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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그림과 시 - 4. 정오의 고양이 눈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그림과 시 - 4. 정오의 고양이 눈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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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오의 고양이 눈

 

 

마음을 놓치면 졸작이 된다

 

 

옛날에 절묘하다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이 있었다. 장송(長松) 아래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神采)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천하의 명화로 일컬어졌다. 처사(處士) 안견(安堅)이 말하기를, “이 그림이 비록 묘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고개를 올려 보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는 법인데, 이것은 없으니 그 뜻을 크게 잃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물건이 되었다.

古有買妙畵於中國者. 畵長松下, 有人仰面看松, 神采如生, 世以爲天下奇畵也. 處士安堅曰: “是畵雖妙, 人之仰面也, 項後必有皺紋, 此則無之, 大失其旨.” 自此終爲棄物.

 

또 옛날 그림으로 묘필(妙筆)을 일컬은 것이 있었다. 늙은이가 손주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神采)가 살아있는 듯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이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이 그림이 비록 좋긴 하다만, 무릇 사람이 어린 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그 입이 절로 벌어지는 법인데, 이는 다물고 있으니 크게 실격(失格)이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그림이 되었다.

又有古畵, 稱妙筆. 畵老叟抱兒孫飯以餉之, 神采如活. 康靖大王見之曰: “是畵雖好, 凡人之食兒, 必自開其口, 是則含之, 大失畵法.” 自此終爲棄畵.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이야기다. 두 그림 모두 기교로 보아서는 이미 정점(頂点)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목 뒤의 주름과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 대한 관찰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화가가 놓친 것이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과, 손주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보니, 그것은 결코 사소한 실수라 할 수 없다.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리(千里)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毫釐之差 千里之繆]. 위 예화는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유몽인(柳夢寅)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대저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번 본의(本意)를 벗어나면, 비록 금장수구(錦章繡句)라 하더라도 식자(識者)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夫畵與文章何異? 一失本意, 雖錦章繡句, 識者不取, 有具眼者能知之].”라고 덧붙였다. 예술을 감상하는 일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관찰력과 안목

 

() 휘종황제가 용덕궁(龍德宮)을 완공한 후 어원의 화가를 불러 궁중 각처에 벽화를 그리게 한 일이 있었다. 완성되어 황제가 직접 둘러보았으나 하나도 칭찬하는 바가 없었다. 다만 전각 앞 주랑(株廊)에 그린 월계화(月季花) 그림을 가리키며 누가 그린 것이냐고 물었다. 신출내기 소년 화가가 앞으로 나왔다. 황제는 크게 상을 내렸다. 사람들은 까닭을 몰라 의아해 하였다. 황제는 월계화는 잘 그리는 자가 드물다. 대개 사계절 아침저녁으로 꽃술과 잎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봄날 정오의 것인데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후하게 상을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춘의 화계(畵繼)란 책에 보이는 일화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구양수(歐陽修)가 한 떨기 모란꽃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얻었다. 잘 된 그림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그림을 가만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꽃이 활짝 피고 색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이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의 모란이다. 고양이 눈의 검은 눈동자가 실낱같이 가느니 이 또한 정오의 고양이 눈이다.” 예술 작품의 진가는 이렇듯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또 황전(黃筌)이란 화가가 나는 새를 그렸는데 목과 다리를 모두 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새는 목을 움츠리면 다리를 펴고, 다리를 움츠리면 목을 펴지 둘 다 펴는 법은 없다고 지적하였다. 알아보았더니 실제로 그러하였다. 이 또한 예리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준다. 가짜와 진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 가짜일수록 오히려 더 진짜같이 보이는 법이다.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정신은 간 데 없이 손끝이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정신의 향기가 없는 시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그래서 송() 나라 진욱(陳郁)설부(說郛)에서 대개 그 형상을 그리는 데는 반드시 그 정신을 전해야 하고, 그 정신을 전하는 데는 반드시 그 마음을 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자와 소인이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데, 귀하고 천하며 충성스럽고 사악한 것이 어찌 스스로 구별되겠으며, 형상이 비록 닮았다 하더라도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그리기가 오직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개지(顧愷之)손으로 오현을 타는 것은 그리기 쉽지만, 돌아가는 기러기를 눈으로 보내는 것은 그리기 어렵다[手揮五絃易, 目送歸鴻難].”고 한 것도 다 같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점은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性情)천진(天眞)함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리고 말아 어떠한 생동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청() 나라 원매(袁枚)는 그의 속시품(續詩品)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모에 부족함이 있어서 분을 바르고 연지를 칠한다. 재주에 부족함이 있으면 전고를 끌어다 쓰고 책에서 찾게 된다. 옛 사람 문장이라 하여서 다 잘 된 것은 아니니,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슬퍼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의 광대가 된 것이다. 이에 미인을 그려도 사랑스럽지 않고, 난초를 그려도 향기가 없게 된다. 그 연유를 헤아려 보면 진정 나타내려는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안목 있는 사람의 눈엔 덧칠한 게 보인다

 

홍만종(洪萬宗)소화시평(小華詩評)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호민(李好閔)이 어느 날 소낙비가 창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산 비가 창문에 떨어짐이 많구나[山雨落窓多]”라 하였다. 그리고는 이를 이어 다시 짓기를, “시냇물은 대 숲 뚫고 졸졸 흘러가네[磵流穿竹細]”라 하고, 마침내 시 한편을 이루어 이산해(李山海)에게 보였다. 그러자 그는 산우락창다(山雨落窓多)’에만 비점을 찍어 돌려보냈다.

이호민이 그 까닭을 묻자 이산해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이 실제 경물과 만나 먼저 이 구절을 얻었을 것이다. 나머지 구절은 그 다음에 만든 것이다. 시 전편의 참된 뜻이 모두 이 구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만 비점을 쳤다.”

五峯適見急雨打窓, 忽得一句曰: “山雨落窓多.” 仍續上句曰: “磵流穿竹細.” 遂補成一篇. 寄示鵝溪, 鵝溪只批點山雨之句而還之.

五峯後問其故, 鵝溪曰: “公必値眞境, 先得此句. 而餘皆追後成之, 一篇眞意都在此句故耳.” 其詩鑑如此.

 

 

비록 속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안목 있는 사람 앞에서 진짜와 가짜는 금세 판별되고 마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지어낸 시, 인위적으로 꾸며낸 시

 

다음은 강혼(姜渾)임풍루(臨風樓)란 시의 일련이다.

 

紫燕交飛風拂柳 제비가 짝져 날아 버들가지 날리는데
靑蛙亂叫雨昏山 청개구리 개굴개굴 비 기운에 어둑한 산

 

김유(金廋)객중우음 봉증단오문안사정령공(客中偶吟 奉贈端午問安使丁令公)시에서 이를 변용시켜 다음의 일련을 얻었다.

 

遙山帶雨池蛙亂 먼 산 비 기운 띠자 연못 개구리 어지럽고,
高柳含風海燕斜 버드나무 바람 머금어 제비는 비스듬 나네

 

한시는 7언의 경우 넉 자 석 자, 5언의 경우 두 자 세 자로 끊어 읽는다. 또 각구는 허사(虛辭)와 실사(實辭)로 이루어진다. ‘자연(紫燕)’청와(靑蛙)’에서 ()’()’이 허사라면, ‘()’()’는 실사이다. ! 이제 두 구절을 비교해 보자. 앞 시의 실사는 의 여섯 글자다. 이 여섯 글자를 표시해 두고, 뒤의 시에서 어떤 위치로 옮겨 가 있는지 살펴보자. 김류의 시는 강혼의 시와 비교하여 볼 때 우선 아래 위가 바뀌었고, 앞뒤의 순서도 바뀌었으며, 다만 허사를 교체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시의 의경을 비교해 보자. 둘 다 봄날 비 올 무렵의 경물을 묘사하고 있다. 강혼의 시를 보면, 제비가 짝져 날아 그 활발한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켜 버들가지를 하늘거리게 하고, 청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대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먼 데 산이 빗기운에 어둑해지더라고 했다. 봄날의 약동하는 흥취가 제비의 경쾌한 날개짓과 청개구리의 울음소리 속에 물씬하다. 뿐만 아니라 제비와 청개구리의 행동은 무정물인 버드나무 및 산과 상호 교감하고 있다. 그런데 김류의 시는 어떠한가. 그저 먼 산이 빗기운을 띠자 개구리도 그걸 보고 시끄럽게 울고, 버드나무 사이로 부는 세찬 바람에 제비의 날개짓도 비스듬하다는 것이니, 단어와 단어 사이의 탄력은 없고 여운도 적다. 어음(語音) 면에서도 음악미가 부족하다. 강혼이 봄날의 경치와 직접 마주하여 떠오른 흥취를 노래했다면, 김류의 시는 강혼의 구절을 가공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사용이 거의 같음에도 불구하고 시의 격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다. 그런데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마군후(馬君厚), 묘도(猫圖), 18~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오후 3시의 고양이 눈이다. 발톱도 굵을 때만 나오니 화가의 눈매가 매운 줄을 알겠다   

 

 

 

인용

목차

1. 그리지 않고 그리기

2. 말하지 않고 말하기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4. 정오의 고양이 눈

5.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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