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 이치를 무장한 이 시집은 후대에 전해지리
뇌계시집서(㵢溪詩集序)
성현(成俔)
詩難言也, 言詩者論氣而不論理, 非也, 氣以行於外, 理以守諸內, 守於內者不固, 則行於外者未免泛駕而詭遇, 詩以理爲貴也. 善爲詩者悟於理, 故能不失根本, 苟失根本, 雖豪宕濃艶, 雕鎪萬狀, 而不可謂之詩也.
自麗季至國朝, 詩之名家非一, 而能悟其理者蓋寡, 平者失於野, 豪者失於縟, 奇者失於險, 巧者失於碎, 俗習卒至於委靡而不回, 吁! 此則詩之不幸也.
兪侯克已氏, 金閨彥士也, 少時, 學詩於佔畢先生, 先生以詩鳴於世, 縉紳之士攀附而席餘光者無限. 余亦與先生相友善, 每聞先生之論人, 以侯爲奇才, 其後余入鑾坡, 與侯相從非一日. 耳其言而咀其詩, 其詩深悟於理而自得, 故篇篇有範, 句句有警, 米鹽醞藉, 不落世之窠臼. 譬如秋山, 多骨少肉, 奇峭無窮, 而草木亦與之堅實, 其得雅頌之遺音歟?
昔, 鉅鹿侯芭從楊雄授『太玄』ㆍ『法言』, 劉歆見其書曰: “吾恐後人用覆醬瓿也.” 嚴厷謂桓譚曰: “雄書能傳於後世乎?” 譚曰: “凡人貴遠而賤近, 親見子雲, 祿位容貌不能動人, 故輕其書, 自雄沒至今四十餘年, 而其書始行.” 當其時, 雄未甚顯, 而人未甚貴之也, 所從學者惟芭, 所歎服者惟譚, 然猶流波遠曁而不泯. 況今侯詩, 佔畢之所稱, 成廟之所深許, 而膾炙於衆口者, 其不覆醬瓿也明矣.
所謂詩能窮人者, 不遇知於世主, 泯滅其跡耳, 侯則際會文明, 得遇聖君, 而猶不達, 信乎詩之能窮人也. 侯之職位事蹟, 不得垂於靑史, 而所可傳者惟詩耳, 其可不編而壽諸梓歟? 見侯之稿, 慨然抆淚而題之. 丙辰中秋, 磬叔敍. 『虛白堂文集』 卷之七
해석
詩難言也, 言詩者論氣而不論理, 非也, 氣以行於外, 理以守諸內, 守於內者不固, 則行於外者未免泛駕而詭遇, 詩以理爲貴也.
시는 말하기 어렵지만 시를 말하는 이가 기(氣)를 논하면서 이(理)를 논하지 않는 건 잘못으로 기는 외면에 실행되고 이(理)는 내면에 지켜져 내면에 지킨 게 견고하지 않으면 외면에 실행되는 것은 수레를 뒤집어엎거나【범가(泛駕): 힘이 센 말이 궤철(軌轍)에 얽매이지 않고 멍에를 뒤집어엎는다는 말로, 상도(常道)를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漢書』 卷6 武帝紀】 속여 만나게 하는 걸 피하질 못하니 시는 이(理)를 귀함으로 삼는다.
善爲詩者悟於理, 故能不失根本, 苟失根本, 雖豪宕濃艶, 雕鎪萬狀, 而不可謂之詩也.
잘 시를 짓는 이는 이(理)에 깨우쳤기 때문에 근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만약 근본을 잃었다면 비록 호쾌하고 방탕하며 농도 짙게 온갖 형상을 새기고 조각하더라도 시라 말할 수 없다.
自麗季至國朝, 詩之名家非一, 而能悟其理者蓋寡, 平者失於野, 豪者失於縟, 奇者失於險, 巧者失於碎, 俗習卒至於委靡而不回, 吁! 此則詩之不幸也.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의 이름난 작가가 한둘은 아니지만 이(理)를 깨우친 이는 대체로 적어 평범한 이는 거친 데서 잃고 호쾌한 이는 꾸민 데서 잃으며 기이한 이는 험한 데서 잃고 기교있는 이는 번쇄한 데서 잃어 습속이 끝내 활기를 잃는 데[委靡]에 이르러 회귀하지 못했으니 아! 이것이 시의 불행이다.
兪侯克已氏, 金閨彥士也, 少時, 學詩於佔畢先生, 先生以詩鳴於世, 縉紳之士攀附而席餘光者無限.
자사 유극기(兪克己)【유극기(兪克己):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을 말한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임계(林溪)ㆍ뇌계(㵢溪)이며, 극기는 그의 자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7년(성종18)에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0년에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성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고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는 조정[金閨]【금규(金閨): 한(漢)나라 때 궁궐의 문인 금마문(金馬門)으로, 본디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었는데, 전하여 조정(朝廷)을 가리킨다.】의 훌륭한 인물로 어렸을 때 점필재 선생에게 시를 배웠고 선생은 시로 세상에 알려져 진신(縉紳)의 선비【진신지사(搢紳之士): 홀(笏)을 큰 띠에 꽂은 사람들로, 조정의 벼슬아치를 말한다.】가 부여잡아【반부(攀附):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이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에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라는 말이 나온다.】 자리의 남은 빛이 끝이 없었다.
余亦與先生相友善, 每聞先生之論人, 以侯爲奇才, 其後余入鑾坡, 與侯相從非一日.
나는 또한 선생과 서로 친해 매번 선생이 남을 논하는 걸 들었는데 자사를 기재(奇才)라 여겼고 훗날 내가 예문관[鑾坡]에 들어가 자사와 서로 따른 지 하루가 아니었다.
耳其言而咀其詩, 其詩深悟於理而自得, 故篇篇有範, 句句有警, 米鹽醞藉, 不落世之窠臼.
그의 말을 듣고 시를 읊조려보면 시가 깊이 이(理)에 깨우쳐 자득했기 때문에 한 편 한 편 법도가 있고 구절구절 경구가 있어 기본[米鹽]이 가득 차서 세상의 일정한 형식[窠臼]에 떨어지지 않았다.
譬如秋山, 多骨少肉, 奇峭無窮, 而草木亦與之堅實, 其得雅頌之遺音歟?
비유하면 가을 산에 많은 바위에 적은 흙이 기이하게 솟은 게 무궁해서 초목이 또한 바위와 견고하고 꽉 차 있어 아송(雅頌)의 남겨진 음을 얻은 것과 같으리라.
昔, 鉅鹿侯芭從楊雄授『太玄』ㆍ『法言』, 劉歆見其書曰: “吾恐後人用覆醬瓿也.”
옛날에 거록(鉅鹿)의 후파(侯芭)가 양웅을 따라 『태현경』과 『법언』을 전수받았는데【양웅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사람으로, 자가 자운(子雲)이며, 성도(成都)에 살았다.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고자(古字)를 아주 잘 알았다. 양웅이 병들어 집에 있을 적에 가난하여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거록에 사는 후파(侯芭)란 사람이 항상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양웅에게 어려운 고자를 물었으며, 『법언(法言)』ㆍ『태현경(太玄經)』 등을 배웠다. 후일 양웅이 죽자 후파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거상(居喪)하였다. 『漢書』 卷87 揚雄傳贊】 유흠(劉歆)이 그 책을 보고 “나는 후대 사람이 장독대를 덮는 데 쓸까 걱정되네.”라고 말했다【『한서』 권87 「양웅전찬(揚雄傳贊)」에 나온다. 유흠은 당시 양웅에게 “부질없이 사서 고생하는군![空自苦]”이라 하며 조롱하였으나 양웅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흠은 한(漢)나라의 대학자 유향(劉向)의 아들로, 부친의 업을 계승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왕망(王莽)의 찬탈을 돕고 나중에 셋째 아들이 왕망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또 장차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거의(擧義)하려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자살하였다. 『漢書』 卷69中】.
嚴厷謂桓譚曰: “雄書能傳於後世乎?”
엄우(嚴尤)가 환담(桓譚)에게 “양웅책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譚曰: “凡人貴遠而賤近, 親見子雲, 祿位容貌不能動人, 故輕其書, 自雄沒至今四十餘年, 而其書始行.”
환담(桓譚)이 “대체로 사람은 오래된 것을 귀히 여기고 최근의 것을 천하게 여기는데 친히 자운(子雲)을 보니 녹봉과 지위와 용모가 남을 움직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책을 경시했지만 양웅이 죽은 지 이제 40여년으로 그 책이 막 유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이 이야기도 역시 『한서』 권87 「양웅전 찬」에 나온다. 엄우는 당시 납언(納言) 벼슬에 있던 관리이다. 환담(桓譚)은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직간(直諫)을 하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육안(六安) 고을로 쫓겨 가던 중에 죽었는데, 『신론(新論)』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後漢書 卷28』 어려서부터 특히 고학(古學)을 좋아하여 양웅과 유흠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양웅의 저술을 폄하하는 당시의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의 저술이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라고 극력 변호하였다.】.
當其時, 雄未甚顯, 而人未甚貴之也, 所從學者惟芭, 所歎服者惟譚, 然猶流波遠曁而不泯.
이 때에 양웅은 매우 드러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매우 귀히 여기지 않아 좇아 배운 이는 오직 후파(侯芭)이고 감탄한 이는 오직 환담(桓譚)이지만 흐르는 물결이 멀리 미쳐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況今侯詩, 佔畢之所稱, 成廟之所深許, 而膾炙於衆口者, 其不覆醬瓿也明矣.
게다가 지금 자사의 시는 점필재가 칭찬한 것이고 성종께서 깊이 허여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니 장독대에 덮여지지 않을 게 분명하다.
所謂詩能窮人者, 不遇知於世主, 泯滅其跡耳, 侯則際會文明, 得遇聖君, 而猶不達, 信乎詩之能窮人也.
소위 ‘시능궁인(詩能窮人)’이란 세상의 임금에게 알려지지 않아 그 자취가 사라질 뿐인데 자사는 문명의 즈음을 만나 성스런 임금의 대우를 얻었지만 오히려 현달하진 못했으니 참이로구나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할 수 있다는 게.
侯之職位事蹟, 不得垂於靑史, 而所可傳者惟詩耳, 其可不編而壽諸梓歟?
자사의 직위와 사업은 역사에 드리워질 수 없어 전할 만한 것은 오직 시 뿐이니 편집하여 상재(上梓)하여 장수하게 하지 않겠는가?
見侯之稿, 慨然抆淚而題之. 丙辰中秋, 磬叔敍. 『虛白堂文集』 卷之七
자사의 초고를 보고 서글피 눈물을 닦으며 짓는다. 병진(1496)년 중추에 경숙(磬叔)이 쓰다.
해설
1496년(연산군2) 8월에 유호인(兪好仁)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이(理)는 안에서 내면을 지키고 기(氣)는 밖으로 행해지므로 이(理)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어야 시의 병통이 없다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 뒤에, 유호인의 시를 음미해 보니 이(理)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시에 규범이 있으면서도 상투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유호인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시를 배우고 칭찬을 받은 사실과 예전에 양웅(揚雄)이 매우 의미 있는 저술을 하였지만 당대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적었음을 언급하면서 유호인의 시가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번역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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