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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29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29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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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문명창시자와 잘못

 

 

王天下有三重焉, 其寡過矣乎!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잘하면 그 과()를 줄일 수 있다.
 
氏曰: “三重謂議禮制度考文. 惟天子得以行之, 則國不異政, 家不殊俗, 而人得寡過矣.”
여씨가 삼중(三重)은 예악과 제도와 절문을 말한다. 오직 천자만이 얻어 행할 수 있으니 나라에 다른 정치가 없고 집엔 다른 풍속이 없다. 그리하면 천자의 감화로 인해 사람들이 허물이 적어진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는 왕천하(王天下)’과기과(寡其過)’의 해석에 상당히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 왕천하(王天下)’라는 말을 천하에서 왕노릇한다는 의미로 간단하게 해석합니다만, 여기서 이 은 단순히 (king)’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유교(儒敎) 경전에서, 왕천하(王天下)’천하의 왕노릇을 한다는 뜻으로 단순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예악(作禮樂)’, 예악(禮樂)을 만든다는 구체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라는 구체적 ()’를 얻는다는 것은 고대 사회 리더쉽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유교(儒敎)적 맥락에서 이 왕천하(王天下)’는 역시 작예악(作禮樂)’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서도 작예악(作禮樂)’으로 해석해야 의미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작예악(作禮樂)’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휘로 푼다면 어떤 문명에 대해서 그 문화를 만든다는 의미예요. 따라서 왕천하(王天下)’라는 말은 천하를 지도한다는 의미로서, 궁극적 의미로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것[三重]’과 연결시키면 보다 확실합니다. 29에서는 삼중(三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앞장의 맥락을 이었다고 했을 때, 삼중(三重)’28의례(議禮제도(制度고문(考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주자(朱子)도 여대림(呂大臨)을 인용하면서 이 세 가지 소중한 것은 앞 장에서 언급되었던 의례(議禮제도(制度고문(考文)’이라고 주()를 달고 있어요[呂氏曰 三重謂議禮制度考文]. 앞 장에서 이 세 가지는 문명의 3대 요소를 작()하는 것이라고 했죠? 그러므로 왕천하(王天下)’작예악(作禮樂)’으로 보아야 자연스럽게 의미가 통해요. 따라서 이 문장 중 첫 번째 구절은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는, (), (), () 세 가지를 작()하는 것이 중요한데~ ’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292. 문명창시자가 잘못이 적으려면

 

 

다음에 연결되는 과기과(寡其過)’의 해석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를 단순히 어떤 잘못이나 실수, 영어로 말한다면 미스테이크(mistake)로 생각해서, 이 말을 잘못하는 빈도를 줄인다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데, 고전의 맥락을 모르는 데서 오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孔子與之坐而問焉, :“夫子何爲?” 對曰:“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使者出. 子曰:“使乎! 使乎!”
거백옥이 공자(孔子)에게 사람을 심부름 보냈다. 공자(孔子)가 그 심부름 온 사람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선생께서는(거백옥) 요즈음 뭐하고 지내시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우리 어른께서는 늘 그 허물을 줄일려고는 애쓰시지만 썩 잘은 못하시고 계신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심부름 온 사람이 돌아가자 공자(孔子)그 사람 심부름 보내는 사람 한번 잘 고르는 구만라고 말했다.

 

거백옥(蘧伯玉)은 위나라 대부이고, 이 글에서 부자(夫子)는 거백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사호사호(使乎使乎)’는 사람을 제대로 뽑아서 보냈다는 의미예요.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구절에도 과기과(寡其過)’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중용(中庸)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여기서 심부름 온 사람이 자기 상관인 거백옥에 대하여 감히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을 해도 그것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또 공자(孔子)가 이를 칭찬하는 것은, ‘과기가(寡其過)’를 적극적인 도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과기과(寡其過)’라는 것은, 미스테이크(mistake)의 빈도를 줄인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바로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실천이 되며 또 유교(儒敎)의 이상적 삶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죄, ‘sin’이라는 개념이 매우 부정적(negative)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동양에서 이 ()’라고 하는 것은 군자에게 있어서 상당히 긍정적(positive)인 의미가 있으, 그것을 줄인다고 하는 문제는 왕천하(王天下)하는 자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우면서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의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말을 참고하도록 합시다. “자공이 말하기를, 군자의 허물이라는 것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고쳤을 때는 모두들 우러러 본다[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여기 일월지식(日月之食)’은 일식과 월식을 가리킵니다. 논어(論語)의 이 구절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군자에게서 이 ()’라는 것은 일식이나 월식 현상과 같이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과()를 감추려 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그걸 고쳐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를 고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군자에게서 ()’, 이 허물이라는 것은 내면적으로, 즉 자기 속에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식이나 월식과 같이 누구에게든지 다 보이는 것이며 그 허물을 줄인다는 것[寡其過]은 군자의 덕성에 있어서 도덕적 진보를 나타내는 하나의 공개적 개념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한 번 강조 하지만 동양인이 말하는 ()’라는 개념을 부정적인 맥락의 실수(negaive mistake)’ 정도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군자에게서 허물이라는 것, ()’라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 없을 수는 없지요. ‘()’는 일식이나 월식과 같이 명명백백한 것입니다. 항상 잘못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넘어갈 때만 도덕적 진보가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역사는 이 일식월식과 같이 명명백백한 ()’를 고치는[更之] 과정이 결여된 역사입니다. 전두환도 그렇게 명명백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라는 ()’를 가지고 있던 인간이었고, ‘왕천하(王天下)’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그는 자기 위()에 걸맞은 역사적 요청을 거부한 겁니다.

 

일본 사회도 명명백백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매우 나쁜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정치 행태 중에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인데, 일본 사람들은 절대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시인하지 않아요. 그놈의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심해서, 모든 게 흐물흐물 넘어가면 다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것이 마치 동양사회의 특색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儒敎)의 이상은 잘못된 것을 우물우물 넘겨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양 사회를 생각하면서 유교(儒敎)란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다라고 헛다리짚고 있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집고 넘어갈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과기과(寡其過)’의 주어가 누구이냐, 즉 그 허물을 줄일 수 있는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입니다. 주자(朱子)는 이 문장에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천자가 이것[三重焉]을 잘 행하면 나라의 정치가 다르지 않고 가()는 속()이 다르지 아니하고 사람들(백성)에게서 허물이 적을 것이다[惟天子得而行之 國不異政 家不殊俗 人得寡過矣].”

 

여기서 주자(朱子)는 허물이 적게 되는[寡其過] 주인공을 인(), 즉 일반의 대중으로 보고 있는데 사실 이런 주자(朱子)의 해석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주자(朱子)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은 허물이 있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주어를 일반적인 사람으로 바꾼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서 허물이 적게 되는 주인공은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자(朱子)는 주어를 바꿔서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삼중언(三重焉)을 잘 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라고 보고 있다는 말인데 내가 보기에 주자(朱子)는 이 문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죠. 과기과(寡其過)를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실천이고 잘 안되지만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매우 도덕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과기과(寡其過)의 주어는 당연히 왕천하(王天下)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본다면 예악(禮樂)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을 잘 하면 왕천하(王天下)하는 자에게 있어서 그 허물이 적어질 것이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말이 이어지겠습니까? 이 문명의 3대 요소를, 포괄해서 말한다면 예악(禮樂), 즉 문명의 패러다임을 잘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말이 이어지겠죠? 다음을 봅시다.

 

 

 

 

 

 

293. 옛 이상적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 이유

 

 

上焉者雖善無徵, 無徵不信, 不信民弗從; 下焉者雖善不尊, 不尊不信, 不信民弗從.
하언자(上焉者)는 비록 선()하나 징()하지 않고, ()하지 않으므로 신()이 없고, ()이 없으므로 민()이 따르지 않는다. 하언자(下焉者)는 비록 선()하나 존()하지 않고, ()하지 않으므로 신()이 없고, ()이 없으므로 민()이 따르지 않는다
 
上焉者, 謂時王以前, 如夏商之禮雖善, 而皆不可考. 下焉者, 謂聖人在下, 如孔子雖善於禮, 而不在尊位也.
상언자(上焉者)는 당대의 왕조 이전을 말하니 마치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 가 비록 좋으나 모두 고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언자(下焉者)는 성인이 아랫 지위에 있다는 말이니 마치 공자가 비록 예에 박학하지만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문장에는 상언자(上焉者)ㆍ하언자(下焉者)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자의 주()를 보면 여기의 상언자(上焉者)’라고 하는 것을 하()나라나 상()나라의 왕과 같은, 시대적으로 윗대의 왕들[上焉者謂時王以前如夏商之禮]로 해석하고 있고, ‘하언자(下焉者)’는 공자와 같이 성인의 덕성을 갖추고 있으나 위를 갖지 못하여 아래에 있는 사람[下焉者謂聖人在下如孔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상언자(上焉者)를 그렇게 보는 데에는 나도 이의가 없으나 하언자(下焉者)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는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근 차근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왜 그런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상언자 수선무징(上焉者 雖善無徵)’

상언자(上焉者), 즉 현세를 지배하고 있는 왕들이 아닌 아주 시대적으로 오래된 옛날의 왕들이나 사람들은, 비록 선하나[雖善] 증거가 없다[無徵]. 상언자 수선무징(上焉者 雖善無徵)은 말이 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아주 옛날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다시 말해 요ㆍ순 이야기를 할 때, 대개 그 사람들은 정치를 잘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과연 그들이 실제 그랬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한마디로 무징(無徵), 즉 증거가 없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단군 할아버지가 훌륭한 홍익인간 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아주 오랫동안 잘 다스렸느니 어쩌고 하면서 나쁜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다시 말해 그런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왕의 행적들은 혹시 그것이 좋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확인할 수 있거나 지금 여기에 다시 쓸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무슨 말이 연결되고 있습니까? ‘무징불신 불신민부종(無徵不信 不信民弗從)’는 말이 연결되고 있죠? 그런데 여기 불신(不信)에서의 ()’의 해석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을 단순한 의미의 믿는다’, 즉 기독교적 의미의 신앙에 해당하는 빌리브(believe)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요. 대개 고대에서 말하는 ()’이라는 것은 신험이 있다라는 말로서 영어로 한다면 구체적인 프로프(Proof)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풀이한다면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서 신험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으므로 백성들, 즉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94. 주희의 하언자(下焉者)에 이의제기

 

 

그 다음 하언자(下焉者)’는 하면서 계속되는데 앞에서 여기에 대한 주자(朱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상(()를 댓구를 이루는 것으로, 다시 말해 상()을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해석해서 상언자(上焉者)를 옛날의 왕으로 해석했다면, ()는 거꾸로 시대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따라서 하언자(下焉者)는 우리에게서 가까이 있는 왕들, 즉 현세에 있는 왕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주자(朱子)는 뭐라고 했다고 말했습니까? ‘하언자 성인재하(下焉者 聖人在下)’하면서, ()를 시대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즉 위()가 없다는 어떤 계층적 의미로 풀었죠? 주자(朱子)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수선부존(雖善不尊)’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수선(雖善)’이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존()을 구체적인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부존(不尊)을 위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언자(下焉者)를 공자(孔子)와 같이 성인(聖人)의 성품은 가지고 있으되[雖善] 득위(得位)를 하지 못하고 아래 있는[不尊] 사람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말도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댓구가 잘되지 않습니다. ()을 시대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댓구를 생각해볼 때 하()는 시대적으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신분상 아래에 있다라는 말로 본다면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과 댓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선(雖善)이라는 말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이 부존(不尊)’이라는 말을 주자(朱子)와 같이 구체적인 위()가 없다는 의미로 보지 않고 존엄성이 없다는 뜻으로 본다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에서 이 문장을 본다면 시대적으로 밑으로 내려오는 왕들은 좋기는 하지만 뭔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존엄성이 떨어진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단군 할아버지는 정치를 잘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그런데 후대의(고종? 김영삼?) 같은 사람도 혹시 정치를 잘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의 것이니까 뭔가 레벨이 떨어지고 존경심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용혹문(中庸或問)에 보면 당시의 주자(朱子)에게도 이미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주자(朱子)의 제자 중 누군가가 이 구절이 삼황오제(三皇五帝) 삼왕(三王) 오패(五覇)의 순으로 역사가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전제하면서, ‘여기의 하언(下焉)이라는 것은 후대의 패자(覇者)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주자(朱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자(朱子), “이 구절에서 상언자(上焉者)에게서나 하언자(下焉者)에게서나 수선(雖善)이 공유되고 있는데 어찌 패자(覇者)에게 수선(雖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곤란하다.”고 답하면서 그 설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자(朱子)의 설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나는 상하(上下)의 대칭을 주자(朱子)와 같이 바꾸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상()은 위, 즉 역사적으로 상대(上代), ()는 아래, 즉 역사적으로 하대(下代)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면, ‘꼭 왕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상고시대의 것은 좋기는 하지만, 즉 옛 것은 좋기는 하지만 증험이 없어서 신험이 없고 신험하지 않음으로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언(下焉)이라는 것은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현대의)를 말하는 것으로서, 요새 말로 하면, 우리 시대의 것이라든가, 최근의 것이라든가 하는 이러한 것은 좋기는 하지만 존엄성을 결여하고 있다. 존엄성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신빙성이 없어서 의지할 만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물론 주자(朱子)의 생각이 옳으냐, 나 김용옥의 생각이 옳으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나름이지만, 이런 아규먼트(Argument, 논쟁) 상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논의는 이러한 관점으로 진행시키겠습니다.

 

아무튼 이 중용(中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또 하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곧 오늘날 우리를 이끌어가는 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여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교(儒敎)의 철저한 현실주의가 있는 것인데 앞 장(28)에 나왔던 생호금지세 반고지도(生乎今之世 反古之道)’ 이 말과 끊임없이 대칭을 이루면서 문장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깁니까?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하언자(下焉者)
주희 도올
공자와 같이 덕성은 갖췄지만 지위가 없는 이 현 시대의 최고 권력자

 

 

 

 

 

 

 

 

295. 내 몸이 진리의 출발점

 

 

故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도(), ()에 근본을 두고, 서민(庶民)에게 증험하며, 삼왕(三王)에게 고험해보고, 천지(天地)에 세워보고, 귀신(鬼神)에게 질정해본다. 그러면 백세 이후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다.
 
此君子, 指王天下者而言. 其道, 卽議禮制度考文之事也. 本諸身, 有其德也. 徵諸庶民, 驗其所信從也. , 立也. 立於此而參於彼也. 天地者, 道也. 鬼神者, 造化之迹也. 百世以俟聖人而不惑, 所謂聖人復起, 不易吾言者也.
여기서의 군자는 천하에 왕노릇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였다. ()란 의례(議禮)와 제도(制度)와 고문(考文)의 일이다. 본저신(本諸身)은 덕이 있는 것이다. 징저서민(徵諸庶民)은 믿고 따르는 것을 증험하는 것이다. ()은 세운다는 것이니 여기에 세워 저기에서 참고하는 것이다. 천지(天地)라는 것은 도(). 귀신이란 조화의 자취다.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등문공9성인이 다시 나오신다 해도, (지금 했던) 나의 말을 바꾸지 않으시리라.’고 한 것이다.

 

 

고군자지도 본저신(故君子之道, 本諸身)’

상대(上代)의 것에 의존할 것도 아니요 하대(下代)의 것에 의존할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군자의 도는 어디부터 출발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본저신(本諸身) 몸에 그 근본을 두어라!, 즉 내 몸에서부터 출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내 기철학의 제일 명제를 상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진리는 내 몸에 구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몸철학이요 중용(中庸)의 출발인 것입니다. 대학(大學)수신위본(修身爲本)’도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죠. 평천하(平天下)를 비롯해 모든 것이 이 수신(修身)을 가지고 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본저신(本諸身)! 즉 먼저 내 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바로 이 말입니다.

 

모든 군자의 도()의 출발은 내 몸이다! 상대(上代)의 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증험이 없으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니 다 필요없다! 바로 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자(孔子)에게서 볼 수 있는 굉장히 철저한 경험주의(empirical, 경험에 의한)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서양의 오관주의로는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공자(孔子)는 굉장히 엠피리컬(empirical)하고 리얼리스틱(realistic)한 인물입니다. 즉 근본은 나의 몸에서부터 이루어 나간다! 여러분은 내가 하는 이 중용(中庸) 강의를 들으면서, 김용옥의 기철학을 왜 몸철학이라고 하는가의 의미를 새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내 몸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모든 사이언스는 결국 의학(medicine)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천체 물리학이고 뭐고 결국 의학에 다 귀속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흔히들 철학을 만학의 제왕이라고 하지만 나는 의학이야말로 만학의 제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학이라고 하는 영역 속에 철학은 물론 들어갑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의 생명의 신비 속에 모든 사이언스가 통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몸철학의 문제요, 격물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회 철학도 결국 나라는 존재, 중용지도(中庸之道)이자 천지지도(天地之道)인 이 몸, 바로 여기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세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자아 즉 에고(ego)라는 개념,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코기탄스(생각하는 주체인 나)는 아주 잘못된 개념입니다. 그것은 매우 막연한 것입니다. 모든 자아, 즉 셀프(Self)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실재성이 애매한 그 무엇이 아니라 매우 심플한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셀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메디컬 셀프(Medical self), 즉 구체적인 해부(anatomy)의 대상이 되는 셀프인 것이죠. 그 셀프야말로 천지(天地)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셀프는 바로 우리말의 인데 천지(天地)의 모든 법칙은 바로 이 몸에서 가장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몸(medical self)을 연구하는 의학이 만학의 제왕이 된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과학은 다 내 몸에 들어 있다! 내가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이 중용(中庸)에서는 모든 군자지도(君子之道)본저신(本諸身)’ 바로 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96. 몸의 진리를 세계로 확장하라

 

 

징저서민(徵諸庶民)’

문장의 의미를 계속 파악해 봅시다. 몸에 그 근본을 두고[本諸身] 이제 그것을 즉 뭇사람[庶民]에게서 징험한다[徵諸庶民]’ 왜 그래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메디컬 셀프, 즉 몸이라는 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러 사람의 몸에서,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도와 같은 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어떤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뭇사람들과 같이 느끼고 공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저들의 몸에서도 같게 느껴지는가를 증험해보라는 것이죠. 이렇게 증험을 했으면 다음에는 이제 어떻게 하나?

 

 

고제삼왕이불류(考諸三王而不謬)’

중용(中庸)은 계속 말합니다. 그렇게 했으면 이제 그것을 삼왕(三王)에게 상고해 보라![考諸三王].” 여기서 삼왕(三王)이라는 것은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으로 보통 번역하는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므로 일단 그런 식으로 해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ㆍ은()ㆍ주() 삼대의 성현에게 그것을 상고해 보아도 틀림이 없는가[考諸三王而不謬]?” 이 말은 앞의 말과 계속 연결 지어 해석한다면, 내가 내 몸에서 깨달은 진리를 먼저 주변의 동포들에게 확인을 하고, 그러고 나서 다음에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끌고 올라가서 역사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문명의 작자(ideal cultural hero), 예악(禮樂)을 제작한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제작한 예악(禮樂)에 증험해 보아도 문제가 없는가를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진리를 역사적으로, 통시적으로 증험해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문제가 없다[而不謬]! 그러면 다음엔 어디까지 가느냐?

 

 

건저천지이불패(建諸天地而不悖)’

이젠 역사를 넘어가서 천지(天地)의 세계, 즉 자연의 세계로 가라! 내 몸에서 깨달은 진리를 이제는 하늘과 땅에 세워보아라! 그래도 틀림이 없는 가를 확인해라[建諸天地而不悖]! 참 대단한 말입니다. ‘라는 존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깨달은 진리를 이젠 천지(天地)에 증험해보고 그래도 틀림이 없는가를 확인해라!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면서 풀 한포기를 쳐다 볼 적에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나는 내 몸의 피가 굳어서 딱딱해지는 것을 보면서 녹슨 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있는 피가 굳은 것이나, 저기 있는 쇠가 녹이 슬어 붉게 산화된 거나 결국은 같은 철 때문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가능성은, 내 몸에 있는,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무기물. 유기물은 천지(天地)에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의 법칙과 천지(天地)의 법칙이 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 중에서 천지(天地)에서 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내 몸을 구성하는 영양분(nutriment)들은 전부 다 천지(天地)를 구성하는 영양분들입니다. 따라서 천지(天地)를 살리는 법칙과 내 몸을 살리는 법칙들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질저귀신이무의(質諸鬼神而無疑)’

이제 이 대자연의 세계에도 징험을 해보았다. 이젠 뭐가 남았는가. 다 끝난 것이 아닌가? 이 정도했으면 군자지도(君子之道)로서 충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중용(中庸)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것을 다시 귀신(鬼神)에게까지 가져가서 물어봐라! 그래도 의심이 없는가를 확인해라[質諸鬼神而無疑]! 그런데 귀신(鬼神)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귀신장(鬼神章)을 강의할 때도 설명했지만, 주자 주()를 보면 주자(朱子)는 이 귀신(鬼神)이라는 것이 천지가 조화를 부리고 난 그 흔적[天地造化之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귀신(鬼神)이라는 것은 천지의 현실태가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invisible) 천지의 조화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귀신(鬼神)이 이러한 것이라면 중용(中庸)의 이 말은 이제는 보이는 생명의 법칙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귀신(鬼神)의 세계에까지 그것을 질문해보라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도 의심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면, 백세 이후에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는 것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 이것은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한 세대를 30년 잡는다면 백세(百世)3천년이 되는데, 이 말은 ‘3천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흐른 후 그때 성인(聖人)이 다시 나와서 이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들이 다시 비판하고 그들이 다시 써보려고 해도 의혹되는 바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생각해 본다면,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 때(작예악作禮樂), 최소한 3천년을 유지할 수 있는 불변성을 가지는 그러한 진리가 아니면, 그리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함부로 제작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유교(儒敎)에서는, 경망스럽게 이런 제도 만들고 저런 제도 만들고 함부로 역사에다가 까불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여기서 다시 유명한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의 말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聖人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이 내말은 변화시킬 수 없다[聖人復起 不易吾言矣]!” 중용(中庸)에서는 맹자(孟子)가 항상 하는 성인(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이 내 말은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서려 있는 것 같은 이런 깡다구가 없으면 진리라고 까불지 말라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儒敎)의 경전이 말하는 진리는, 백세로서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의혹되는 것이 없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참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악(禮樂)을 작()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문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 왕천하(王天下)한다는 것, 천하를 다스린다 하는 문제는 이러한 군자지도(君子之道)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28에서 말했던 여러 가지 것들의 의미가 명료해졌을 것입니다. 역시 이러한 군자지도(君子之道)는 단순히 상()에서 얻는 것도 아니요 하()에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요새 최근에 무슨 누가 이상한 학설을 만들었다, ~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의 이론이 좋다, 3의 물결을 주장한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의 학설이 좋다~ 그런데 중용(中庸)에서는 그런 하언(下焉) 가지고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순 가지고 되냐? 그런 상언(上焉)도 무증(無證)이어서 안 된다는 거예요.

 

 

 

 

 

297.미국의 타락한 리더십

 

 

요즘 미 하원의장인 킹그리친가 하는 자가 무슨 토플러를 현실적으로 실현한다어쩐다 하는데 토플러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런 미국의 얄팍한 이론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죠.

 

좀 빗나가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도대체가 미국이 아무리 타락을 했기로서니, 클린턴 같은 애새끼가 대통령을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습니다. 미국의 타락은 카터 땅콩장수로부터 시작해서, 레이건 영화배우 새끼를 거쳐, 부시 같은 그 깡패 새끼로 해서 지금 클린턴 같은 애새끼까지 온 것입니다.

 

이 무슨~ 정말 전 세계 리더쉽의 역사적 타락이라는 것, 이건 정말 너무 끔찍한 수준이 아닙니까? 클린턴 얼굴 한번 보세요, 그게 대체 대통령 얼굴로 보입니까? 얼굴이라는 게 딱 보면 폼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동네 맥도널드에서나 보는 녀석이지, 정말 아무리 대통령으로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화이트하우스에 걸려 있는 초상들이라는 것이 그런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어떠한 모랄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젠 뭔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요. 과거의 정치행태에서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와야 해결될 그러한 시대가 다시 온 것입니다. 뭔가 과거 식의 어떤 것 가지고는 안 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지금 미국에 인물이 없느냐? 미국 사회가 현실적으로 그렇게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뭔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거예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한 말을 전체적으로 다시 요약해 봅시다. 상언자(上焉者)ㆍ하언자(下焉者) 이거 가지고도 안 된다. 그런 것에 백성이 따를 리가 없다[民不從]. 징험이 없고 도저히 존엄성도 없고 해서 신험이 없으므로 백성이 따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백성이 따를 수 있는가? 그것은 내 몸에서부터 진리를 발견해서, 그 몸에서 깨달은 진리를 타인과 공유해 보고 그것을 다시 역사적으로 삼왕(三王)에게 물어가며 의심해보고, 이제는 그것을 다시 천지(天地)에 세워보고, 그 다음엔 귀신(鬼神)에게까지 물어봐라! 그래도 틀림이 없으면 백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내 이 말은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깡다구를 가져라! 이 정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명이 패러다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깡다구 없는 새끼는 함부로 제작한다고 덤비지 말라! 바로 이런 말이죠.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것을 예악(禮樂)의 제작이라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백성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아예 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작() 안 하고 내 이상을 쓰겠다 이 말입니다. 이제 다음 문장을 봅시다.

 

 

 

 

 

298. 역사의 지속성이 긴 것으로 역사를 개변하라

 

 

質諸鬼神而無疑, 知天也; 百世以俟聖而而不惑, 知人也.
귀신(鬼神)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면 천을 아는 것이요, 백세의 성인(聖人)을 기다려서 의혹되는 바가 없으면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知天知人, 知其理也.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다.

 

 

귀신(鬼神)에게 물어보아서 의심이 없으면 그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 것이요, 백세(百世)로써 성인(聖人)을 기다려서 불혹하면 그것은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지천(知天지인(知人)이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지천(知天)이라는 것은, 요새말로 억지로 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지인(知人)이라는 것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법칙으로서도 불변의 진리임을 과시해야 하고, 인간세의 법칙으로서도 불변의 진리임을 과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천(知天지인(知人)입니다.

 

여기서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을 한번 살펴봅시다. 거기에는 선성과 후성이 그 규()가 하나다[先聖後聖其揆一也]”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주자(朱子) 주를 보면 이 규()는 탁()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규()라는 것은 절도나 법도인데, 먼저 존재했던 성인(聖人)에게나 나중에 나타나는 성인(聖人)에게나 그 법도가 하나라는 것이죠. ‘3천년 이후에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혹됨이 없다.’라는 말과 관련지어 볼 때, 이 말은 역사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사실 중용(中庸)이나 몇몇 고전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하는 그런 수준으로 갔습니다. 나나 여러분도 그런 수준을 만들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수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군자의 도()는 백세(百世) 이후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심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를 과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여러분은 동시적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항상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은 공유하는 것입니다. 한 면만 생각하면 진리가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변의 진리를 생각한다 하면서 백세(百世)를 기다린다고 하거나, 선성(先聖)과 후성(後聖)이 그 규()가 하나라고 하는 말들을 사용하곤 하는데, 여기서 이 말들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불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맥락을 잘 살펴보면 이 구절들은 역사적 지속성(historical duration)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내가 말하는 진리도 이런 지속성이 긴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을 매우 착각해서 수학적 진리 같은 것만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1+1=2’, 이런 것을 만고불변이니까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판단은 옳았다이런 것은 상대적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를 나눠서 과학적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진리는 내 몸에서 나온 것인데[本諸身]인데, 내 몸 자체가 시공의 제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인들의 생각으로는 수학적 법칙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시공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동양인의 생각처럼 모든 진리에 시공이 있다고 할 때, 결국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duration) 긴 것이고, 상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이 짧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6)의 듀레이션(duration) 개념 같은 것이 이와 비슷한데 상당히 정확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것을 볼 적에 이런 기나긴 지속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지속성이 길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인간은 밥 먹고 똥을 눈다는 것, 이런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지속입니다. 공자(孔子)나 이 김용옥이나 역사적으로 3천년의 시차를 둔 시대의 인물들이지만, 즉 백세(百世)를 기다려서 본다고 해도, 세끼 먹고 똥 눈다는 면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진리는 지속성이 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사는 이렇게 해라는 등의 식사 작법에 대한 예의를 작()한다면 그것은 지속성이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의상에 대한 것은 기호에 따라 자주 변하기 때문에 지속성이 짧을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을 보든지 다른 진리를 보든지 이 지속성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짧게 가는 변화와 길게 가는 변화, 이것을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 중에서 가장 지속적인 것이 뭔 줄 아세요? () 중에 왕중왕(王中王)이 뭔 줄 아세요? 그것은 바로 감기입니다. 감기. 이 세상에서 만고불변의 무서운 질병이 바로 감기인 것이죠. 상한(傷寒)이고 뭐고 다 감기인 거예요. 현대인이나 고대인이나 다 이 감기에는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암(cancer)같은 것은 또 다릅니다. 이 암은 화학물질이 많이 나면서 생겨난 20세기의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도 지속성이 긴 놈이 있고 짧은 놈이 있는 것입니다. 세균이고 바이러스고 의상처럼 전부 패션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호열자(虎列刺, 콜레라)가 확 쓸었다가 없어지고 또 어떤 때는 소아마비가 유행했다가 지금은 드물어지는 등 질병도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다’ ‘절대적이다하는 이런 말을 혼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용(中庸)적 진리관은 바로 시중(時中)입니다. 모든 것이 반드시 시간 속에, 다시 말해 역사 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중용(中庸)적 진리관에서는 시중(時中)을 떠난 진리는 없어요. 무슨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해선 안 된다는 이야깁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Absolute Geist), 이런 것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헤겔이 아주 잘못 본 거예요. 서양인들의 논리적 허구(logical fiction)를 가지고 이야기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어떤 기독교 신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릅니다. (God)은 불변이 아닌가? 나 김용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도 매번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림을 보면 짜식이 자꾸 옷을 바꿔 입지 않는가? 패션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인데 무슨 놈의 하나님이 불변인가?

 

그러면 그 논리적으로 치밀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절대적인 것 같았지만 또 변합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이야기는 이상적 평면을 전제로 한 특수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고 공간의 모양이 달라지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렇듯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결국 동양인들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절대적(絶對的) 진리(眞理)에 대한 추구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국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이 긴 진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중용(中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역사의 지속성이 긴 것을 가지고 역사를 개변하라, 바로 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지속성이 짧은 어떤 단편적인 진리 가지고 일어나서 야 내가 왕천하(王天下) 하겠다한다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고, 해봤자 왕천하(王天下)가 될 리가 없습니다.

 

 

 

 

299. 형편없는 기자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우리 누나(김숙희 교육부 장관)에게, 진정한 교육개혁을 하려고 한다면 지속성이 짧은 그깟 놈의 현세적인 것에만 자꾸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교육 개혁한다면서 뭐 해놓고는 며칠 만에 또 변하곤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입시제도만 바꿔가지고는 교육개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단언하지만 백날 바꿔봐야 그런 식으론 절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앞으로 교육론을 쓰겠지만, 결국 근본이 변해야 되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김숙희 장관만 해도 어떻게 됐든 내 생각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고 근본을 바꿀 생각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슨 기자새끼 하나가 밉게 봤다 해서 계속 긁어대고 있으니~ 그래도 기자면, 기자답게 뭔가 비젼을 가지고 좀 진지하게 서로 토론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 그런 성실한 자세가 없습니다. 자기 기분 나쁘다고 그냥 신문에 긁어대는 거예요. 여러분 중에 앞으로 기자를 할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기자새끼들은 그 수준이라는 게 정말 형편없어요. 지금 우리 학계의 상식으로만 이야기해도,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됐든지 간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글을 쓸려면 대학을 졸업하고 최소한 20년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대학 갓 나온 애들이, 갑자기 어저께까지 대학 다녔던 새끼가 오늘 기자 되서 천하가 획가닥 변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언어의 순환에 있어서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구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런 모순 속에서 기자놈들은 자기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얄팍한 기자들은 자기들은 위대하다는 착각 속에서 문장을 절대 곱게 쓰지 않고 꼭 뒤에 가서 한번 씩 갈코리를 휘두릅니다. 나는 오늘날의 한국 기자 놈들 전부가 뭔가 착각에 빠진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자들 월급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일류기자가 아니라도 웬만한 신문 기자치고 300만원 이하로 수입 잡는 애들은 없습니다. 지금 기자 수입이 교수보다도 판사보다도 훨씬 높습니다. 대학교 갓 나온 새끼들이 바로 300만원 받는 월급쟁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걔들이 쓴 그 유치한 글로 지금 세상이 획가닥 획가닥하는 실정입니다. 이거 정말 미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 적어도 그만한 인간을 기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공력이 들어가야 하는 일인데, 그럴려면 기자라는 것을 전부 박사로 만들든지, 뭔가 공부를 시켜 가지고 뽑아서 그 레벨을 높여야 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얄팍한 밑천밖에는 없는 애들을 데려다가 하루아침에 그런 막중한 일을 시키는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기자세계라는 것은 대학보다 더 타락했어요. 우리나라 지성계에서, 교수가 제일 타락한 건데 교수보다 더 타락한 게 바로 이 기자입니다. 그래도 교수는 기자보다는 좀 나아요. 그러니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사회가 도대체 어떻게 될런지~ 물론 앞으로 시대가 달라지겠지만 여러분은 절대 매스콤은 상대하지 말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매스콤이나 기자놈들은 항상 자기들이 이 역사를 리드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매스콤의 파워가 제일 센 것 또한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권력의 중추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조선일보 하나입니다. 안기부가 지금 맥씁니까? 검찰이 힘써요? 판사가 권력입니까? 김영삼 청와대?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조선일보 하나예요. 언론이 우리나라 최강자요, 권력의 최고 심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있는 놈들은 역사를 자기들이 움직인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칸트 시대에 역사를 움직인 힘으로서, 칸트 시대의 신문이 남았습니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남았습니까? 언론이란 것은 역사 뒤에 따라 가면서 쬐끔쬐끔 기술하는데, 그 지속성이라는 게 겨우 하루 이틀입니다. 하루 이틀~. 신문 기자가 까작까작해서 하루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이 착각할런지는 모르지만 이 듀레이션 가지고 역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허물이 없는 그 지속성이 아니면 역사는 움직이지 않아요. 지금 중용(中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자애들은 까작까작 하는 것, 그거 가지고 되는 줄로 착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기자새끼 천만 명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이 김용옥 혼자로 그 새끼들 다 상대할 수 있어요.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억만이다! 이 기자새끼들! 나는 이러한 깡을 이 중용(中庸)으로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지식인들의, 왕천하(王天下)하는 자들의 사명이요, 스케일이요, 진리를 바라보는 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군자는 까작까작 하는 신문기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군자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중용(中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910. 문명창시자가 움직이면

 

 

是故君子動而世爲天下道, 行而世爲天下法, 言而世爲天下則. 遠之則有望, 近之則不厭.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면 세세로 천하의 도가 되고, ()하면 세세로 천하의 법이 되며, 말하면 세세로 천하의 칙()이 된다.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이고, 가까이 있어도 싫지가 않다.
 
, 兼言行而言; , 兼法則而言. , 法度也. , 準則也.
()은 언()과 행()을 겸하여 말한 것이고, ()는 법()과 칙()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은 법도다. ()은 법칙이다.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군자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군자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아시겠습니까? 군자는 움직였다하면 세상 사람들 삶의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엄청난 탐구의 과정을 거쳐서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자기가 제작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최소한 3천년은 지속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지천(知天)ㆍ지인(知人)하게 되는 군자들은, 따라서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이게 되고, 가까이 있어도 싫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실 아주 친한 친구라도 멀리 있을 땐 우러러 보여서, 좋아라고 같이 하숙을 하기도 하지만, 같이 살다 보면 틀어져서 서로 쌈박질이 나지 않습니까? 서로 싸우다가 한 놈이, “야 이 새끼야~ 나가 이새끼야~ 너 같은 새끼랑 속 뒤틀어져서 도저히 못 살겠어 나가!”하면서 깨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이게 제일 어렵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 그냥 냄새도 맡기 싫다! 그러면 부부생활이 안 되는 것이죠.

 

참고로 이 구절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를 읽어보도록 합시다. 주자는 ()이란 것은 행()과 언()을 겸해서 말한 것이요, ()라는 것은 법()과 칙()을 겸해서 말한 것이다[動兼言行而言道兼法則].”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보고 있는 이 문장의 구조는 앞의 하나[動而世爲天下道)는 뒤의 두 개(行而世爲天下法 言而世爲天下則)를 함축한 것이고, 뒤의 두개는 앞의 하나를 풀어 말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원지(遠之)와 근지(近之)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앞의 26 끝에 나오는 오목불이~ 순역불이(於穆不已~ 純亦不已)도 이 근지(近之)ㆍ원지(遠之)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될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이제 시경(詩經)의 구절로 이 29장을 기막히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2911. 자연과 조화된 잠

 

 

詩曰: “在彼無惡, 在此無射. 庶幾夙夜, 以永終譽!”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저기 있어도 싫지가 않고, 여기 있어도 밉지가 않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그 영예로움을 영원하게 끝낸다.
 
, 周頌振鷺之篇. , 厭也. 所謂此者, 指本諸身以下六事而言.
시는 주송 진로의 편이다. ()은 싫어한다는 것이다. ‘불여차(不如此)’의 차()본저신(本諸身)’ 이하의 여섯 가지 일(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右第二十九章. 承上章居上不驕而言, 亦人道也.
여기까지는 29장이다. 윗 장의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를 이어 말하였다. 또한 인도(人道).

 

그 인용하는 방법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모르시겠다구요?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재피(在彼)가 바로 원지(遠之)를 가리키는 것이고, 재차(在此)가 바로 근지(近之)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으로 읽어야 하며,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숙()이라는 것은 이른 아침을 말하는 것이고, ()라는 것은 단순히 저녁이 아니라 아주 늦은 밤을 말하는 거예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저녁이라는 것은 모()라는 글자를 사용합니다.

 

앞에서 그 인용이 절묘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맥락을 잘 알지 않으면, 왜 절묘한지를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이제 중용(中庸)에서 이 시를 인용한 맥락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편을 보면 양생의 비결은 결국 해가 뜰 때 일어나고 해질 때 자는 데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는 것이죠. 정말 이렇게만 살면 인간의 건강은 완벽할 것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밤이 긴 겨울에는 자는 시간이 좀 길어지고 밤이 짧은 여름에는 자는 시간이 좀 짧아지고 하면서, 계절별로 잠시간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옛날 농부들이 사는 패턴을 보면, 겨울에는 잠시간이 길고 여름에는 잠시간이 짧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최교수와 내가 북한산에 올라갔다 오다가 우연히 스칸디나비아 대사관 사람들을 만났는데 참 신기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에서는 여름에는 해가 밤 11시에 져서 새벽 2시에 뜨고, 겨울이 되면 해가 낮 11시쯤에 떴다가 오후 3시면 진다는 것입니다. 놀라워서 그런 데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니까, 겨울에는 그냥 내내 자고, 여름에는 내내 활동한대요. 환경이 그렇다면 그런 데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결국 인간의 모든 질병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연적인 생체리듬을 거역하는 데서 오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문명이라는 것은 이 리듬을 거역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문명은 해가 졌는데도 늦게까지 불을 키고 살면서 생겨난 것이요, 또 이러한 것이 문명에 대한 추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명의 추구에 있어서도 인간은 자연적인 생리를 어느 한계 이상 벗어나면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러한 자연적 생리를 거역하는 흐름이 매우 강화되었습니다. 그것에 최대로 공헌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전구를 만든 에디슨 형님입니다. 천지(天地)의 기는 낮에는 양기(陽氣)로 됐다가 저녁에는 음기(陰氣)로 화()합니다. 음기(陰氣)가 될 때에는 축축해지고, 입자가 굵어지고, ()가 거칠거칠해지고 해서 모두 가라앉게 됩니다. ()가 이렇게 무거워지고 가라앉기 때문에 사람도 졸리게 되고, 그러면 인간은 자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에디슨 형님이 그 음기(陰氣)에다가 전기불을 집어넣어서 양화(陽化)시켜 버린 것입니다. 전기불 속에서는 졸리지 않고 인간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남게 된 부분을 인간은 문명의 시간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생체 리듬을 매우 거역하는, 굉장히 불건강한 행위들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나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하는데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그야말로 몸이 그렇게 깨끗해질 수가 없어요. 8시 쯤 자고 4시쯤 일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이 안 된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하면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한 두달은 계속해야 4시쯤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지죠. 새벽에 일어났을 때 그 말할 수 없는 기쁨, 그 청명한 새벽의 기운과 내가 깨어나는, 나의 몸의 기가 새벽의 그 맑은 태양이 밝아오는 것같이 싸악 개벽이 되는 그 느낌이라는 것은 정말 기맥힌 희열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걸 전부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7시나 8시쯤 해가 완전히 떠오른 후에야, 탁 일어나기 때문에 천지(天地)와 더불어 생활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몸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밝지를 못합니다. 요즈음은 그냥 탁 눕자마자 의식을 잃어버리는 잠이 대부분이니, 이건 잠이 아니라 완전히 문명에 시달린 신경 세포가 잠깐 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냥 밤늦게 곤드라 떨어졌다가 아침에 팍 깨가지고 또 마악~ 활동하다가 또 팩 쓰러지고 하는 그런 것은 자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잘 때도 해가 지듯이 싸아악~ 자다가, 일어날 때도 해다 뜨듯이 싸아악~ 일어나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잠이요, 이런 잠을 자고 일어날 때만 앞에서 내가 말한 자연적인 삶에서의 고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체험은 중들 아니면 도 닦으시는 분들이나 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체험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시겠지만, 자연적인 삶 속에서 느껴지는 그 느낌은 정말 고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연과 조화된 잠을 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동물적인 것이지만, 인간도 역시 그러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자연적이고 건강한 삶입니다.

 

 

 

 

2912. 천하의 명예는 어려운 과정 끝에 이른다

 

 

앞에서 문명이라는 것은 이런 자연적인 흐름을 어느 정도 거역하는 데서 나왔다고 이야기했지만, 여기 중용(中庸)에서도 역시 문명을 만들어내는 성인(聖人)들은 그런 자연적 삶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과거 중용(中庸)의 시대에서 보기에도 인간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워낙~ 할 일이 많은 성인(聖人)들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예를 들어 웃님금()은 어떠했던가 생각해 보세요. 웃님금은 홍수치수를 하려고 맨날 물속을 걸어다니다 보니까 마찰이 심해 털이 다 닳아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 성인(聖人)들이 함부로 성인(聖人)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런 막노동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정갱이에 털이 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쏴댕기는 놈들이었던 것이죠. 여기 이 중용(中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옛날 성인(聖人)들은, 또 이 성인(聖人)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때, 또 그런 자연적인 삶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유독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그만큼 잠시간까지도 아껴서 문명을 창조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 나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성인(聖人)과 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 ”하고 기뻐하실지 모르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성인(聖人)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인(聖人)이 아니므로 맨날 밤늦게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그러한 것보다는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발 그렇게 자기 몸에 그런 나쁜 짓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굉장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즉 성인(聖人)은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지만, 반어적으로 살펴본다면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는 것까지 중용(中庸)은 아울러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전을 읽을 때 이런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그 영예로움을 영원하게 끝낸다[庶幾夙夜 以永終譽].’ 이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앞 구절들에서, 제작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성인(聖人)은 몸에서 출발해서, 삼왕(三王)에게도 고험해 보고, 천지(天地)에도 세워보고, 귀신(鬼神)에게까지 물어야 하고, 삼천년 이후에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혹할 바가 없는 그런 어마어마한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디 편히 잘 시간이 있겠습니까? 자는 시간까지도 줄여야겠죠?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잠시간마저 줄여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데, 그 노력을 하기 때문에, 3천년 후에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혹됨이 없는 그 영예로움을 누린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왜 시의 인용이 절묘한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있어도 싫지가 않고, 저기 있어도 밉지가 않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니 그 영예로움을 영원하게 끝낸다앞의 말들을 다 함축하고 있죠?

 

그래서 주자(朱子)도 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는 주송 진로편이고 역()는 싫어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본저신이하 육사를 가리키는 것이다[詩周頌 振鷺之篇.射厭 所謂此者指本諸身以下六事而言也].”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사(六事)본저신(本諸身)’, ‘징저서민(徵諸庶民)’, ‘건천지이불패(建天地而不悖)’, ‘질저귀신이무의(質諸鬼神而無疑)’,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여섯 가지를 말한 것이죠. 이 시()가 육사(六事)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이제 이 29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君子未有不如此而, 蚤有譽於天下者也.

군자가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서 일찍이 천하에 명예를 얻은 자는 없다

 

 

29장은 이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말은 천하의 명예는 이렇게 어려운 삶의 과정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간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하느라고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 천하를 염려하면서 살지 아니한 사람 치고 이 천하에 명예를 얻는 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21
핵심
내용
천도
(天道)
22 24 26     30 31 32 33
전편
요약
인도
(人道)
23 25 27 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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