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범답안을 모아 합격집을 만들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해마다 출제되는 문제는 같지가 않고, 채점하는 사람의 기준 또한 서로 다르니, 예전 모범 답안을 외우는 것이 과연 수험 준비에 어떤 도움이 될까?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꼭같이 적용되는 것일 터이다. 아무리 예상문제를 많이 보고, 모범 답안을 많이 외워도 논술 답안은 영 잘 써지지가 않는다. 막상 문제가 주어지면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고, 게다가 예상문제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출제되는 법은 결코 없으니, 예상문제를 익히고 외우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걸까? 그럴진대 이 난감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善爲文者, 其知兵乎.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題目者, 敵國也; 掌故者, 戰場墟壘也. 束字爲句, 團句成章, 猶隊伍行陣也;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皷旌旗也. 照應者, 烽埈也; 譬喩者, 遊騎也.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貴含蓄者, 不禽二毛也; 有餘音者, 振旅而凱旋也. |
연암은 대뜸 글쓰기를 장수가 병법을 운용하는 것에 비유하여 말문을 연다. 모두 12가지의 비유를 동원하여 설명했다. 그 비유가 참신할 뿐 아니라 글쓰기의 정법定法과 활법活法을 다 말함으로써, 일정한 법칙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응변작제應變作制, 인정입격因情立格 하는 활물活物로서의 글쓰기를 천명하고 있다. 주제를 뒷받침 해주는 효과적인 예시 속에 글쓰기의 원리를 힘 있고 깊이 있게 천명한 글이다.
2.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Ⅰ
먼저 그 각각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善爲文者, 其知兵乎? 字譬則士也; 意譬則將也; |
글자는 비유하면 병사이고, 뜻은 비유컨대 장수라 했다. 한편의 글이 수없이 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듯, 하나의 부대는 수많은 병사들로 구성된다. 병사가 아무리 씩씩하고 수가 많고 지닌 무기가 훌륭해도 지휘관이 우왕좌왕 허둥대고 보면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문장력이 제 아무리 좋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도 주제의식이 분명치 않고 보니 지리멸멸하여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부대에 유능한 지휘관이 없어서는 안 되듯이, 한편의 글에는 뜻, 즉 주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 주제가 없는 글은 지휘관 없는 군대와 같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題目者, 敵國也; 掌故者, 戰場墟壘也; |
제목은 공략해야 할 적국이라고 했다. 글 쓰는 이는 쓰기에 앞서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무엇을, 왜,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쓰는지를 분명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할 수 있다. 전쟁에 임하는 장수는 먼저 공략해야 할 상대방에 대해 철저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덮어 놓고 싸우고 보자는 식은 무모하다. 무엇을 쓸 것인지 가늠도 없이 일단 쓰고 보자는 식으로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먼저 진지를 구축하여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무조건 넓은 벌판에 군사를 풀어 놓고 싸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절한 위치에 파둔 엄호와 진지는 수 많은 군대의 힘과 화살의 소모를 덜 수가 있다. 글쓰기에 있어, 적절한 전거를 끌어오거나 알맞은 인용, 혹은 예시는 글에 탄력을 붙여주고 신뢰를 더해준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束字爲句, 團句成章, 猶隊伍行陣也; |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고 했다. 글자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단락을 만든다. 단락들은 서로 유기적 연결과 통일성을 추구하며 전체 글을 구성한다. 병사들이 모여 분대 또는 소대를 이루고, 소대가 모여 중대 또는 대대가 된다. 중대나 대대가 모여 전체 여단을 형성한다. 각각의 단위들은 보다 큰 단위의 지휘 통제 아래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락과 단락 간의 결합과 짜임새도 장수의 명령 아래 빈틈없는 통일성과 유기적 연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3.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Ⅱ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韻以聲之, 詞以耀之, 猶金鼓旌旗也; |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고 했다. 별도의 통신수단이 없던 과거 전쟁에서 명령의 전달은 나팔과 북, 그리고 깃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진군나팔은 전진을 명령하고, 북은 퇴각 명령을 전달한다. 나팔과 북소리로도 혹 부족할까하여 깃발을 가지고 또 명령을 전달한다. 깃발이 시각의 배려라면, 북소리 나팔소리는 청각의 배려이다. 멋있는 군악대의 취주吹奏는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킨다. 북과 나팔이 적군을 무찌를 수는 없지만, 이것 없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주제, 동일한 내용이라도 어휘의 적절한 선택과 효과적인 문장 표현을 갖추게 되면 글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소리를 내어 읽어도 껄끄러움 없이 순순하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넘치는 표현 없이도 제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照應者, 烽埈也; 譬喩者, 遊騎也; |
조응照應이라는 것은 봉화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변경에서 봉화가 오른다. 그 봉화는 잇달아 전하여져서 후방의 본진에까지 도달한다. 직접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지 않고서도 후방에서는 적의 침입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글쓰는 사람은 할 말을 아껴둘 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슬쩍 던져 놓고 뒤에서 이를 받는다. 그래서 산단운련山斷雲連이라고 했다. 봉우리만 내민 산을 구름이 끊어 놓았다 해서 구름 아래 산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리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다 말하지 않고도 말한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이른바 사단의속辭斷意屬, 즉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호조呼照라고도 한다.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라고 했다. 들판에서 지리멸렬한 백병전이 한창일 때, 그리하여 상대와의 우열이 드러나지 않고 혼전이 거듭되고 있을 때, 전차 부대나 기마 부대가 뛰어들어 적병을 공략하면 우열은 단번에 어느 한편으로 기울고 만다. 글이 지지부진하여 잘 나가지 않을 때 참신하고 적절한 비유는 글에 아연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4. 글쓰기와 병법 운용의 공통점Ⅲ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1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抑揚反復者, 鏖戰撕殺也; 破題而結束者, 先登而擒敵也; |
억양반복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鏖戰撕殺]이라고 했다. 억양이란 한 번 높이기 위해 일부러 한 번 낮추거나, 반대로 낮추기 위해 한 번 추켜 주는 것을 말한다. “얼굴은 못생겼는데 마음씨는 착하다”와 같은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억양은 문장 단위에서 뿐 아니라 단락 단위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억양이 점층되어 마침내 주제가 완전히 피력될 때까지 반복되고 나서 글은 끝난다. 적군과의 전투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이거나 투항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전투가 소강국면에 접어들어 진전이 없으면 성벽에 사다리를 걸친다. 일단 어느 한 지점이라도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성을 공략할 거점을 마련할 수가 있다. 적은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저항할 것이다. 먼저 성벽을 타고 올라 교두보를 확보하고 나면 성문을 여는 것은 시간문제다. 파제란 원래 글의 첫 서두를 일컫는 말이다. 이 글의 서두는 그런 의미에서 파제의 한 실례를 보여준다. 글의 첫 부분은 “글을 잘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라고 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연관 짓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글의 제목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다. 앞서도 말했듯 ‘소단’이란 ‘문단’과 같은 뜻이니 글쓰기와 관련된 말이고, ‘적치’란 대장군의 ‘붉은 깃발’이니 군대와 연관된 것이다. 이 글은 ‘소단적치’란 제목이 붙은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를 파제하여 글쓰기와 병법을 한 자리에서 나란히 이야기 하게 된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貴含蓄者, 不禽二毛也; 有餘音者, 振旅而凱旋也. |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다. 싸움에 승리를 거두고, 포로를 점검해 보니 반백의 늙은이도 끼어 있다. 중늙은이가 싸워 보았댔자 아군에 무슨 해를 미쳤겠으며, 마지못해 끌려 나온 것이 분명할 진대, 이들은 오히려 석방하여 놓아 주는 것이 점령군의 금도襟度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는 적중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도 큰 효과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시시콜콜히 다 말해야 맛이 아니다. 말할 듯 말하지 않고 함축을 머금는데서 글쓴이의 의도가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장한 승리를 거두었으면 대오를 가다듬어 돌아와야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냥 그곳에 머물 수만은 없다. 점령지를 정돈하고 후속 조처를 취한 뒤 하루빨리 개선하여 다음 전투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쓸 때 혹 독자들이 못 알아 들을까봐 시도 때도 없이 중언부언 주제를 되풀이 해 말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의 태도가 아니다. 독자의 식상을 부른다.
이상 첫 번째 단락에서 제시한 글쓰기와 병법을 견준 12가지 비유를 설명해 보았다. 이 단락 원문의 구문 변화를 눈여겨 보면 연암이 말한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같은 단위의 병렬인데도, 처음엔 ‘A 譬則B也’의 구문으로 시작하고서, 곧바로 ‘A者 B也’의 구문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여기서도 B에 해당하는 단위를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점층시켜 변화를 주었다. 다시 ‘A猶B也’의 구문으로 바꾼 뒤 금세 ‘A者 B也’의 구문을 다시 연결시켰다. 이 경우에도 A와 B에 해당하는 부분에 두 글자에서 네 글자로, 다시 다섯 글자로 점층시키는 등의 굴곡을 주어 문장에 끊임 없이 변화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 파제破題 : 글의 모두冒頭에 제목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말함. 명청대 과거 시험에서는 팔고문八股文의 처음 두 구절을 파제破題라고 하였는데, 뒤에는 사작寫作의 한 법식으로 자리잡았다. [본문으로]
5. 글이 좋지 않은 건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夫長平之卒, 其勇㥘非異於昔時也, 弓矛戈鋋, 其利鈍非變於前日也, 然而廉頗將之, 則足以制勝, 趙括代之, 則足以自坑. |
이렇게 해서 글쓰기와 병법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설명한 연암은, 이어지는 둘째 단락에서 다시 전고典故와 비유, 억양반복의 방법을 활용하여 글쓰기와 병법의 관련성을 보다 더 긴밀하게 다진다. 여기서 병법의 예로 든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이다. 조나라의 백전노장 염파는 진나라 왕흘의 군대를 맞이하여 저들을 지치게 할 양으로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약을 올리며 싸움을 걸어도 일체의 반응이 없었다. 양식은 자꾸 떨어져 가고, 군대의 사기도 영 말이 아니었다. 진나라는 하는 수 없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염파는 늙었다. 염파는 겁먹었다. 그래서 안 싸운다. 우리는 젊은 조괄이 장수가 되어 올까봐 가장 겁난다. 염파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이 유언비어에 혹해 조나라는 염파 대신 경험 없는 풋내기 조괄을 장수로 교체하였다. 의기양양해서 부임한 즉시 조괄은 뭔가 보여주려고 그날로 군대의 지휘체계와 명령계통을 다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는 준비도 없이 군대를 출정시켰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백전백승의 노장 백기白起를 아무도 몰래 투입시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조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막강한 조나라의 40만 대군은 진나라 백기의 유인에 걸려 하루아침에 섬멸 당하고 말았다. 그 후 강대했던 조나라는 다시는 힘을 떨치지 못하고 패망하고 말았다. 왜 똑같은 군사가 꼭같은 무기로 싸웠는데, 염파가 이끌면 적과 맞대항할 수 있었고 조괄이 대신하자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한꺼번에 죽고 말았을까? 그럴진대 승리의 관건은 좋은 무기나 병사에 있지 않고, 이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역량에 있지 않겠는가?
글 쓰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주제와 글감이 있고,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다 해도 ‘이치를 얻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글이 지녀야 할 ‘결’이다. 물에 물결이 있고, 살에 살결이 있으며, 바람에 바람결이 있듯, 글에도 결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장수가 적을 격파하는 용병술에 비유할 수 있고, 글 쓰는 이의 재량하고 판단하는 역량에 견줄 수 있다.
그래서 연암은 둘째 단락의 결론을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로 맺는다. 이는 달리 말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병사의 잘못이 아니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책임은 어디까지나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다. 지휘관이 훌륭하면 호미나 죽창을 가지고도 정예의 군대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 되는 대로 장대에 천을 쭉 찢어 매달아도 술을 달고 융단에 화려한 수를 놓아 장식한 멋진 깃발보다 효과적인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꼭 고담준론만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평범한 소재, 늘 주고받는 우스개 말도 꼭 놓일 데에 놓이면 참으로 깊은 이치를 담게 된다. 꼭 사람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하는 소재,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이야기, 철학자의 근엄한 경귀를 인용하는 것만이 글을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인용
- 이아爾雅 : 13경의 하나로 천문지리에서 초목조수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문자를 설명한 고대의 사전. [본문으로]
6. 글쓰기에 상황만 있을 뿐 정해진 법칙은 없다
글쓰기와 병법이 이렇듯 한 가지 원리일진대, 훌륭한 장수가 되고자 병법서를 열심히 읽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 이론을 열심히 익히면 되는가? 시론 책을 줄줄 외우면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소설작법대로 따라 쓰면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는가? 논술 참고서만 열심히 읽고 외우면 논술시험에 만점을 받을 수 있을까?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으니 딱한 노릇이다. 시론을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시는 점점 더 쓰기가 어려워지고, 작문 이론을 배우면 배울수록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려서 한 줄도 더 쓸 수가 없다. 병법을 열심히 익히긴 했지만, 이론에 얽매이다 보니 막상 실전에서는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 좌충우돌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연암은 이를 ‘합변지기合變之機’와 ‘제승지권制勝之權’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찔러 말한다. 논술고사 답안지를 채점할 때마다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단락 개념도 분명하고 주제 의식도 더할 수 없이 선명한데, 막상 읽고 나면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문제지를 나눠주고 3분쯤 지나고 나면 수험생으로 가득 찬 교실에서는 일제히 볼펜을 가지고 맨 종이 위에 글씨 쓰는 소리가 흡사 말 달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10분쯤 지나고 나면 그 소리가 그치고 여기저기서 볼펜을 굴리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난다. 작정도 없이 기세 좋게 시작한 글쓰기가 금세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연암은 이를,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산 위의 풀과 나무만 보고도 늘어선 적병인 것만 같아서 기가 팍 꺾이고 마는 것에 비유했다.
글쓰기의 원칙은 있지만 정해진 법칙이란 있을 수 없다. 글의 법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마다 달라지고, 때마다 달라진다. 주변 상황의 미묘한 변수에 따라 천변만화의 파란을 일으킨다. 병법도 다를 바 없다. 융통성 없는 교주고슬膠柱鼓瑟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잘 풀려면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 수학문제를 외워 답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논술 시험을 잘 보려면 사고력과 창의력을 길러야지, 답안을 외워서 쓸 수는 없다.
- 합변合變이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변화하여 달라짐을 말한다. 『사기』에서 왕이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쓰려하자 인상여藺相如가 조괄은 한갖 제 아비의 글로 전하는 것을 읽어 교주고슬膠柱鼓瑟함과 같을 뿐 합변은 알지 못한다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 진晉나라 때 부견苻堅이 군대를 일으켜 성에 올라 왕사王師를 바라보매 부진部陣이 정제되고 군대는 정예로와 주눅이 들었는데, 또 북으로 팔공산八公山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과 같은 지라 군대가 주둔하여 에워싼 것으로 알았다는 고사. 『진서晉書』 권 140 「부견」하下에 보인다. 여기서는 글을 쓰기도 전에 기운이 꺾여 쓰고 싶은 마음이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 주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 가서 군대가 모두 죽어,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는 고사. 『태평어람太平御覽』 「학鶴」에 『포박자抱朴子』의 인용으로 보인다. 한유韓愈는 「송구홍남귀시送區弘南歸詩」에서 “목왕穆王이 예전 남정 가 군대가 못돌아오니, 벌레와 모래, 원숭이와 학만이 엎드려 날리우네. 穆昔南征軍不歸, 蟲沙猿鶴伏以飛”라 하였다. 여기서는 평소에 써먹으려고 외워 두었던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아무 짝에 쓸모 없게 된 것을 뜻함. [본문으로]
7. 주제를 뚜렷하게 세우고 글을 쓰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암은 ‘혜경蹊徑’ 즉 갈 길을 분명히 알고, ‘요령’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갈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글에는 주제가 뚜렷해야 한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 쓰는 이는 글 쓰는 동안 내내 이 물음에서 떠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갈 길을 잃지 말라는 주문은 ‘입주뇌立主腦’, 즉 주제를 명확히 세우라는 것이다. 명나라 이어李漁는 『한정우기閑情偶記』 「입주뇌」에서, “주뇌主腦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작자가 입언立言하는 본의本意를 말한다”고 했다. 주제가 명확치 않고서는 글은 마냥 헛돌고 만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다던 항우가 힘이 부족해서 패한 것이 아니다. 음릉에서 길을 잃어 늪속에 빠지고 보니,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도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요령만 얻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요령이란 ‘갈 길’에 대한 선택이다. 주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어느 길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요령을 얻어야 한다는 주문은 글의 구성과 관련된다. 기승전합起承轉合의 전개는 불변의 원칙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는 백출한다. 내 생각을 읽는 이에게 오해 없이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납득시키려면 어떤 순서와 어떤 단계로 글을 펼쳐야 할까? 이 미묘한 저울질이 바로 합변지기合變之機, 제승지권制勝之權이다. 한무제 때 그 겹겹이 포위한 한나라의 군대를 오랑캐의 선우는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만으로도 유유히 달아나 버렸다. 제 아무리 좋은 글감을 마련하고, 예상되는 반론에 대응할 논리를 준비해도 합변의 요령을 얻지 못하면 겹겹이 에워싸고 자료를 거듭 준비해도 종내 설득력 있는 한편의 글이 되지는 못한다. 말이 많아야 좋은 글이 아니다. 중언부언 하는 글이 친절한 글이 아니다. 말이 간결해도 핵심을 꿰뚫어야 한다.
-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포위를 뚫고 달아나다가 음릉陰陵에서 농부가 길을 거짓으로 가르쳐 주는 바람에 반대 방향으로 가서 늪에 빠졌다. 한병의 추격을 받자 마침내 자기 목을 찔러 자살하면서, “힘은 산을 뽑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네. 때가 불리하매 추騅도 나아가질 않는도다. 추가 가질 않으니 어쩔 수 없네. 우虞여! 우여! 너를 어찌 할거나.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柰何, 虞兮虞兮柰若何!”라고 노래한 데서 나온 말. 『사기』「항우본기」. 여기서는 쓰려고 하는 내용이 분명치 않고 보니,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 막막한 모양을 나타냄. [본문으로]
- 한무제 때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무강거武剛車로써 흉노의 선우單于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나, 선우가 여섯 마리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수백기만을 거느린채 한군의 포위를 뚫고 달아나버린 고사. 『사기』 권 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참조. 여기서는 글쓰기에 있어 입의立意 즉 주제의식의 명확치 않아, 비록 글로 쓰더라도 뜻이 성글어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함을 말함. [본문으로]
- 당 헌종 때 오원제吳元濟란 자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해 웅거하매, 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관군을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이에 이소李愬가 자청하여 토벌의 책임을 맡아서는, 싸움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 적을 방심시키고, 적장 중에 투항해 오는 자를 극진히 대접하여 적정을 파악한 후, 폭설이 내리던 밤 군사가 열에 한 둘이 얼어죽는 추위를 무릅쓰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채성蔡城을 함락시켜 오원제를 사로잡아 토벌한 고사. 『신당서』 권 154, 『구당서』 권 133의 「이소열전」 참고. 여기서는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조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펼치는 요령을 얻는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본문으로]
- 춘추시대 노나라 장수 조귀曹劌가 제齊나라와 장작長勺에서 싸울 때 노장공魯莊公이 북을 치려 하자 만류하고는 제나라 사람이 북을 세 번 친 뒤에야 치게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둔 고사. 나중에 장공이 연유를 묻자, 그는 “대저 전쟁은 기운을 용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북을 치면 기세가 올라가나, 두 번 치게 되면 시들해 지고, 세 번 치면 다하게 됩니다. 저들은 다하였고, 우리는 가득한 까닭에 이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춘추좌씨전』 장공 10년 봄 기사에 보인다. 여기서는 말이 비록 간단하더라도 핵심이 분명하여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됨을 말함. [본문으로]
8. 모범답안을 맹종치 말고 글의 결을 파악하라
『소단적치』란 책은 과거에 이미 급제한 모범답안만 모아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득승지병得勝之兵’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 실린 글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익힌다면 글쓰기의 요령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합변지권合變之權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에 달린 문제이지, 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상황은 언제나 고정됨 없이 변화한다. 설사 같은 주제를 다룬 문제가 나왔다 하더라도 예전 답안지 그대로를 가지고는 급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관은 옛날의 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싸움에서 졌고, 우후는 옛날의 법과 반대로 했는데 전쟁에서 이겼다. 한신은 병법과 반대로 배수진을 쳤지만 이겼고, 임진왜란 때 신립은 한신을 따라 배수진을 쳤건만 무참하게 패배하였다. 왜 그랬을까? 요령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범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과거를 옳게 배우려거든 과거를 맹종치 말라. 새 것을 쓰고 싶거든 옛 것에서 배워라.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지역이 다를진대, 그러한 차이가 빚어내는 미묘한 변화의 ‘결’을 읽어, 가장 적절한 ‘새 길’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소단적치인」에서 연암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인용
- 후한 사람 반초班超가 젊은 시절 관상을 보러 갔더니, “그대는 제비턱에 범의 목으로 날아서 고기를 먹을’(飛而食肉) 상이니, 만리후萬里侯에 봉해질 사람”이라고 말한데서 나온 말. 뒤에 그는 서역 50여 나라를 항복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는 공을 세우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후한서』 권 47, 「반초열전」 참조. 여기서는 용맹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움을 두고 한 말. [본문으로]
- 후한 효화황제孝和皇帝 때 두헌竇憲과 경병耿秉이 흉노 북선우北單于를 크게 물리치고, 국경에서 3천리 떨어진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반고班固에게 명銘을 짓게 하여, 돌에 한나라의 위덕威德을 새겨 놓고 돌아온 고사에서 나온 말. 『후한서』 권 23 참조. [본문으로]
- 당나라 숙종 때 방관房琯이 적당賊黨 진도사陳濤斜의 토벌을 자청하여 가서, 춘추시대의 전법戰法대로 수레 이천 승으로 병영을 에워싸게 하고 기병과 보병을 그 사이에 있게 하였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4만의 군사를 모두 죽여 대패하였다. 춘추 적의 옛 전범에 따라 했으나, 변화할 줄 몰랐던 까닭에 진 것이다. [본문으로]
- 제나라 손빈孫臏이 위나라 방연龐涓을 칠 때, 부뚜막 숫자를 줄여 적을 방심케하여 이겼는데, 후한 때 우후虞詡는 강인羌人을 치면서 반대로 부뚜막 숫자를 날마다 배로 늘여서 크게 이겼다. 어떤 이가 왜 손빈은 부뚜막을 줄였는데 그대는 늘였는가? 하고 묻자, 그는 “오랑캐는 무리가 많고, 우리 군대는 적다. 천천히 행군하면 미치는 바가 되기 쉽고, 빨리 전진하면 저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바가 될 것이다. 오랑캐가 우리의 부뚜막 숫자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 군대가 와서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리가 많은데도 행군이 신속하므로 반드시 우리를 추격하기를 꺼릴 것이다. 손빈은 약함으로 보여주었지만 나는 이제 강함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형세가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후한서』 권 58, 「우후열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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