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7부 유교왕국의 완성, 1장 건국드라마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7부 유교왕국의 완성, 1장 건국드라마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1:24
728x90
반응형

 7부 유교왕국의 완성

 

 

유교왕국이란 원래 왕과 사대부를 축으로 하는 이중 권력 체제다.

 

초기의 승자는 왕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사대부 체제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도전(鄭道傳)의 구상은 당연히 왕국 체제를 선호하는 왕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세종까지는 국왕이 사대부를 관료로 거느리는 정상적인 왕국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머리가 커진 사대부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된다.

 

 

 

 

 1장 건국 드라마

 

 

조선의 기획자

 

 

작은 사물이 큰 사물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도 다른 면에서 보면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 달리 의지를 지닌 사물, 이를테면 인간이나 인간 집단은 그 자연 법칙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事大)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행위다.

- 역사의 물리학중에서

 

 

14세기 말의 동북아시아는 활기에 넘친다. 한 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한족 왕조가 들어선 중국과 새 왕조로 말을 갈아 탄 한반도는 바야흐로 건국과 재건의 활발한 시즌을 맞았다.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었던 같은 처지의 신생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 나라는 죽이 잘 맞지 않지만 어차피 서로 바쁜 초기의 건설기가 끝나고 나면 명확한 관계가 설정될 것이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조선의 건국자라면 정도전(鄭道傳, 1337~98)은 조선의 기획자다. 속되게 말해 이성계가 조선 카페의 얼굴마담이라면 정도전은 실질적인 오너다. 공식적으로는 위화도 회군 때부터, 비공식적으로는 더 이전부터 이성계의 브레인 역할을 해온 정도전은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취임하자마자 일약 한반도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가 된다(앞에서 보았듯이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즉위한 뒤 곧바로 새 왕조 개창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그 목적은 물론 이성계를 새 나라의 초대 왕으로 만드는 데 있다. 1384년 이성계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갖기 전 그는 9년 동안이나 유배와 유랑의 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에 갈고 닦은 경륜을 이제 마음껏 발휘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정도전(鄭道傳)은 새 정부의 많은 요직을 겸직하게 되지만 직함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 어차피 그가 권력상 2인자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 새 나라에 필요한 소프트웨어의 총책임자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당시 그는 이성계를 한 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7?~195)에 비유하고 자신은 장량(張良, ?~기원전 168)에 비유했다. 알다시피 유방은 진시황제가 죽은 뒤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의 건국자이며, 장량은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뛰어난 참모다. 정도전(鄭道傳)은 심지어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했다고 말했는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자신이라는 이야기다. 그의 호방함도 대단하지만 그런 말을 이성계가 용납할 정도였다면 당시 정도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대세관, 뛰어난 학문과 중국에서도 보증한 문장력, 게다가 예술과 병법에마저 통달한 이상적인 참모 정도전은 팔방미인인 만큼 할 일도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작명(作名)이다. 물론 사람 이름이 아니라 나라 이름을 짓는 일이다. 이성계가 공식적인 건국 발표를 미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새 나라의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명나라의 요구이기도 하다. 이 중요한 국가 대사를 기획자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

 

 

마담과 오너 위는 조선 카페의 얼굴마담인 이성계이고, 아래는 실제 오너인 정도전(鄭道傳)이다. 이성계는 두 살 아래인 정도전을 오너로 섬기고 존중해준 듯한데,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전은 끝내 카페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비운에 죽었으나, 그가 꿈꾼 사대부 세상은 100년 뒤에 결국 실현된다.

 

 

여러 문헌을 뒤적거리며 국호 후보감을 찾던 그는 아마 고려를 건국하던 무렵의 왕건이 부러웠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취지였으니 고려라는 국호는 지을 것도 없이 당연했을 테니까(고려가 그 취지와는 달리 신라를 계승한 왕조라는 점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게다가 왕건의 시대에는 중국이 분열기에 있어 간섭할 나라도 없지 않았던가? 그 반면에 지금은 새 나라의 국호조차 독자적으로 짓지 못하고 중국의 허가를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허가 여부가 국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고심 끝에 그는 결국 두 개의 후보를 찾아낸다.

 

하나는 화령(和寧, 지금의 영흥)’이다.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니, 이것은 건국자의 출생지를 국호로 정하는 중국의 고대 전통을 따른 작명이다. 물론 하자는 없지만 아마 정도전은 중국 측이 그 이름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을 받드는 처지에 중국의 전통을 여과없이 취한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화령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곳, 그러니까 철령위(鐵嶺衛) 사태에서 쟁점이 된 지역이 아닌가? 화령이 어딘지를 명나라가 모를 리 없을 테니 아마 그런 지역의 이름을 국호로 쓴다면 중국에서 쓸데없이 그 저의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또 하나의 후보가 필요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이다. 조선이라면 한반도 역사의 여명기에 있었던 고대 국가의 이름이니 굳이 명나라에서도 반대할 리 없다. 더욱이 당시의 조선(고조선)은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국가였을 뿐 아니라 2500년 전, 그러니까 중국에서 주나라가 세워질 무렵 무왕(武王)은 은나라 귀족 기자(箕子)에게 조선을 봉토로 내주지 않았던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정도전(鄭道傳)은 무왕을 주원장(朱元璋)에 비유하고, 기자를 이성계에 비유하는 절묘한 알레고리(allegory)를 생각해낸다. 홍건적 두목 출신인 주원장도 자기가 전설 속의 성군(聖君)인 무왕에 비교되면 더없이 만족할 테니, 국호 승인은 따놓은 당상이다조선이라는 국호에 대단히 만족했던 정도전(鄭道傳)은 자신이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그 경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해동(한반도)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박ㆍ석ㆍ김 세 성씨가 신라라고 일컬었고, 온조(溫祚)는 백제라 했으며, 견훤은 뒤에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또 고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며, 궁예는 후고구려라 했고, 왕씨(왕건)는 궁예를 대신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들은 모두 한 지역을 임의로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명호를 세우고, 서로 침략하였으니, 국호는 있으되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기자 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 왕에 봉해졌다.’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조선은 국호를 정할 때부터 사대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 왕조였다.

 

1392년 자청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상질(韓尙質, ?~1400)은 과연 이듬해 2월에 당당히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온다. 작명 해프닝은 한편으로 정도전의 천재적인 재치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새 왕조를 세웠음에도 그의 대중국관이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아직 국교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명나라는 국호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조선을 엿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심사가 꼬인 명나라 정부라 해도 두 나라 관계를 옛 주나라와 기자조선의 관계에 비유하는 정도전(鄭道傳)의 영리한 지적 아부에 냉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흔히 정도전은 고려 말의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중국에 대해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국호를 정하는 데서도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이용할 정도였던 걸 보면 자주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진면목은 얼마 뒤에 더욱 생생히 드러난다.

 

 

 

 

두 신생국의 신경전

 

 

가장 중요한 국호가 결정되자 정도전의 조선 기획은 더욱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그의 재능도 더욱 빛을 발한다. 우선 그는 이성계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일종의 간이 오페라인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을 지어 작사ㆍ작곡ㆍ안무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현재 음률은 전하지 않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가사와 일부 춤동작만이 전한다). 그러나 이런 예능의 자질은 그가 지닌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곧이어 그는 군사제도를 정비해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만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직접 군사 조련까지 담당하면서 폭넓은 오지랖을 마음껏 과시한다.

 

1394년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짬을 내서 국가 운영 지침서인 조선경국전을 저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새 도읍지로 한양을 정하고 새로 지을 궁궐, 종묘의 위치와 이름까지 일일이 제정한다지금 서울의 대표적 고궁인 경복궁(景福宮)이 바로 이때 지어진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 경복궁은 400칸이 채 못 되는 작은 규모였으므로 정도전(鄭道傳)이 작업을 총감독하고 부속 건물들의 이름까지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개이경복(介爾景福, 그대에게 빛나는 복이 있으라)’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짓고,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침소인 강녕전(康寧殿) 등의 위치와 명칭도 직접 정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이 오리지널 경복궁은 훗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완전히 불에 타 없어졌고, 현재의 모습은 1867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다시 지은 복제판이다.

 

또 이듬해에는 고려사(高麗史)37권의 편찬까지 맡았으니 슈퍼맨이 따로 없다(앞에서 말했듯이 원래 새 왕조는 건국한 지 50년 이내에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이 문헌은 지금 전하지 않고 세종 때 재편찬한 고려사가 전한다).

 

그러나 건국 직업에 여념이 없는 정도전(鄭道傳)이 잠시 손길을 늦출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고려 말부터 한반도의 사태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온 명 나라가 여전히 조선을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일단 조선이라는 국호까지는 승인했으나 명나라는 여전히 새 왕조는커녕 이성계의 쿠데타 자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명나라로서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고려가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뀐 것에 때맞춰 한반도의 주인도 바뀐 것을 환영할 마음 역시 없었던 듯하다).

 

사실 정도전(鄭道傳)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으니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점에서는 명나라도 마찬가지다. 비록 오랜 만에 컴백한 한족 왕조였지만 아직까지는 신생국의 딱지를 벗지 못하고 있으므로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최대 관심사는 하루빨리 명나라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무엇보다 주변 정세에 대해 후각이 지극히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까지의 중국 왕조들이 중원에 도읍을 정한 데 비해 주원장은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확실히 할 겸, 또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겸해서 이례적으로 강남의 난징에 도읍을 정할 정도였다(곧 명나라는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지만 중국의 역대 통일제국 중에서 난징에 도읍을 정한 것은 명나라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관해 주원장(朱元璋)이 가장 만족스러워할 만한 변화는 정몽주를 대표로 하는 고려 말의 친명(親明) 세력이 집권하는 것이다. 고려가 친원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개혁에 성공하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새 왕조가 들어서는 것은 그로서는 전혀 환영할 만한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는 조선의 고삐를 한껏 죄는 방식으로 보상을 받고자 한다. 그 결과로 터져 나온 게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라는 사건이다(표전이란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표문表文과 황제를 제외한 다른 황족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전문箋文을 합친 말이다).

 

 

국호 문제가 통과된 시점에서 이제 명나라의 수중에 남은 카드는 바로 이성계에 대한 승인장이다. 조선을 승인했는데 이성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애를 먹일 수는 있다. 139511월에 이성계는 정총(鄭摠, 1358~97)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는데, 그 임무는 자신의 승인장, 즉 조선 국왕 임명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고상한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이라고 부른다. 고명이란 왕위를 승인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이란 그에 부수되는 인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책봉의 절차라고 보면 된다. 원래 고명과 인신은 당나라 시대에 5품 이상의 관리를 임명할 때 주던 임명장과 인장을 뜻하는 용어였으니,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왕은 중국의 관리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조선이 중국 바깥에 있는 속국인 이상 책봉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이성계가 조선의 국왕 노릇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책봉을 받기 전까지는 정식 국왕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그는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를 자칭할 수밖에 없었으니 여러모로 자존심도 상하고 나름대로 불편한 구석도 있다.

 

국호를 승인받은 이상 이성계는 책봉도 쉽게 이루어질 줄로 믿었다. 그러나 웬걸, 정총의 표문을 받아본 주원장(朱元璋)은 엉뚱하게도 표문의 문구가 불손하다며 트집을 잡는다. 애초부터 그는 뭔가 꼬투리를 잡을 심산이었으니 어차피 표문의 문구 따위는 표면상의 구실일 뿐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표문을 반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총을 억류해 버린다. 이듬해 조선은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이번에도 역시 표문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억류된다. 조선 정부가 명나라의 진의를 알게 된 건 그때다. 명 황실에서 표문을 지은 사람을 보내라고 다그친 것이다. 물론 그 지은이는 다름아닌 정도전(鄭道傳)이다.

 

 

1722年 英祖朝鮮國王世弟冊封誥命

 

 

이제 사태는 명확해졌다. 명나라는 처음부터 정도전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 정도전은 조선의 기획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명나라는 한반도에 조선이 들어서는 것보다 고려의 온건파이자 친명파인 개혁 세력이 집권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환골탈태한 고려 왕조가 적극적인 친명 정책으로 나와 충실하게 사대해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역성 쿠데타가 발생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새 나라가 생겨났다. 게다가 그 주체 세력은 이색(李穡)과 정몽주 등 적극적인 친명파를 제거하고 집권했다. 따라서 명나라의 의도는 조선의 브레인이자 기획자인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에게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둬야겠다는 것이다물론 고려 말에는 정도전도 친명파였으며, 새 국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사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보기에 이성계와 정도전은 중국의 승인 없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한 일종의 반역자. 명 황실에서 특히 정도전(鄭道傳)을 밉본 이유는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사건 탓도 있다(비록 범행 자체는 이방원이 꾸민 것이지만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았으면 쿠데타가 성공하기 어려웠으니 정도전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몽주는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1384년에 사신으로 와서 그 관계를 개선하는 데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정도전 자신도 당시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함께 명에 갔었으니 명 황실이 정도전을 어떻게 볼지는 명백하다).

 

그런 진의를 알고서도 호랑이굴로 찾아갈 바보는 없다. 정도전은 한 해 동안 몇 차례나 중국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대타로 다른 후배 관료들을 보내면서 버틴다. 결국 이 사건은 1년이상 질질 끌다가 13967월 표문 짓는 일에 참여했던 정탁(鄭擢, 1363~1423)권근(權近, 1352~1409)이 명나라에 가서 사죄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음을 명나라도 정도전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표문의 근본 목적인 이성계의 책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나라는 다시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 꼬투리를 잡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최대의 피해자는 정도전이 될 터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중대 결심을 한다. 바로 명나라에게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 초에 있었던 랴오둥(遼東, 요동) 정벌인데, 계획은 있었어도 실제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정벌이라 할 것도 없다. 일단 정도전은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대를 증강하고 예행 연습도 하는 등 나름대로 정벌의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게 시위용이라는 것은 정도전(鄭道傳)도 명나라도 알았고, 아마 참가한 병사들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조선 군대의 힘으로 랴오둥을 정벌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을 뿐 아니라, 정도전의 최대 목표는 어떻게든 이성계의 책봉을 받아내는 것인데, 책봉을 바라는 나라가 책봉을 주는 나라를 공격해서 그 목표를 이루려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이 계획은 1398년 사건의 양 당사자인 주원장(朱元璋)과 정도전이 죽음으로써 끝내 계획에만 머물고 만다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였던 정도전이 비록 계획뿐이지만 감히(?)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나라가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고려 초기 광종(光宗)의 정책과 닮은 데가 있다.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통일제국으로 성립하자 광종 역시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다가 12년 뒤에야 비로소 송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그래도 고려 초 광종은 잠시나마 독자적인 연호를 쓸 만큼 강경 노선을 취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그 정도까지 버틸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배산임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북한산을 뒤로 하고 한강을 앞에 둔 천혜의 도습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새로 지었다. 그림은 경복궁의 전경인데, 이것은 19세기 말에 중건된 모습이고 처음 지을 무렵에는 이보다 훨씬 작았다.

 

 

유교왕국을 꿈꾸며

 

 

주원장(朱元璋)이 조선을 회의적으로 바라본 데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볼 때 조선은 생겨날 필요가 없는 나라다. 이미 고려 말에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세력이 확실히 자리를 굳힌 마당에 왜 굳이 새 왕조를 세워야 했을까? 중국의 원-명 교체는 민족 주체가 바뀌었으니 나름대로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고려-조선 교체에는 그런 필연성이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려와 조선은 성격상의 차이가 없고 겨우(?) 왕실의 성씨만 달라졌을 뿐이다. 주원장과 정도전(鄭道傳)이 허허실실한 신경전을 벌인 이유도 서로가 그런 배경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차이를 만들면 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 만한 타당하고 합리적인 명분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그 차이의 핵심이 바로 유학 이념이라고 판단한다. 고려는 비록 유학을 건국 이념으로 채택했지만, 왕실에서도 스스럼없이 승려를 배출할 만큼 불교가 융성한 나라였다. 또한 고려는 비록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했으나 사대부-관료 체제를 이룩하지 못하고 끝내 귀족 지배체제에 머물고 말았다. 정도전(鄭道傳)은 바로 그런 점이 고려 왕조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고 생각하고, 조선을 완벽한 사대부 국가로 만들고자 한다(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고려는 단계적으로 점차 유교 국가로 발전해가고 있었으니 실은 굳이 조선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해도 어차피 사대부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한반도에 조선이 들어서야 할 역사적 필연성이 되어줄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이 국호를 결정한 다음 곧바로 조선경국전의 저술에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기 위한 책이라는 뜻의 제목에 어울리게 조선경국전은 새 왕조의 정치ㆍ경제ㆍ사회 ㆍ문화ㆍ군사ㆍ법 등 모든 부문을 총망라한 종합 교과서다. 교과서라면 모름지기 내용이 객관적이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에도 걸핏하면 제기

되는 역사 교과서 왜곡 논쟁에서 보듯이 객관적인 교과서란 사실상 없다. 즉 모든 교과서는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이씨 왕실을 위한 교과서인 조선경국전에 담긴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유학이다.

 

정도전(鄭道傳)이 이 책의 목차를 구성하는 데 가장 크게 참조한 문헌은 주례(周禮). 주례의례(儀禮), 예기(禮記)와 더불어 이른바 ‘3를 이루는 중국 국가제도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으로, 일찍이 주 무왕의 일급 참모였던 주공(周公)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책이다. 무려 2500년 전에 있었던 중국 주나라의 예법을 다룬 문헌을 참고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주나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학 국가였기 때문이다. 유학의 고향 주나라는 일찍이 공자(孔子)가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고 중국 역대 왕조들이 늘 돌아가야 할 영원한 이상향으로 추앙했던 나라가 아닌가? 국호를 정할 때도 주 무왕과 기자의 관계를 떠올렸던 정도전(鄭道傳)이었으니 주례를 참고서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아마 정도전은 주원장(朱元璋)을 주 무왕에 비유하면서도 은근히 명나라가 옛 주나라에 미칠 수 있겠느냐는 뜻을 내비치고 싶었을 것이다. 주나라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들은 저마다 그 좋았던 옛날을 계승한다고 표방했으나 실은 어느 왕조도 주나라의 후예라는 영예를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정도전이 주나라를 내세운 이유는 물론 실제로도 유학 이념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명나라에게 우리 조선도 유학과 중화의 이념을 소중히 여기며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측에서 볼 때 그런 태도가 오만한 자세로 비쳐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뜩이나 비천한 신분콤플렉스를 지닌 주원장(朱元璋)은 그런 정도전(鄭道傳)의 태도에서 불편한 심기를 느꼈을 것이며, 그게 조선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경국전주례6(六典)에서 본떠 국정의 부문을 치(), (), (), (), (), ()의 여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 (), (), (), (), 즉 각각 관리, 백성, 제사, 군사, 사법, 산업을 다루는 부서들에 해당한다(주례에는 , , , , , 로 나누고 있으나 각각의 의미는 똑같다. 조선경국전6전 부분만을 따로 뽑아 별책으로 만든 게 경제육전經濟六典이다).

 

당대의 위정자와 관리, 백성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조항과 내용들이 중요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보다 전체적인 성격이 더 중요하다. 조선경국전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서론에서 강조되는 ()’의 정치다. 상권에서 보았듯이 공자(孔子)는 주나라 시대에 탄생한 예()개념에 인을 더해서 유학의 골조를 구성했다(맹자도 역시 인에 의한 왕도王道 정치를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이 이성계에게 인을 주문한 것은 곧 조선의 국왕이 유교 정치 이념에 충실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유교 국가의 왕은 원래 실무를 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도전은 재상이 통치의 실질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국왕은 군림하는 존재이고 실제 정치와 행정은 재상 중심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바로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천자를 보좌하는 전형적인 유교 정치의 밑그림이며, 주자학(성리학)을 정립한 주희(朱熹, 1130~1200)의 정치 사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이 제시한 조선 건국의 이념은 이제 분명해진다. 그는 옛 주나라의 예법을 기본 바탕으로 하면서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을 유교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개인적인 동기로, 정도전은 비록 이성계가 국왕이지만 조선의 기획자인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이 상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관료가 실무를 담당하는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유교왕국, 바꿔 말해 사대부 관료 체제를 공언하면서 출발한다. 역사상 어느 나라도 이렇듯 처음부터 지배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명확히 밝히고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의 그 원대한 야망은 곧 예상치 못한 거센 반격을 받게 된다

 

 

조선의 설계도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에 실린 조선경국전의 첫 부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디자인에 따라 조선의 시공만 담당한 십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과연 나중에 이 책은 세조 때 본격적인 국가운영 지침서인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