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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9장 - 4. 주희의 하언자(下焉者)에 이의제기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9장 - 4. 주희의 하언자(下焉者)에 이의제기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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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주희의 하언자(下焉者)에 이의제기

 

 

그 다음 하언자(下焉者)’는 하면서 계속되는데 앞에서 여기에 대한 주자(朱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상(()를 댓구를 이루는 것으로, 다시 말해 상()을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해석해서 상언자(上焉者)를 옛날의 왕으로 해석했다면, ()는 거꾸로 시대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따라서 하언자(下焉者)는 우리에게서 가까이 있는 왕들, 즉 현세에 있는 왕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주자(朱子)는 뭐라고 했다고 말했습니까? ‘하언자 성인재하(下焉者 聖人在下)’하면서, ()를 시대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즉 위()가 없다는 어떤 계층적 의미로 풀었죠? 주자(朱子)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수선부존(雖善不尊)’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수선(雖善)’이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존()을 구체적인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부존(不尊)을 위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언자(下焉者)를 공자(孔子)와 같이 성인(聖人)의 성품은 가지고 있으되[雖善] 득위(得位)를 하지 못하고 아래 있는[不尊] 사람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말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댓구가 잘되지 않습니다. ()을 시대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댓구를 생각해볼 때 하()는 시대적으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신분상 아래에 있다라는 말로 본다면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과 댓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선(雖善)이라는 말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이 부존(不尊)’이라는 말을 주자(朱子)와 같이 구체적인 위()가 없다는 의미로 보지 않고 존엄성이 없다는 뜻으로 본다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에서 이 문장을 본다면 시대적으로 밑으로 내려오는 왕들은 좋기는 하지만 뭔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존엄성이 떨어진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단군 할아버지는 정치를 잘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그런데 후대의(고종? 김영삼?) 같은 사람도 혹시 정치를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의 것이니까 뭔가 레벨이 떨어지고 존경심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용혹문(中庸或問)에 보면 당시의 주자(朱子)에게도 이미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주자(朱子)의 제자 중 누군가가 이 구절이 삼황오제(三皇五帝) 삼왕(三王) 오패(五覇)의 순으로 역사가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전제하면서, ‘여기의 하언(下焉)이라는 것은 후대의 패자(覇者)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주자(朱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자(朱子), “이 구절에서 상언자(上焉者)에게서나 하언자(下焉者)에게서나 수선(雖善)이 공유되고 있는데 어찌 패자(覇者)에게 수선(雖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곤란하다.”고 답하면서 그 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자(朱子)의 설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나는 상하(上下)의 대칭을 주자(朱子)와 같이 바꾸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상()은 위, 즉 역사적으로 상대(上代), ()는 아래, 즉 역사적으로 하대(下代)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면, ‘꼭 왕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상고시대의 것은 좋기는 하지만, 즉 옛 것은 좋기는 하지만 증험이 없어서 신험이 없고 신험하지 않음으로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언(下焉)이라는 것은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현대의)를 말하는 것으로서, 요새 말로 하면, 우리 시대의 것이라든가, 최근의 것이라든가 하는 이러한 것은 좋기는 하지만 존엄성을 결여하고 있다. 존엄성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신빙성이 없어서 의지할 만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물론 주자(朱子)의 생각이 옳으냐, 나 김용옥의 생각이 옳으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나름이지만, 이런 아규먼트(Argument, 논쟁) 상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논의는 이러한 관점으로 진행시키겠습니다.

 

아무튼 이 중용(中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또 하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곧 오늘날 우리를 이끌어가는 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여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교(儒敎)의 철저한 현실주의가 있는 것인데 앞 장(28)에 나왔던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이 말과 끊임없이 대칭을 이루면서 문장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깁니까?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하언자(下焉者)
주희 도올
공자와 같이 덕성은 갖췄지만 지위가 없는 이 현 시대의 최고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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