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순발력테스트를 하다
『소화시평』 권하 85번은 시가 지어진 배경을 담고 있다. 아무래도 이전의 시들은 이미 시들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시가 지어진 배경을 얘기하지 못하고(예외적으로 시가 지어진 배경이 문집에 실린 경우엔 그 배경과 함께 시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저 인상 비평을 가할 수밖에 없는 반면, 비교적 최근의 시이고 더욱이 자기 형의 시이기에 이 시에 대해선 배경 설명과 함께 그 당시의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편을 읽고 있으면 그 당시에 왜 이런 시를 짓게 됐는지 상황을 이해하게 되며 홍만종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인 ‘형은 천부적 자질이 민첩하여 붓을 잡고 시를 지을 적엔 샘물이 솟구치는 듯 큰 강물이 매달린 듯했다[天才敏捷. 操筆賦詩, 泉湧河懸].’는 말이 과장이 아닌 진실임을 알게 되고, 거기에 덧붙여 왜 이 시를 읊었을 때 주위의 동료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마지않았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이처럼 시를 단순히 배경과 함께 보는 것은 더욱 의미가 깊다. 시든, 영화든, 예술품이든 어떤 작품이든 감상법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배경지식은 배제한 채 그 작품에만 몰입하여 보는 방법이 있고, 둘째는 작품을 지은 작가, 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 문화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보는 방법이 그것이다. 전자의 방법으로 감상할 때는 온전히 작품의 가치에만 주안점을 두고 감상할 수 있기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어떤 관점도 없이 보기에 애써 담은 메시지조차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단점이다. ‘관점이 있어야 상이 맺힌다’는 말처럼 나름의 해석의 틀은 있어야 작품을 그나마 볼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으로 감상할 때는 여러 배경지식을 통해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배경지식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진 나머지 과잉해석을 한다는 점은 단점이다. 이런 경우를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의 ‘아름다운 세상’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 같은 미술작품을 그냥 지하철 역사에 가져다 놓은 경우 사람들은 ‘그저 누구나 그릴 수 있는 평범한 작품’이라 본 반면에, 대형 화랑에 걸어놓은 경우 사람들은 ‘대단한 작품’이라 보았다. 이처럼 ‘지하철=누구나 전시할 수 있는 공간 / 대형화랑=엄청난 예술가만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란 선입견이 작품 감상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어느 방식이 좋냐 나쁘냐를 단순하게 말할 순 없지만 나의 경우 한시의 감상에 있어선 이런 식으로 배경과 함께 한시를 감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야기를 통해 한시를 더 가깝게 느끼게 되고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이번엔 아주 재밌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경쇠소리를 쳐서 울리는 동안, 즉 2분 정도의 사이에 시의 제목과 운자를 보여주고 시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요즘 식으로 하면 ‘삼행시 짓기’와 비슷하지만 그것에 비하면 글자수의 제한과 운자까지 맞춰야 하기에 훨씬 어려운 과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순발력 테스트라 할 수 있다. 눈앞에서 바로 세 글자를 던져주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세 글자를 머릿글자로 삼아 글을 지어야 하고 그게 나름의 스토리까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삼행시 짓기는 주로 예능프로에서 단골로 등장하곤 한다. 사람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통해 재미를 유발할 수 있고, 그 중에 간혹 기지를 드러낸 경우는 인생의 명장면으로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장 재밌었고 기발했던 삼행시는 박명수가 ‘북아메리카’로 지은 시였다. 이땐 해외에 나가있는 가족에게 한국에 있는 친지들이 선물을 보내주는데 무한도전 멤버들이 그 선물을 전해주는 특집을 진행 중이었다. 박명수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전해줘야하기에 이 주제어가 선정된 것이다.
북: 북쪽에 계신
아: 아름다운
메: 메리메리
리: 리얼(real)
카: 카인드니스(Kindness) 여러분 조금만 참으시라우요. 저 아름다운 북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막상 이렇게만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왜 재미있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영상과 함께 그 상황을 보고 그가 북한 말투를 흉내 내어 저 오행시를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기발할뿐더러, 재밌기까지 하다. 이처럼 홍석주도 제한된 시간과 그럼에도 주위에 한참 기대하는 시선들에 잔뜩 긴장되었을 것이다. 막상 경쇠가 울리고 벗이 시제와 운자를 보여줬을 땐 머리가 새하얘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정말로 그 짧은 시간에 한시를 지어냈고 거기에 현실에 대한 의미까지 담고 있는 명구절을 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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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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