 3열까지 투입했을 때 스키피오는 패배 직전의 상황이었다. 예비대가 전혀 없었다. 그때 패주하는 한니발 기병 ―어쩌면 유인책이었던― 을 추격해갔던 누미디아 기병이 극적으로 돌아와 카르타고군을 친 덕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 박빙의 승부가 벌어지기 전에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대신, 한니발의 본국 카르타고를 침공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원로원의 허락을 얻었다. 그런데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직진하지 않은 채 먼저 시칠리아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실전 및 실전 같은 강훈련을 치르며 1년을 소비했다. 원로원은 그가 꾸물거린다고 비판했다. 후대의 군사 연구자들 중에도 이 비난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마 전투의 양상을 보면 스키피오가 옳았다. 한 줌의 예비대도 없이 전력을 투입하는 전투는 아무 군대나 해낼 수 있는 전투가 아니다. 완벽하게 조직되고 훈련되고 일체감과 자신감이 왕성한 최상급의 부대만이 가능한 전투였고, 정말로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로마군의 훈련과 자신감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자마 전투는 한니발의 승리였다.
‘나는 전쟁의 승부를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이 객관적 상황에 체념적으로 순응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런 상황을 만드는 능력, 창조와 도전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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