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호의 시와 김영랑의 시에 담긴 상춘(傷春)
茶甌飮罷睡初驚 | 차 마시길 다하고 깜빡 졸다가 막 깨니, |
隔屋聞吹紫玉笙 | 집 너머에서 자주빛 옥피리소리 들려. |
燕子不來鶯又去 | 제비 오지 않고 꾀꼬리 가버린 채, |
滿庭紅雨落無聲 | 뜰 가득 붉은 비가 뚝뚝 떨어지네. |
『소화시평』 권상59번의 네 번째 인용된 신종호의 「상춘(傷春)」이라는 시도 재밌는 시였다. 우선 1구부터 문제가 됐다, 잠이 깼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차를 마셨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차 마시니, 잠이 깼다는 내용이 순차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달리 생각해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 사람이 잠을 깨게 된 이유는 차와는 상관없이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즉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생황소리에 잠이 깬 거라는 거다. 그렇다면 차를 마시는 건 잠이 깬 것과는 상관없는 그 전의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 마시길 다하고 깜빡 졸다가 깨보니’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피리소리에 잠이 깨어 피리소리를 듣는다. 그때 불현듯 제비도 오지 않고 꾀꼬리도 가버렸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리고 뜰 앞엔 붉은 낙엽이 소리 없이 지고 있다. 이 시의 미감은 성간의 「여옥당학사 유성남(與玉堂學士 遊城南)」이란 시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鉛槧年來病不堪, 春風引興到城南. 陽坡草軟細如織, 正是靑春三月三’의 1구와 2구에선 봄조차 즐기지 못하다가 3구와 4구에선 친구따라 성남에 가서 봄을 만끽하며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도 1, 2구에선 봄을 만끽했다는 말은 등장하지 않지만 졸기 전까지 무언가 하고 있었던 정황을 통해 봄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3, 4구에서 봄이 순식간에 저리로 사라진 모습이 보인다. 즉 이 말을 통해 ‘잠깐 졸았더니, 봄이 그새 가버렸네’라는 아쉬움의 정조가 짙게 배어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면 교수님은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를 소개해줬다. 두 작품의 정감이 같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찬란한 시를 신종호는 28자에 담아냈으니 대단하죠.”라고 마무리 지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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