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의 기상을 노래한 신숙주의 시
6월 27일에 마지막 소화시평 스터디를 했으니, 근 한 달 만에 다시 스터디를 하는 셈이다. 소화시평을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다가 막상 한다니까 부담이 되긴 한다. 특히 이번엔 한 달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던 터라 미리 내가 할 분량을 올려놓긴 했는데, 다른 것들은 전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서당에 들어간 아이도 있고 각자 방학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요일엔 갑자기 교수님에게 전화가 오기에 이르렀다. “잘 지내죠?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요.”라고 시작한 통화는, 하나 더 준비해달라는 거였다. 더군다나 하루 전날에 온 전화이기에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내 마인드는 ‘내가 해갈 수 있는 만큼만 해가고, 나머지는 충실히 배우자. 내가 해나가는 게 곧 지금의 내 실력이니 그대로 인정하자’는 주의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날은 다른 것은 하지 않은 채 『소화시평』 권상62번 꼭지만 잡고 밤새 고민하고 여러 자료도 찾아보고 했다. 하나의 자료에 푹 빠져볼 수 있던 뜻깊은 날이었다.
『소화시평』 권상59번은 매우 특이하다. 지금까지 본 예로는 한 사람의 시를 소개하거나, 정도전이나 이숭인과 같이 공통의 소재로 다룬 시를 소개하거나, 고려와 조선 시 중 어떤 게 좋냐는 물음에 고려시 두 편을 소개해주며 결론은 ‘조선시가 낫다’는 식으로 소개해주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특이하게도 한 가문의 문장을 나열하고 있다. 그건 그만큼 한 가문 전체가 쓴 시들이 다들 우뚝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테고, ‘이 가문 소개시켜줄 수밖에 없다’라거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라거나 할 터다. 홍만종 덕에 우린 한 가문의 시를 일별해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네 작품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각 작품들이 호기롭기도 하거니와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잘 나가는 가문임에도 도학자적인 거대담론에 빠져들지 않고 유미주의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남다르게 느껴진다.
豆滿春江繞塞山 | 두만강은 봄이 되어 변방의 산을 휘둘렀는데, |
客來歸夢五雲間 | 나그네의 돌아갈 꿈, 오색구름 사이라네. |
中書醉後應無事 | 중서랑 취한 후에 응당 일 없겠지, |
明月梨花不怕寒 | 달 밝은 날 배꽃 보느라 추위 마다 않고 있으리. |
「기중서제군(寄中書諸君)」이라는 신숙주의 시는 마치 정도전이 지은 「봉천문(奉天門)」와 같은 호기로움이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 자신의 길을 가고 호기롭게 취해 그리워하고 한껏 배꽃을 감상하는 정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시는 당연히 자신의 상황이 순탄하게 확 풀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다.
1구에선 봄이 되어 눈이 녹으며 불어난 두만강의 물에 산에 에워싸여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리고 2구에선 뜬금없이 꿈 이야기와 함께 오색구름이란 기이한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 나 또한 이 구절이 정말 와 닿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감히 질문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랬더니, 건희가 마치 내 마음을 꿰뚫었다는 듯이 “교수님 2구가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질문을 한다. 고녀석 참 고맙네. 여기에 대해 교수님은 지금 신숙주는 중서랑의 제군들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가 ‘그곳이 그립고, 자네들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해주신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있는 북방의 경치가 말로 할 수 없이 좋을지라도, 당신들이 있는 그곳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싶다는 느낌의 발산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 나 자신이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바로 오색구름과 같은 자네가 있는 곳이야’라는 말이 되는 거란다.
3구는 큰 문제없이 해석이 됐던 곳이고,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정도전의 시가 자연스레 생각난 것이다. ‘滿帽宮花霑錫宴 金吾不問醉歸人’라는 금오군도 잡지 않는 호기로움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곽예의 「제직려(題直廬)」라는 시의 ‘午漏正閒公事少 倚窓和睡聽鈞天’라는 정조는 3구와 4구에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4구에선 아무 일도 없는 중서문화성(中書文化省) 사람들이 약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달 밝은 밤에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꽃을 구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해석한 방식은 약간 달랐다. 나는 추위에 떨고 있지 않은 주체를 배꽃으로 봤으니 말이다.
원래 | 달 밝은 날 배꽃 추위 두려워하지 않겠지. | 배꽃의 강인한 생명력 예찬 |
보강 | 배꽃 보느라 추위도 마다않고 있으리. | 관리들의 유유자적한 흥취 예찬 |
그러니 당연히 이 시도 곽예의 시와 마찬가지로 태평의 기상을 노래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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