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나식(羅湜)은 시사(時事)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데 힘썼다. 그러나 정미년에 벽서(壁書)의 화가 일어나자 그의 형 나숙(羅淑)과 함께 화를 당했다. 일찍이 역귀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儺鼓鼕鼕動四閭 | 역귀 쫓는 북소리 온 마을에 울리니 |
東驅西逐勢紛如 | 이리저리 쫓는 소리 그 형세 어지럽다. |
年年聞汝徒添白 | 해마다 들었어도 흰 머리만 늘었구나 |
海內何曾一鬼除 | 나라 안의 한 귀신을 제거함 있었던가. |
구나(驅儺)의 의식을 묘사했는데, 해마다 그렇듯 열심히 역귀를 쫓았건만 정작 없애야 마땅할 나라 안의 한 귀신을 몰아내지 못해, 그 근심으로 흰 머리만 날로 늘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4구에서 말한 ‘나라 안의 한 귀신’은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었으므로 읽는 이들이 두려워하였다. 그 말뜻이 너무 드러나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인다.
박수량(朴守良)은 강릉사람이다.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있다가 고향에 물러나 은거하였다. 충암(沖菴) 김정(金淨)이 금강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들러 시 한 수와 함께 철쭉 지팡이를 주었다.
萬玉疊巖裏 九秋霜雪枝 | 옥 같은 일만 봉 쌓인 바위 속 가을의 눈서리 견딘 가지라. |
持來贈君子 歲晩是心知 | 가져와 그대에게 드리옵느니 저문 해에 이 마음 알아주소서. |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상설(霜雪)로 벗을 삼느라 외틀어지고 구부러진 가지로 만든 지팡이니,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는 뜻을 알겠는가? 박수량(朴守良)이 화답하였다.
似嫌直先伐 故爲曲其枝 | 곧아 먼저 베임을 싫어해선가 그 가지 일부러 구부렸구나. |
直性猶存內 那能免斧斤 | 곧은 성품 그래도 그 속에 있어 도끼질 면하기 어려웠도다. |
곧은 나무는 금새 도끼에 찍혀 재목이 된다. 그 가지를 일부러 구부림은 베임의 화를 면키 위해서였다. 그래도 곧은 성품은 감추지 못해 끝내 지팡이 감이 되어 도끼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에게 화를 피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金淨)은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면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또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보인다.
성여학(成汝學)은 시재(詩才)가 높아 일세에 대적할 사람이 적었는데도 늦도록 벼슬 한자리 못했다.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일찍이 그의 집에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보면 늘 찢어진 옷에다 찌그러진 갓을 쓰고 있었으며, 귀밑머리는 더부룩하고 머리칼은 하얗게 세어 홀로 한 칸의 서재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말로 한 세상의 곤궁한 선비였다.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성여학 때문에 나온 말인가 싶다.
余嘗往來其家, 每見其破衣矮巾, 滿鬢衰髮, 獨依一間書齋, 盡日授書童子, 眞一世之窮士. 詩能窮人者, 殆爲成敎授而發也.
그의 시에 보면 다음과 같다.
露草蟲聲濕 風枝鳥夢危 | 이슬 풀에 벌레 소리 촉촉 젖었고 바람 가지 새의 꿈도 위태롭구나. |
雨意偏侵夢 秋光欲染詩 | 빗 기운 꿈길을 적시어 들고 가을 볕 내 시에 물을 들이네. |
그 말은 비록 매우 공교로우나, 춥고 쓸쓸한 것이 영달하고 귀하게 될 사람의 기상이 아니다. 어찌 유독 시만이 그를 궁하게 만들었겠는가? 시 또한 그의 궁함을 하소연한 것이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만물을 빚어내어 그 형체를 부여하는 것은 하늘의 재주이다. 조화(造化)를 따라 만물의 형상을 잘 본뜨는 것은 시인의 재주이다. 하늘보다 더 공교로운 것은 없는데 시인이 어찌 하늘의 공교로움을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재능 있는 자는 운수가 사나운데, 이는 하늘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하늘이 또한 시기심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재주를 주고서는 어이하여 다시 궁하게 한단 말인가?
夫雕鏤萬物, 使萬物各賦其形者, 天之才也; 擺弄造化, 能放象萬物之態者, 詩人之才也. 惟莫工者天, 而何物詩人, 奪天之工哉? 是知才者無命, 是天之所使, 天亦多猜也乎. 旣賦之才, 胡使之窮哉.
또 이정면(李廷冕)이란 사림이 있는데, 이홍남(李洪男)의 손자이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에 헌 데가 있어 단사(短㾴)라고 자칭하였다. 일찍이 그가 비 갠 뒤에 시를 지었다.
庭泥橫斷蚓 壁日聚寒蠅 | 뜰 진흙에 잘린 지렁이 가로 놓였고 벽에 비친 햇볕에 가을 파리 모여드네. |
이춘영(李春英)이 늘 그 시의 묘함을 칭찬하면서도 그 궁함을 싫어했는데, 뒤에 등과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진흙 위에 허리가 잘린 지렁이의 형국이나, 짧은 가을 햇볕을 쬐자고 벽에 몰려든 가을 파리의 형국은 참으로 궁상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대개 ‘정니(庭泥)’와 ‘단인(斷蚓)’은 천하게 될 징조였고, ‘벽일(壁日)’과 ‘한승(寒蠅)’은 요절의 징조였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그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宦遊千里甘蔗盡 | 천리라 벼슬길은 단 맛이 다하였고 |
世事一春落花忙 | 한 봄날 세상일은 지는 꽃만 바쁘도다. |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칭찬하였다. 다만 유몽인(柳夢寅)은 “나이 어린 사람이 어찌 이런 말을 짓는가[年少人何作此語]?”고 나무랐는데, 과연 오래지 않아 요절하고 말았다. 환한 봄날에 하필 떨어지는 꽃잎의 분망함을 말하며, 아직 벼슬에 올라보지도 않아 놓고 무슨 다해 버린 벼슬길의 단맛을 말했더란 말인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유몽인(柳夢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시라는 것은 성정의 허령(虛靈)함에서 나오기 때문에 먼저 요(夭)와 천(賤)을 알아 생각이 솟아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니,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궁한 까닭에 시가 저절로 이와 같은 것이다. 다만 재주 있는 사람은 하늘이 또한 시기하나니 세상 사람을 또 어찌 허물하겠는가? 슬프다.
吁! 詩者, 出自情性虛靈之府, 先識夭賤, 油然而發, 不期然而然, 非詩能窮, 人窮也, 故詩者如斯哉. 但有才者, 天亦猜之, 於世人, 又何尤焉, 惜哉!
이상 역대 시화에 보이는 시참(詩讖)과 관련된 예화를 중심으로 옛 사람들의 언령(言靈) 의식을 살펴보았다. 말에는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닌 것처럼, 생각도 없이 되는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법이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찌 함부로 붓을 놀릴 것이랴!
인용
3. 대궐 버들 푸르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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