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좋은 글의 조건
연암이 살던 당시에는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미 청이 중원의 주인공이 된 상황임에도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정통으로 여겼으며, 명이 무너짐으로 중화의식이 우리나라로 옮겨 왔다는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논리 때문에 오랑캐인 청을 쳐야 한다는 논리를 세웠던 것이다.

▲ 말뿐인 북벌론이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정책이 되었다.
고정관념을 넘어설 때 다른 길이 보인다
하지만 그건 현실을 망각한 정치 논리일 뿐, 북벌을 위해 어떠한 대비도 하고 있진 않았다. 이러한 북벌의 허구성은 「허생전(許生傳)」에서 허생과 이완(李浣)의 문답으로 폭로된다. 그런 현실관을 가진 연암이었기에 ‘북학론(北學論)’을 떳떳하게 주장한다. 열하일기에선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수용하고 본받아야 한다[雖其法之或出於夷狄, 固將取而則之. 「馹迅隨筆」]”라는 과격한 말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고정관념에 휩싸여 현실을 망각하던 조정에 대해 연암은 이와 같은 말을 하며 비판을 한 것이다.
고정관념의 타파는 아래의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마을의 꼬맹이가 천자문을 배우는데, 그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기 죽일 만합니다.
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我聰明, 餒煞蒼頡. 「답창애지삼」
옛것을 본떠 글짓기를 마치 거울에 형상을 비추듯 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좌우가 서로 반대로 되니 어찌 비슷하겠는가. 그렇다면 물에 사물이 비추듯 한다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본말이 거꾸로 보이니 어찌 비슷하겠는가.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한낮에는 난장이 땅달보가 되고, 저물녘에는 꺽다리 거인이 되니 어찌 비슷하겠는가. 그림으로 형체를 묘사한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길 가는 자가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자는 소리가 없으니 어찌 비슷하겠는가.
倣古爲文, 如鏡之照形, 可謂似也歟? 曰: “左右相反, 惡得而似也?” 如水之寫形, 可謂似也歟? 曰: “本末倒見, 惡得而似也?” 如影之隨形, 可謂似也歟? 曰: “午陽則侏儒僬僥, 斜日則龍伯防風, 惡得而似也?” 如畵之描形, 可謂似也歟? 曰: “行者不動, 語者無聲, 惡得而似也?”
그렇다면 끝내 비슷함은 얻을 수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두고 반드시 ‘꼭 닮았다’고 하고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또한 ‘진짜 같다’고 말한다. 대저 ‘진짜 같다’고 말하고 ‘꼭 닮았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속에는 ‘가짜’라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 숨어 있다. 때문에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려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완전히 다른데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통역과 번역으로도 뜻을 통할 수가 있고, 전서와 주문, 예서와 해서로도 모두 문장을 이룰 수가 있다. 왜 그럴까? 다른 것은 겉모습이고, 같은 것은 마음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마음이 비슷한 것은 뜻이고, 겉모습이 비슷한 것은 피부와 털일 뿐이다. - 연암 박지원, 「녹천관집서」
曰: “然則終不可得而似歟?” 曰: “夫何求乎似也? 求似者非眞也. 天下之所謂相同者, 必稱‘酷肖’; 難辨者亦曰‘逼眞’. 夫語眞語肖之際, 假與異在其中矣. 故天下有難解而可學, 絶異而相似者. 鞮象寄譯, 可以通意; 篆籒隷楷, 皆能成文, 何則? 所異者形, 所同者心故耳. 繇是觀之, 心似者志意也, 形似者皮毛也.” 「綠天館集序」
「답창애지삼(答蒼厓之三)」에서는 천자문을 수학하던 어린아이의 발언을 통해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음이 표현되며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에서는 심사와 형사론을 통해 형태만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현실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실질이 사라진 고정관념은 개인에게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위험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당연시되던 논리마저도 뒤집어 제3의 길을 모색한 연암의 자취를 볼 수 있다.

▲ 북벌론이 허울 뿐임을 정면에서 드러내자 이완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과거의 연암을 통해 현재 우리의 길을 찾다
‘서양에는 세잌스피어가 있다면 동양에는 연암이 있다’(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엔 좀 오버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암의 글을 하나하나 읽으니 그 말에 동감하게 되었다.
그의 문학관은 탁월했으며, 그 문학관을 전개하기 위한 논리는 치밀했다. 이상에서 살펴봤던 것과 같이 그는 명실상부한 대문호였던 것이다. 과대망상에 빠져 있던 돈키호테와 같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돈키호테는 현실을 망각한 망상주의자라면 연암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연암 이후로 2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그의 글이 그가 살던 당시보다 지금 더 각광을 받고 있으며 유명해졌다. 그의 글이 250년을 뛰어 넘어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는 그 저력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지구촌’이란 미명 하에 국가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 연암 당시에도 서학(西學)이 전래되고 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등 국가정체성이 위협받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펼친 그의 논리였기에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유용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부턴 연암의 논리를 통해 현실을 재정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道不他求, 卽在其際. 「도강록渡江錄」]’라는 확고한 논리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연암의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 길에서 쓰여진 글이므로, 사이에서 쓰여진 글이므로 그의 글은 살아 숨쉰다.
인용
3. 사이에서 웃어재끼다
4. 좋은 글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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