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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시평 감상 - 하권 84. 노둔함의 저력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84. 노둔함의 저력

건방진방랑자 2021. 10. 30.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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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둔함의 저력

 

 

소화시평권하 84의 주인공은 백곡 김득신이다. 김득신하면 글을 읽은 횟수를 기록하다[讀數記]란 글을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이 글에도 나타나다시피 진득하게, 어찌 보면 매우 바보처럼 앉아 하나의 글을 여러 번 읽는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를 표현할 때 노둔하다[]’는 표현은 빠지질 않는다. 실제로 84번에도 천부적 자질이 매우 노둔했다[才稟甚魯]’고 홍만종도 서술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홍만종은 노둔함이야말로 학자로서 최고의 자질이란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노둔하기 때문에 예리해졌다[由鈍而銳]’는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황당해할 것이다. 노둔함과 예리함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군중 속의 고독처럼 완전히 반대되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개념을 붙어놓은 것이기도 해서 뭔 말 장난이야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반대어야말로 동전의 양면처럼 실제로는 통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제시한 단어들이 시어로 등장하면 뭔가 말로는 표현되지 않지만 적확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어리는 것이다. 노둔함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 안다’, ‘머리가 똑똑하다는 일체의 자부하는 마음을 거부한 것이기도 하다. 모를 때에야 사람이 배울 수 있듯이, 노둔하기 때문에 진득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노둔함은 더 이상 저주의 말이 아닌 좋은 자질로 떠오르며 그건 곧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저력이 되는 것이다.

 

 

논어노둔함의 대표주자로 증삼을 들고 있다. 공자는 증삼에 대해 평가를 하면서 증삼은 노둔하다[參也魯].”라는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마치 증삼을 비판하는 평가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핵심은 증삼이 그 후로 이루어낸 성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이천은 다음과 같이 풀어놓고 있다.

 

증자의 학문은 진실로 도타울 뿐이다. 성인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은 총명하고 재주 있고 말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침내 그 도를 전한 이는 바탕이 노둔한 사람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은 성실함을 귀하게 여긴다.

曾子之學, 誠篤而已. 聖門學者, 聰明才辯, 不爲不多, 而卒傳其道, 乃質魯之人爾. 故學以誠實爲貴也.

 

정이천이 증삼에 대해 이와 같은 비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인(里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자의 아리송송한 말을 증삼은 한 번에 알아듣고 그의 말을 첨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의 글에 대해선 여러 설들이 많고 위령공(衛靈公)의 오리지널한 대화파편을 후대 문인들이 증삼을 추켜세우기 위해 새롭게 편집했다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공자 사후의 학단에 증삼 학파가 크게 부흥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증삼이 노둔했기 때문에 공자의 도를 제대로 전수받았고 전수하게 됐다는 사실만은 진심인 것이다. 이 경우야말로 노둔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 예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노둔함을 칭송하는 문화는 동양사회에선 예로부터 있었으며 그건 지금까지도 유구히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일화는 어리석음이 세상을 바꾼다[愚公移山]’라는 고사성어나 순자천리마와 조랑말의 비유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과거에 변화가 느리던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4차 산업혁명까지 거론되는 이때에 더욱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있다. 변화가 아무리 빠르고 물질문명의 순환이 아무리 급격하다 해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느리지만 성실한 노력들이 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가치가 되며 바로 그런 진실한 실력들이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가려는 흐름을 멈추게 하고 공존의 가치, 그리고 느림의 미학, 성실의 아름다움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럴 때 우린 현 시대 상황이 무작정 부여하는 빠름이나 속성(速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인간으로서의 가치인 노둔함을 칭송하며 김득신처럼 증삼처럼, 그리고 자기의 자리에서 성실히 해나가고 있는 뭇 사람들처럼 자신의 노둔함을 무기로 성실하게 한 땀 한 땀 새겨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쌓여진 것들은 사상누각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충분히 빛을 내게 되며 그럴 때 우린 노둔함을 통해 예리해졌다[由鈍而銳]’고 평가받는 김득신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둔하기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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